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고 오는 길
가을의 끝자락에서 만난 때의 의미
가을이 주는 색색의 풍경과 공기. 낙엽의 특유한 냄새. 가슴을 울리는 아련한 빛까지. 이번에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틀렸다. 때를 놓치니 이미 그것들은 저 멀리 가고 없었다. 다음을 약속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다음은 오늘의 모습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지난 주말 금산사. 나는 그렇게 가을을 마중 나간 곳에서 가을을 보내고 왔다.
맞다. 때를 놓쳤다. 예년보다 일찍 갔음에도 볼 수 없었던 그날의 가을처럼 나는 살아오면서 맞이했던 여러 순간의 때를 놓치며 살았다. 빚쟁이가 끌어가고 남은 피아노의 뒷자리를 보며 꿈을 포기했고 시를 좋아했던 문학소녀의 꿈은 녹록지 않았던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끔은 생각했다. 주어진 현실을 무너뜨리고 한 발 더 나아갔다면 그때가 나에게 완벽한 때였을까.
“저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아는 것이 두려웠어요. 내 아픔과 상처를 누군가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고 무서웠죠. 하지만 글을 쓰면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저를 보여주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지난주, 에세이 쓰기 4기의 마지막 모임에서 나는 고백했다. 말의 시작부터 떨렸지만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랬다. 몇 번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함께하게 된 이 모임은 내게 글쓰기 이상의 것들을 선물했다. 나는 글쓰기를 하며 내내 서랍 속에 감춰두었던 기억을 여러 번 마주했다. 너무 아파 꺼내 보이기도 싫었던 감정을 바로 보고 그때에 머물러 있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다가가 위로했다. 나는 부서졌고 비로소 다시 깨어났다.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나에게 때때로 찾아왔다. 다만 가려진 눈에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외면했고 어느 날은 부정했다. 내가 꿈꿔보지 못한 차마 피어보지 못한 여러 순간의 때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나에게 자연스레 흐르는 강물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우연히 스치듯 불어올 듯 말 듯 다가와 여러 날을 고민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마음의 바다에 일렁이는 한 지점. 문득 스치는 찰나에도 때가 온다는 걸 믿는다. 때라는 것은 약속된 친구처럼 다가오지 않기에. 망설이는 순간에 또 저 멀리 사라져 버릴까 싶어 그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어쩌면 완벽한 때가 없을지 모른다. 다만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때가 보내는 신호와 내 시간과의 교집합이 이루어질 때 완성되는 건 아닐까.
이 가을의 끝자락에 나는 또 한 번의 때를 맞이한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내 안의 나를 세밀하게 만져주고 원망하며 보낸 지난 시간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어리석었던 나에 대해 사과를 하는 시간. 후회로 남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훗날 내 책에는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가 담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