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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Aug 08. 2020

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중학교 합창단 시절이었다. 음악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학교 앞 서점에 악보집을 사러 갔다. 급하게 필요한 악보집이었고 선생님도 음악실에 계셨기 때문에 돈은 점심시간에 가져다 드리기로 하고 친구와 함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냐!”

주인아저씨는 선생님 심부름이라 말을 해도 다들 그렇게 가고 돈을 안 가져온다며 악보집을 주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 왜 내 말을 믿지 않으시는 건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친구는 선생님께 이 상황을 말씀드리려고 음악실로 올라갔다. 이내 선생님이 오셔서 돈을 지불하고 나는 그런 학생이 아니라며 오해를 풀어주신 뒤 악보집을 받아 나왔다. 선생님은 눈물이 터진 나를 달래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서점에 들어간 뒤 잠시 후 내게 묵직한 대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선생님은 살다 보면 내 마음과 다르게 삶이 흘러갈 수도 있다고 하시며 강인한 내가 되길 바란다고 위로해주셨다.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 중학생인 나에게 무척 강렬하게 다가온 책이었다. 그날 밤 나는 온갖 역경을 딛고 화가로서 성공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었다.



책장에 놓인 그 책을 보니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책을 꺼냈다. 누레 책은 여기저기 때가 묻고 묵은 냄새도 났다. 책을 펼쳐보다가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어느 한 글귀를 발견했다.

 ‘어떠한 고통에도 한계가 있고, 어떠한 슬픔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때의 나는 한계가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언덕, 그 어딘가를 걷고 있었나 보다.
이 슬픔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스물여섯. 나에게 원형탈모가 생겼다. 시내 병원에 나가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다.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고 머리는 앞머리 라인을 따라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넓은 머리띠로도 더 이상은 빈 머리가 가려지지 않았다. 탈모를 관리한다는 미용실을 소개받아 다녀봤지만 머리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만 갔다. 결국 머리는 전부 빠져버렸고 나는 가발을 쓰기 시작했다.

이모의 소개로 분당 서울대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3~6개월 전의 폭발적인 스트레스가 면역체계 이상반응을 일으켜 내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인 머리를 빠지게 만든다고 했다. 처치실에 들어가 가발을 벗고 의자에 앉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긴 바늘이 내 두피를 찌를 때마다 나는 떨렸고 무서웠다. 아팠고 차가운 주사액이 들어옴을 느낄 때 서러운 눈물을 참아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은 더욱 어려워졌다. 경매에 넘어간 집에서 나온 뒤 엄마와 아빠, 나는 작은 원룸 식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는 것조차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터질 것처럼 싫은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매일 밤 숨죽이며 울었다. 막막했다.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며 답답함을 풀어내기도 했고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 한참을 울기도 했고 곧 괜찮은 척 밝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엄마가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보증금을 조금 넣은 작은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의 원형탈모는 시작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니 숨 막히던 그 원룸 식 공간에서의 몸부림이 나를 병들게 만든 건 아닐까 생각했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계속되었지만 내 머리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또 다른 지역의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나는 그곳에서 절망했고 내 안의 터지지 못했던 분노는 폭발했다. 발병시기와 호전 정도를 볼 때 회복은 어렵고 몸의 모든 털이 점점 다 빠질 수도 있다는 것과 평생 가발을 벗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멍하니 병원을 빠져나와 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는 표를 끊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한가운데 멈춰 선 나를 두고 시간의 흐름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냥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마르지 않는 눈물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리라 꿈꿨던 내 인생은 이제

끝났으니까.




직장을 그만뒀다. 말 수는 점점 줄었고 방 안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좋아하던 나는 동호회 사람들과는 꾸준히 소통했다. 그 안에서만큼은 울지 않았다. 행복했으니까.
좋은 사람들과 매일 출사지로 떠나 사진을 찍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그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오가는 길의 그 바람이 내게는 유일한 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나는 다시 취업을 했다. 그리고 양방에서의 치료를 접고 한방으로 치료를 해보기 위해 다시 서울에 있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원장님은 치료 사례를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주셨고 머리에 침 치료를 시작하고 한약을 지어왔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프고 두려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그저 좋은 동생이라 생각했던 그가 고백했을 때 나는 두려웠고 어느새 도망치고 있었다. 내 현재가 그에게 짐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 같은 내 모습을 안다면 그도 떠날 것만 같았다. 그럼 또다시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 마음을 비워냈다.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구애에 내 마음 역시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다음 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했다.




그는 더운 날씨에도 수건을 둘러쓰고 자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머리를 보여주지 않겠다며 필사적으로 수건을 더욱 꽉 쥐었다.  8월, 무더운 여름날 밤이었다. 마지막 자존심이라 여기던 나만의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 나는 온통 발가벗겨진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뒤돌아 누웠다. 선풍기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숨 쉬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머리를 만져주었다. “자기, 그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이제는 편히 지내라고 다독이며 나를 다시 돌아눕게 해 안아주었다. 그 품에 안겨 그동안 참아왔던 아픔과 숨겨왔던 두려움에 떨던 나는 그냥 그렇게 펑펑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지난날 내게 너무 잔인했던 고통의 기억들을 비로소 내려놓게 되었다.




나는 결혼하면서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아이를 위해 모든 치료를 중단했다. 우리에게 첫 아이가 찾아왔다. 기뻤다! 그동안 치료를 위해 먹었던 스테로이드 성분들이 체내에 쌓여있을 것만 같아 아이에게 영향을 주진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다행히 아이는 이상 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임신 중에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호르몬 때문일까 일시적인 현상일까 궁금하면서도 병원에 가보지는 않았다. 아이와 우리는 건강하게 만날 수 있었고 내 머리에는 점점 굵고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했다. 치료를 하며 종종 나던 머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양이었다. 2년 뒤, 우리는 둘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두 아이의 임신과 출산을 거쳐 내 머리의 양은 더욱 많아졌고 굵은 머리카락으로 나고 빠지기를 그렇게 몇 차례나 반복했다.





꼭 10년 만이었다. 내 나이 서른아홉. 나는 3년 전에 가발을 완전히 벗었다.  용기를 내어 미용실에 가던 날 남편은 미용실 앞까지 데려다주며 봉투를 내밀었다.

“예쁘게 하고 와. 축하해” 그의 웃음과 함께 들어선 그날의 미용실의 공기를 잊을 수 없다. 그때의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지금의 나를 감히 꿈꿀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나는 아득하게 먼 안개 낀 터널을 돌고 돌아

가을 하늘이 보이는 터널 끝에서 또 다른 내 삶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나 고단했던 지난 내 시간들이 지금의 내가 살아가게 된 원동력일 터. 그리고 그 아픈 시간들을 겪을 때마다 함께 있어준 이들이 나를 지금까지 살게 했을 것이다.




난 강한 여자이기에 수채화처럼 산 걸까.

수채화처럼 살고 싶어 강해진 걸까.

어쩌면 강한 여자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색색의 번짐이 더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쏟아지는 비에 아팠지만 그러기에 더욱 귀한 삶.

그 삶을 지키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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