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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Jan 14. 2021

함께 가야 하는 이유



코로나 19로 틀어져버린 모든 일상이 요즘 들어 부쩍 버거워졌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점으로 향했다. 아마도 책이 주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을지 모르겠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책을 탐하고 싶었지만 두 아이의 재촉에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서둘러 읽고 싶은 책을 골라야만 했다. 가방에 책과 점장님이 주신 새해 달력을 넣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달력을 꺼내 들었다. 달력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예쁜 그림들이 펼쳐졌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페이지를 넘기며 그림 아래 적힌 동화의 짧은 내용을 함께 읽어 나갔다. 「기억해. 함께 가야 더 멀리 갈 수 있어. 같이 가야 끝까지 갈 수 있어.」 그림에는 배낭을 멘 한 아이가 여러 산등성이를 넘기 위해 서 있었다. 난 잠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 엄마도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큰 아이가 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아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배경은 그림에서 주는 따뜻한 모습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 날은 내 언어의 온도가 냉랭했다고 반성했던 차였기에. 큰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정확히 말하면 똑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 대장봉 한번 가볼까?” 어느 주말, 남편이 말했다. 산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 있던 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선유도로 향했다. 탁 트인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내 복잡한 마음을 식혀주는 환풍기처럼. 미적지근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생각보다 춥지 않아 좋았다.


가파른 계단 길이었다. 대장봉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 역시 지쳐있었다. 더욱이 스스로 당차게 오르는 둘째와 달리 손을 잡아 줘도 마지못해 따라온 것 마냥 의욕적이지 않은 큰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정상에 올라 분위기를 즐기는 둘째에 반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빨리 내려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큰 아이의 표정을 보니 자꾸만 쓴 것이 올라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큰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려오며 달래는 듯했지만 화내고 있었다. 대화의 언어가 아니었다. 어느새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평평한 길만 걸을 수 없다는 둥. 힘들다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둥.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둥.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향했던 그날의 말들은 되돌아와 고스란히 나에게로 꽂혔다.


생각해보면 그날 아이는 내게 함께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성향이 다른 두 아이를 비교하며 큰 아이가 보낸 신호를 알아듣지 못했다. 마음이 지쳐있다는 신호. 꼭 말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을 텐데. 아이에게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을 주지 못하고 홀로 걷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늘 내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이 버겁다는 것을 핑계 삼아 흔들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삶 속에서 지나쳐버렸던 때론 묵인해버렸던 함께 가자는 여러 모습의 신호들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뒤돌아 손을 잡아줬더라면 걸음의 속도를 늦췄더라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 신호를 알아채는 것도 함께 가는 자의 몫. 어쩌면 그것이 동반자의 숙명일 터.


힘들수록 함께 가야 한다. 서로의 온기.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마음이야말로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돕는 원동력이기에. 우리는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 서로에게 잊지 않고 불어주는 바람이 되어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어쩌면 내게 보내는 위로일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길을 떠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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