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1)

(권력) 맛이 좋구나!

by Loxias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방송된 MBC 드라마 '대장금'은 대히트를 쳤다.

궁궐에 들어간 장금이(이영애 배우)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의녀가 되는 과정을 그렸는데, 장금이는 원래 수라간의 궁녀였다. 드라마 초중반부까지 장금이는 수라간 나인이었는데, 당시 국왕(임호 배우)은 장금이가 요리한 음식을 먹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는데, 이 역시 유행어가 됐다.

"맛이 좋구나."


이보다 앞서 또 히트했던 SBS 드라마가 있다. '여인천하'다.

이 드라마에서는 국왕(최종환 배우)를 둘러싼 여인들, 왕비(전인화 배우)와 후궁(도지원 배우 등)들을 전면에 내세워 치열한 권력 암투를 그렸다.


이 두 드라마에서 그린 국왕은 동일 인물이다.

바로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 1488~1544)이다.


중종 이역(李懌)은 조선 9대 왕 성종의 적차자(嫡次子)이자 10대 왕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이 쫓겨나자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조선에서 쿠데타로 쫓겨난 왕은 단종, 연산군, 광해군, 이렇게 세 명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태조 이성계도 이방원의 쿠데타로 쫓겨난 것이지만,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를 따른다.


이 세 사례 중, 세조와 인조는 본인이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왕위를 쟁취했다.

반면 중종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신하들이 데려다 왕위에 앉혔다.

중종반정에 있어 그는 한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즉위 초기, 그의 권력은 매우 약했다.


* 중종은 가장 정통성을 가진 대안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연산군이 쫓겨난 후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성종은 적자(嫡子)가 연산군과 중종, 둘 밖에 없었으므로, 연산군 다음으로 정통성을 갖춘 중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중종은 가장 정통성을 가진 대안이 아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날의 기록이다.

『(박원종 등이) 백관·군교를 거느리고 경복궁에 달려가서, 일치된 의견으로 대비에게 의계하기를,

"지금 위에서 임금의 도리를 잃어 정령(政令)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는 위태롭기가 철류(綴旒)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성 대군은 대소 신민의 촉망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하니,

대비가 굳이 사양하기를, "변변치 못한 어린 자식이 어찌 능히 중책을 감당하겠소? 세자는 나이가 장성하고 또 어지니, 계사(繼嗣, 조상의 제사를 계승함. 즉, 왕위를 이음)할 만하오." 하였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2일)


당시 대비라면 연산군의 계모이자 중종의 친모인 자순대비다.

박원종 등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서류상 아들인 연산군을 내쫓고, 자기가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자고 하는데, 그녀는 처음에 사양했다.

이를 두고 '나무위키'에서는 체면상, 혹은 예의상 한 번 튕긴 것이라고 서술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순대비의 말을 뜯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중종은 1488년생이니 당시 19세, 연산군의 장자인 세자 이황은 1497년생으로 당시 10살이었다.

그런데 19세인 자기 아들은 어리다고 하고, 10살 어린애인 세자는 장성하다고 하니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순대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그녀의 말엔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나는 이때 자순대비의 말이 당시 중종보다 세자에게 더 정통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게 뭔 소리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녀의 말의 참뜻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조선은 건국할 때부터 명(明)에 사대하던 나라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후, 이성계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명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조선의 모든 왕과 세자는 명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 지위와 정통성을 황제로부터 인정받았다.

따라서 황제의 책봉을 받은 자를 내쫓는 것은 결국 황제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며, 황제는 이것을 처벌할 수 있다.

거란의 고려 2차 침입 당시, 요나라 성종이 그의 책봉을 받은 국왕 목종을 강조가 시해했던 것을 명분 삼아 쳐들어왔던 것을 떠올려 보라.


당시 세자는 명의 책봉을 받은 상태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다.

『태감 김보·이진이 세자 책봉하는 칙서를 받들고 서울에 오니, 왕(연산군)이 모화관에 나가 맞이하여 경복궁에 이르러 칙서를 받았는데, 세자가 왕을 따라 행례(行禮)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두 사신이 칙서를 반포하고 태평관으로 갔는데, 왕이 태평관에 가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 칙서에, "짐이 생각건대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은 예부터의 도리이니, 관작과 영토를 가진 자가 미리 후사를 정하여 국민들의 정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이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근자에 왕의 주청을 보니, 온 나라 신민들의 요청에 의하여 적장자 이황(李)으로 왕세자를 삼는 일이므로 예관에게 내려 의논해서 아뢰게 하여 특별히 윤허해 준다."』 (《연산군일기》 1503년 4월 17일)


이 알고 다시 기록을 보면 자순대비의 말은 예의상 한 번 튕겼다기보다는 이런 뉘앙스로 읽힌다.

"세자는 명의 책봉을 받은 적법한 후계자인데, 당신들 뒷감당 되겠어? 난 분명 경고했다?"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면, "느그들, 단디 해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자순대비의 말은 사실 반정의 주축 세력인 박원종 등의 뜻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미 국왕을 내쫓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리고 세자를 다음 왕으로 삼았다가 장성한 후에 쫓겨난 제 아버지의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데,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굳이 안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국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세운다는 내용의 대비의 교지가 반포되었다.

마치 고려 말 우왕, 창왕, 공민왕을 폐할 때 공민왕의 비인 정비(定妃)의 교서를 받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중종 역시 왕위에 오른 후, 명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1506년 9월 2일 왕위에 올랐는데, 같은 달 27일 명을 향해 사신이 출발했다.

이때 사신이 가지고 간 주문(奏文)을 보면, 어이가 없어 씁쓸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세자 이황이 죽었고, 그로 인해 연산군이 고질병이 도져 국사를 돌볼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 국왕 신 이(연산군)는 왕위 사퇴를 청하는 일로 삼가 아룁니다. 생각하건대 신은 본래 풍현증(風眩症)이 있어 무시로 발작하였는데, 세자 이황이 정덕 원년 5월 질병에 걸려 갑자기 요절하는 바람에 신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조리를 잘못하여 묵은 질환이 다시 발작해서 고질로 변하였기 때문에 군국 서무를 능히 재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의 친아우 진성군 이는 나이 장성하고 어질어 일찍부터 착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무거운 짐을 부탁하는 것이 진실로 여망에 맞으므로, 이미 정덕 원년 9월 초2일에 신의 어머니 강정 왕비에게 품고 하여 이로 하여금 임시로 건국의 모든 일을 맡아 승습하게 했습니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27일)


여기에서 문제를 하나 내겠다. 세자 이황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혹시?

그렇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주문을 보냈을 때, 실제로 세자 이황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영의정 유순·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 부원군 유순정·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폐세자 이황·창녕 대군 이성·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 등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일찍 처단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하였다.

명하여 황·성·인·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24일)


기록에 등장하는 황·성·인·돈수는 모두 연산군의 아들들이다.

정치라는 것이 이렇게나 무섭다.

중종의 정통성은 이들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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