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이렇게 추운 날 나간 거야?” 은파 수변로를 걷고 있는 내게 걸려온 남편의 전화. 맞다. 올 겨울 최대 한파. 오늘 아침 일기예보였다. 무슨 마음인지 패딩점퍼 하나에 의지한 채 나는 밖으로 나갔다. 걷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찬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얇은 옷과 양말.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 나는 참 준비도 없이 나왔다.
그래도 좋았다. 짙은 찬바람. 이 알싸한 공기를 좋아했다. 어쩌면 코끝과 양 볼이 불긋하게 달아오르는 빨개짐과 마음 안쪽까지 불어오는 시림이 내게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선택과 포기의 기로에서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나온 그날 아침. 내 발을 자꾸만 붙잡는 것이 있었다.
꺽인 연꽃의 줄기_그들이 내게 보내는 암호를 해독해야할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바짝 말라 고개 숙인 연꽃의 꽃받침. 무게에 따라 제각각 꺾인 줄기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연잎까지. 수명을 다한 것 같으나 물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외로워 보여 그 앞을 한참 서성였다.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음을.
깨끗하고 우아하게 피어나는 연꽃과 그를 받쳐주는 초록의 물결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사진을 여러 번 남겼었다. 이제 보니 그들은 늘 이 시림을 견뎌오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토록 고귀한 모습의 꽃을 피워낸 것임을.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해서. 아프도록 대견해서.
나는 꺾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쳤고 피어있고 싶어 실수할 때가 많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자존심 상해 펑펑 울어대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이 떠올라 고개를 떨궜다. 출구 없는 길을 만날 때면 핑계를 댔고 도돌이표 같은 답답한 상황들을 한탄했다. 내가 없는 나로 살며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 애써온 시간들. 얼굴이 붉어졌다. 자꾸만 뜨거운 것이 차올라서.
서른아홉. 30대의 끝. 아홉이라는 수가 주는 마지막이라는 불안감과 뭔가 이루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조바심이 뒤섞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중심을 잃었다. 주변의 말에 귀를 펄럭이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재능과 노력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또 다시 아홉 앓이가 시작된 걸까.
스물아홉. 나는 그때 처음 앓았다. 아홉이라는 수를. 그때의 나는 아팠고 불안했다. 깊은 외로움으로 보냈던 20대의 마지막.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짊어지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어 스스로를 괴롭혔다. 아픈 기억으로 남은 20대의 끝. 갖고 싶어 이루고 싶었고 남기고 싶어 집착했으나 결국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서른아홉의 길목에서 만난 시림을 견디고 있는 계절.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나를 세워놓고 원하지 않는 선택과 포기하려 했던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꺾임은 영원한 것은 아니기에. 그 사이로 일렁이는 빛을 보았기에. 다름을 인정하고 그 시간을 견뎌내기로 했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피어날 것임을. 그 계절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기에.
몇 걸음을 걷고 나면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0」. 시작이 되는 완전한 숫자. 비워져 있어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수. 그 안에 내 선택을 싣기로 했다. 그 선택에 대한 집중과 책임의 도리를 다 할 수 있기를.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생각보다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은 밤. 그 거리에선 내가 있는 나를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