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나기를. 제발 우리를 떠나 행복하기를. 나는 왜 그런 기도를 하게 된 걸까. 그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엄마가 안타까워 우리를 떠나 더 나은 곳에서 엄마의 삶을 살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내 기도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어졌다. 그리고 더욱 간절해졌다. 나는 어느덧 직장생활 3년 차를 지나고 있었다.
오후 1시쯤. 일하는 중에 사촌오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고모 병원에 있어. 다행히 위세척은 했고.”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아니 뜨거운 돌덩이가 내 가슴을 내리찍었다. 나는 간신히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울음을 참고 있던 나는 동료의 품에서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누구도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들 나를 안아줄 뿐이었고 바라볼 뿐이었다.
퇴근 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걸어도 내가 가야 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미친 사람 같았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분명 우리 집인데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나는 도둑고양이가 된 것 마냥 조심스러웠다. 현관문을 열었다. 깜깜하고 조용했다. ‘아, 아무도 없구나’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묵직하고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엄마 아빠는 어디 있냐!”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나고 그 열기가 얼굴로 타고 올랐다. 씩씩거리며 안방에 들어가 엄마의 옷가지를 몇 벌 챙겼다.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외삼촌댁에 갔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누워있는 엄마를 붙들고 울었는지 아니면 엄마를 마주하지 못한 채 돌아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그 기억을 스스로 삭제한 것 같다. 너무 아픈 장면이기에. 기억에 남는 건 엄마의 옷가지를 두고 나와 한참을 걸었던 밤길뿐이다. 환한 가로등마저 원망스럽던 서러운 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 아프고 버거운 삶인지. 화가 치밀고 식지 않는 분노가 들끓던 밤. “언니, 나 오늘 하루만 좀 재워줄 수 있어?” 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그 날 이른 아침,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내게 엄습했다. 출근길, 큰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삼촌, 엄마가 이상한 것 같아요. 외삼촌, 아침 일찍 죄송한데 집으로 좀 와주세요. 빨리요.” 쏟아지는 눈물에 지쳤고 닦아낼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두려웠다. 일하는 내내 기도했다. 제발. 엄마가 잘못되지 않기를. 우리만 남겨두고 떠나지 않기를.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동안 해온 내 어리석은 기도가 땅에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 기도는 틀렸다고.
난 두려웠다. 이 고달픈 삶을 사는 엄마가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기도했다.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그건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그것 또한 내 핑계를 삼고자 했다. 덜 상처 받기 위한 나만의 방어기제로 마치 내가 그것을 바라 온 것처럼. 그렇다면 덜 아플 테니까. 기도하는 마음은 늘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기도로 가장한 나의 지독한 두려움이었을지 모르기에. 사실 나는 엄마가 우리를 떠나기를 바란 것도 맞고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도 맞다.
엄마는 아마도 내가 이런 기도를 해 왔음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가끔 무엇이 엄마를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갔는지 생각했다. 이제는 내려놓고 싶은 고된 삶의 구렁텅이 그리고 더러운 진흙탕 싸움을 끝내려 엄마는 자신을 죽음의 방식으로 변호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짐작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그날의 밤. 그 날의 끊어진 기억이 궁금하다. 혹여 내가 엄마를 마주하지 않고 그냥 돌아 나왔다면 나는 그때로 돌아가 엄마의 손을 꼭 붙들고 미안하다고 말하리라. 내 기도의 탓이라며 통곡하리라. 나는 지금도 간절히 기도한다. 엄마가 나를 떠나지 않기를. 제발 우리와 함께하기를. 엄마의 곤한 삶이 조금은 편해지기를. 그리고 이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