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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Jun 25. 2021

마음 청소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가슴 뚜껑 열어보면 끓지 않는 냄비가 없다 하잖아요.”

집의 공간과 물건을 정리하고 재배치해 주는 한 프로그램에서 유쾌하고 밝은 사람이라 여겼던 한 작곡가의 고백. 그의 좋은 웃음 뒤에 감춰져 있던 상처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저녁, 나는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거실에 있는 아이들의 책장과 작은 방에 있는 피아노의 위치를 바꾸기로 했다. 아이들과 함께 책장의 책을 꺼내 옮기고 나는 바닥이 긁히지 않도록 피아노의 바닥에 수건을 여러 장 깔았다. 이리저리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덕에 겨우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책장과 피아노 뒤편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닦았다. 책을 종류대로 순서대로 배열해 정리를 하고 새로 옮긴 피아노 자리 주변도 정리하고 나니 뭔가 새롭고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제야 알았다. 물건과 공간의 재배치만큼 내 마음의 공간과 물건도 재배치가 필요했음을.





나는 늘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할 공간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고 보고 싶지 않은 상황을 대면할 때마다 묵혀 놓은 감정을 꺼내 보며 절망했다. 집에는 몸이 쉴만한 휴식의 공간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이 진짜로 쉴 수 있는 마음의 방 하나 비워둘 줄 몰랐다. 보이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굳은살이 박이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버렸다.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어지럽혀진 마음을 그대로 두고 외면하면서 괜찮아질 거라 여겼던 마음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 시간은 결코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냥 잊힐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공간도 재배치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자리 잡아 나를 더욱 무겁게 했던 기억을 꺼내 보기로 했다. 마음도 정리가 필요했다.




마음에 있는 공간에 가득 찬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 놓았다. 비워야 할 물건과 필요한 물건을 나눴다. 그중에서 욕심에서 비롯된 내 것이 아닌 것은 나눔 상자에 넣었다. 공간에 수북이 쌓인 묵은 먼지를 쓸고 닦아내 물건을 하나 둘 재배치했다. 그리고 바람이 통할 수 있게 창을 내어 두었다.





가끔언제쯤이면 비에 젖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마음이 비에 흠뻑 젖도록 내버려 둬도 좋을 일이었다. 그 비는 나를 더 단단하게 하고 한 뼘. 두 뼘 자라나게 했을 텐데. 왜 비 한 방울 젖지 않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았을까. 늘 나의 한계를 짐작하고 나의 미래를 예단하며 아무 씨앗조차 심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에 미안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 있다. 자꾸만 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마음속에 잔잔하게 울려오는 음악이 있다. 오후 5시의 빛을 만날 수 있는 곳.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창문 빛 가리개가 단아하게 흔들거린다. 딱딱하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나뭇결이 살아있는 마루. 한낮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 그 공간에 나를 내려놓는다.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하나하나 모두. 애틋하고 다. 때론 지나치게 차가웠고 매서웠던 바람의 시간을 잘 견뎌준 내 마음이 언제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쉴 수 있게. 찰나의 단잠처럼. 잠시여도 좋다. 더 이상 꿈결의 시간은 바라지 않는다. 오늘 웃을 수 있다면 나는 이제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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