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말 공부 다시 해 볼 생각 없어? 올해 많이 뽑을 거라는데” 아는 언니에 이어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지막 기회일까. 정말 내 길이 맞는 걸까. 임용 준비를 다시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아닌 척했지만 나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꿈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확신보다는 의구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생각했다. 내게 재능이 있긴 있는 걸까. 불확실한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기울어진 가세에 맞물려 삼 남매를 가르치기엔 힘에 부쳤던 엄마. 그래서였을까. “어머니, 제가 레슨 선생님을 소개해 드릴게요. 한번 가르쳐보시는 건 어떠세요?” 중학교 음악 선생님의 전화에 엄마는 아이를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뜻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답했다. 그때 나는 나를 둘러싼 상황과 타의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날들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자의에 의한 포기였고 두렵고 막막했던 현실을 탓하기만 했던 내 어리석음이었다.
대학교를 졸업 한 뒤 바로 취업을 해야만 했던 나는 1년 뒤 임용에 합격한 친구들의 소식을 들었다. 초라한 나를 발견했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고 있는 나 자신을 위로하며 잘한 선택이라고 토닥였다. 그 토닥임이 지칠 때면 원망의 화살은 애꿎은 엄마에게로 꽂혔다. “왜 나만 이 꼴로 있어야 돼. 나도 공부시켜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마다 찢겼을 엄마의 가슴은 보지 못했다. 그해 나는 일과 공부를 병행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원망했고 초라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아무런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열심히 일해야만 했고 마침내 학자금 대출도 모두 갚았다. 생각해보면 피아노도 공부도 그 현실을 돌파해 낼 자신도 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상황을 핑계 삼아 매일같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내 모습을 봐달라고 휘청거리며 길을 걸었다. 그냥 위로받고 싶었을 뿐. 어쩌면 그 어떤 것에도 간절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언젠가 TV에서 클래식 장르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잔잔한 흐름이 좋아 즐겨봤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남자 주인공은 말했다. “재능은 없는 게 축복이죠. 내가 전생에 뭘 잘못해서 이렇게 살고 있나.” 남자의 말에 이어진 여자 주인공의 독백이 내 가슴을 몇 번이나 적셨다. ‘나는 그만큼의 재능을 감히 바란 적도 꿈꾼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 재능으로 꿈을 이룬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일까?’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개가 끄덕여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들이 내게 여러 번 있었다. 나 역시 내게 재능이라는 것에 대한 여러 생각이 있었기에. 재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독이요. 감히 바란 적도 없는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면 어쩌면 재능이라는 건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충분히 능가할 수 있는 것. 간절한 누군가에게는 끝내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닐까.
끄적거림을 좋아했고 손 편지를 써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것이 행복이었다. 힘들 땐 밤하늘의 별을 바라봤고 괴로운 날이면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마음에 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내게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수없이 고민했고 궁금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좋으니까 자꾸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 그런 것. 그것이 어쩌면 재능이요 빛나는 삶에 가까워지는 비밀의 열쇠일지도.
내게 더 이상 재능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글을 쓰는 게 좋으니까 자꾸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 것. 앞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삶의 길 위에 확신을 갖고 한 발 한발 내디뎌 보기로.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기에. 오늘도 꿈을 꾼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인생이기에. 주저하지 말고 끌려가지 않기를. 분명 웃고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