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친정집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상처투성이인 이 곳. 5년 전,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만치 105동 옆 경로당 평상이 보였다.
“자기야, 저 작은 계단 위쪽 보이지? 옛날엔 저 평상 자리에 공중전화 있었는데”
“응.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랬나? 저기에서 오빠한테 진짜 전화 많이 했는데”
“그래? 형님한테?”
“응. 근데 우리 오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여동생이 울면서 전화했으니”
느닷없이 흐르는 눈물에 괜히 멋쩍어졌다.
20년 전쯤. 집 앞에 있던 공중전화.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공중전화가 그 평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종종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 전화를 했다. 나는 열일곱. 오빠는 열아홉. 고 3인 오빠에게 철없는 동생은 엄마 아빠가 싸울 때마다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했다. 오빠는 내 한숨과 눈물을 다 받아줬다. 생각해보면 오빠는 내 전화를 받아주기엔 너무 어렸다. 내 전화는 오빠가 대학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매번 전화 끝에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오빠는 말했다. “괜찮아”
오래전, 오빠의 장교 훈련이 끝나고 가족 면회가 있던 날이었다. 오빠와의 만남을 위해 우리 가족은 포항으로 갔다.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꺼내놓았다. 훈련장에는 엄청난 수의 예비 장교들이 서 있었다. 땡볕 아래 저 많은 장교들 중 우리 오빠가 있다. 오빠가 서 있는 열의 자리와 이름을 확인했다. 이 줄에 우리 오빠가 있다. 똑같은 복장에 비슷한 체격 탓인지 단번에 오빠를 찾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 동생과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한 사람.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을린 얼굴에 군기가 바짝 든 오빠. 전보다 왜소해진 느낌의 오빠가 부모님께 경례를 했다. 나는 우리 오빠를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또 그동안의 오빠의 고된 훈련이 스쳐지면서 가슴이 아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걷는 게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오빠,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다리를 절뚝거려?” “ 어, 우리 새벽까지 행군했어.” 아무렇게 않게 말하는 오빠. 발 좀 보자는 엄마의 말에 드러난 군화 속 오빠의 발. 물집이 나고 갈라져 살이 벗겨진 모습에 나는 눈물을 삼켰다. 이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아프지 않느냐는 내 말에 오빠는 말했다. “괜찮아”
내 피아노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천으로 덮인 피아노가 실려 있는 작은 트럭이 내려가는 걸 본 오빠. 슬픈 예감에 뛰어 들어간 내 방에 남은 텅 빈 피아노 자리. 오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등학생인 오빠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쫒아나간 길에는 이미 사라져 버려 트럭의 뒷모습마저 볼 수 없었고 이 기막힌 소식을 나에게 전할 수밖에. 조금만 더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오빠는 피아노를 지켜주지 못했다며 자책했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방황하던 내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던 사람.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말에 오빠는 내게 작은 피아노를 선물했다.
내가 결혼하던 날, 오빠는 기뻐했고 아파했다. 가발 위 하얀 면사포를 둘러쓰고 결혼하는 내 뒷모습에 오빠는 웃고 눈물을 삼키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빌었으리라. 내 머리 빠짐을 처음 발견했던 오빠. 그 간의 일들이 오빠의 머릿속을 스쳤으리라. 웃는 모습에서도 걱정하며 조마조마하는 내 마음을 읽었을 테지. “걱정하지 마.” 결혼식 전 날 내게 말했다.
가끔 오빠는 늦은 저녁에 나에게 전화를 한다. 열 번 중 네 번은 술을 마시고 난 뒤다. 오빠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묻어두고 먼저 나의 안부를 묻는다. 나와 동생이 방황할 때마다 시시 때때 우리의 안부를 묻고 또 확인한다. 오빠는 고운 날에도 아픈 날에도 항상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다. 나는 가끔 겁이 난다. 자신은 늘 괜찮다는 오빠가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봐. 아니 그동안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놓은 것들. 그 속이 베이고 문드러진 상처에 굳은살이 박여버려
아파도 힘들어도 느끼지 못할까 봐.
‘엄마 나 1등 했어.’ 얼마 전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출처도 알 수 없는 문자. 사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누가 1등 했다는 거야? “누구긴 너희 오빠지.”
그래 맞다. 우리 오빠. 오빠는 얼마 전 있었던 합동군사대학교 교육 중 클래스 1등을 했다. 코로나 19로 오랫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잘 만나지도 못하고 쉼 없이 달려온 오빠. 며칠 뒤 오빠에게서 사진이 왔다. 국방부 장관상과 졸업증이었다. 오빠를 축하하며 선물을 보냈다. 뭘 이런 걸 보내느냐는 오빠. 나는 말했다. “1등에게는 상품이 있어야지! 고생했어. 오빠, 축하해”
엄마 아빠의 자랑이자 첫사랑. 할머니에겐 더없이 자상했던 손자.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오빠이자 형. 기울어진 집안이 키워낸 맏이의 무게. 그 과정에서 가슴에 남은 상처를 뒤로하고 동생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 오빠는 우리의 걱정과 아픔을 대신 짊어주려는 사람이었다.
시내에 있는 웅변학원에서 버스를 타고 회현면의 한 시골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던 여섯 살 어린 꼬마. 아빠와 판박이인 탓에 동네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 주조장 집 손자. 그 덕에 알게 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오빠의 모습. 동네 사람들은 꼬마를 이렇게 기억한다.
“애기가 꾸벅꾸벅 졸다가도 집 정류장쯤 오면 눈을 팔딱 뜨더라고.”
“여기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 디 용케도 일어나서 콩콩콩 뛰어 집에서 내리더라니까.”
나는 지금 눈을 감고 여섯 살 어린 꼬마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꼬마를 끌어안고 말을 건네리라. “꼬마야, 졸아도 괜찮아. 한두 정거장쯤 그냥 지나치면 어때, 버거우면 지나쳐도 괜찮아. 하지만 꼭 기억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어느 갈림길에 섰을 때라도 다시 돌아오는 버스가 있다는 걸. 그리고 잊지 마. 그곳에 우리가 있다는 걸.”
내가 오빠에게 바라는 한 가지. 그 무거운 짐을 언제라도 내려놔주길. 나는 또 기도할 뿐이다. 그의 삶의 자리가 안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