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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Jun 21. 2021

나만의 온도

어둑한 아침이다. 거대한 비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은 기운이 집 앞 나무들의 온몸을 흔들고 있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캔들에 불을 켜고 스피커에 음악을 연결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즈음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빗소리가 더해지자 방 안에 있는 유리로 만든 조명을 켰다.





작지만 강한 빛. 여리지만 단단한 빛. 달과 별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창문. 꽤 오랜 시간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뭔지 모를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신비한 빛이 있는 곳. 유리에 대한 매력을 발견한 시간. 좀 더 의미 있는 걸 만들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유리공방의 문을 열었다.





직선과 곡선을 일정한 힘으로 잘라 부드럽고 때론 강하게 그라인딩. 랩핑을 하고 납땜을 하며 더욱 단단하게 붙여내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 정도면 됐다 싶으니 내 맘에 꼭 맞는 달과 별이 보인다. 예쁘다. 조명에 비친 나만의 창문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나도 따뜻하고 어여쁜 존재가 될 것만 같았다.




신비했다. 그만큼 유리의 색도 참 다양했다. 유리는 어느 방향 어느 위치에서 잘라내느냐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빛을 낸다. 그라인딩을 끝낸 유리를 퍼즐 맞추듯 도안 위에 올려 알맞게 맞을 때의 기분이란. 마음 잘 맞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처음 유리를 자를 때는 유리칼 끝에서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불안했다. 반복될수록 뭔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졌다. 초보인 내가 잘라낸 유리면은 깔끔하게 잘릴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숙달된 사람도 어렵다며 나를 격려했다. 중요한 것은 힘. 떼어낼 때가 되면 알 수 있었다. 힘 조절에 실패했음을. 어떤 유리는 아예 잘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균열에 의해 깨져버렸다.




한 때는 평생 이어질 것만 같았던 관계 속에서 완벽한 타인으로 되어가는 공허함을 다독인 적이 있다. 그들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즈음 나 역시 가슴 한 구석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잘라냈다. 더 이상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다. 그들과 나는 그렇게 과거가 되었다. 깨져버린 유리조각처럼.




깨어질 관계는 언제든 깨지기 마련이다. 멀어지면 어쩌나 조바심 냈던 관계들은 마음에 상처를 남겼지만 내 삶을 흔들지는 못했다. 또,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지 않으니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로 힘들지 않아도 되었다. 한 걸음 물러나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결 편해졌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크기도 모양도 다른 온도로 살아간다. 때마다 다른 빛을 내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 온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비친 내 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몇 도의 온도를 지녔는지.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찾아가고 있는지. 그 힘이 어떤 울림을 주게 될지 말이다.


 



따뜻한 아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아침.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찾아내는 시간. 이 아침이 유리로 만든 나만의 조명에 스며들어 빛을 내고 있다. 시작할 힘을 실어주는 용기. 그것은 새로운 바람을 남긴다. 시간에 낡지 말고. 더 깊은 빛을 내고 싶다고. 당신의 마음을 내어줘도 괜찮은 온도를 지닌 사람이고 싶다고. 당신을 채우는 거리에 있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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