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5)

by Loxias

* 작서(灼鼠)의 변(變) (1)


1527년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작서(灼鼠)의 변(變)'은 말 그대로 쥐를 불로 지져 죽인 사건이다.

그 해 2월 25일 세자궁 북서쪽 동산에 불에 지져진 쥐가 내걸린 일이 발생했는데, 그날은 인종의 생일이었으며, 마침 쥐가 매달린 방향이 인종이 태어난 을해(乙亥) 방위여서 세자 저주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이 저주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이가 바로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였다.

그 결과 경빈과 그녀의 아들 복성군이 폐서인 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작서의 변이 진행된 기간은 채 한 달여에 불과하지만, 그 여파는 대단히 오래 지속되었다.

이 한 달간 급박했던 상황을 정리하여 사실 관계를 따져본 후, 사건에 대한 의문사항과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측을 말해보고자 한다.


1527년 3월 22일, 좌의정 이유청과 우의정 심정이 중종에게 누군가 인종의 생일날 죽은 쥐를 불로 지져 세자궁 근처에 매달았으며, 비슷한 일이 3월 1일에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작서의 변이 막을 올렸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인종의 외조부이자 죽은 장경왕후의 아비인 윤여필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심정이 아뢰기를, "전일 세자의 생신일에 죽은 쥐를 가져다 사지를 찢어 불에다 지진 다음, 이를 세자의 침실 창문 밖에다 매달아 놨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달 초하룻날 또 그랬다고 합니다."

【세자의 외구(外舅)인 윤여필이 심정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심정이 또 이유청에게 말했다. 이유청도 당초엔 아뢸 뜻이 없었지만 관계되는 바가 중대했기 때문에 부득이 정원과 함께 아뢴 것이다.】 』 (《중종실록》 1527년 3월 22일)


중종은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외간에는 전파되었는데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자의 측근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2일)

내명부의 수장, 자순대비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어 중종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빈청에 자전의 뜻을 내리기를, "대신이 아뢴 일은 나도 일찍이 들었었다. 그래서 상께 아뢰어 추문하려 했었지만, 증거가 없는 일로 궁내에서 큰 옥사의 단서를 일으킬 수는 없으므로 사실을 따지지 않았고 아뢰지도 않았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2일)


중종은 세자궁 사람들을 추문하여 작성된 공사를 조정에 내리는 한편, 이 사건의 범인을 잡기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전교하기를, "세자궁은 시야 밖의 외동산에 있고 세자궁 위에는 상전(上殿)이 있다. 따라서 외동산은 많은 궁인들이 출입하고 있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일은 아직껏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역시 누구의 짓이라고 의심할 수가 없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2일)


다음 날,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세자 빈객 등 사실상 전 조정이 이 사건을 세자를 해롭게 하는 행위로 단정하고 얼른 추문하여 범인을 잡고 죄를 물으라고 요청했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세자는 나라의 근본입니다. 예부터 간사한 사람이 간괴한 술책을 부려왔고, 변의 단서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어 왔습니다. 더구나 모후까지 없으니 동궁을 보호하는 일은 오로지 전하에게 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경악스러운 일이 발생했으니 위에서 의당 진노하여 추문했어야 합니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3일)


이 시점에서 이미 중종은 이 사건이 실제 동궁을 노린 것이 아니라, 모함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교하기를, "만약 요괴로운 술법을 부리려 했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곳에다 했을 것이다. 어찌 여러 사람이 다 보는 곳에다 했을 리가 있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3월 23일)

그렇지만 대신들이 강력하게 관련자들을 추문할 것을 주장하자 결국 중종은 추문을 하루 미뤘다.


다음 날, 추국을 열어야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 사건이 궁궐 내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대신들이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들은 중종에게 누굴 추국할지, 명단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영중추부사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 일은 외인이 지추(指推)해서 실정을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 날 하문하셨으니 어찌 의심스러운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사람을 가려 추문하도록 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3월 24일)


이에 대해 중종은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다.

『전교하기를, "이 일은 위에서도 처음엔 몰랐었다가 대신이 아뢴 데 따라 비로소 안 것으로 지극히 경악스러운 일이다.

자전께서는 이미 듣고 추문하려 했었으나 근거없는 일로 궁중에서 옥사를 일으키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았으므로 말하지 않았었다는 뜻을 이미 대신들에게 말한 바 있다.

이 일은 대신이 짐작하여 조처하기에 달렸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4일)


대신들이 끈질기게 추국 명단을 요청하자 결국 일전에 취초받았던 사람들을 추문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조사받은 사람들은 안빈의 계집종 내은덕, 세자궁 시녀 은금, 중월, 무수리 현비 등이었다.

조사받은 이들 중 가장 먼저 쥐를 발견했던 사람은 내은덕이었다.

『안빈의 계집종 내은덕의 공사는, "2월 25일 오후에 소변을 보기 위해 세자궁 서북쪽 담장 밖에 있는 동산의 나무 밑으로 갔었습니다. 소변을 보면서 올려다봤더니 죽은 쥐를 매달아 놓은 것이 보였으므로 내심 매우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오후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시녀가 역시 소변보러 그곳에 갔다가 그 쥐를 보고는 여러 사람에게 전파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4일)


이들의 조사기록을 종합해 보면, 2월 25일에는 불에 지져진 쥐가 세자궁 북서쪽 담장 밖 동산에 걸려 있었던 반면, 3월 1일에 쥐가 발견된 장소는 세자궁 근처가 아닌 대전(大殿) 근처였다.

그러나 범행 현장을 목격했거나, 범인이 누군지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중종은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고발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런 뒤에 죄를 묻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교하기를, "궐정(闕庭)에서 이렇게 추문하면 의심스런 사람이 있다 해도 누가 감히 고발하려 하겠는가?

위에서 늘 잊지 않고 살핀다면 시일을 정할 수는 없지만 혹 서로 싸우든가 혹 진고(進告)하는 데 따라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뒤에 통렬히 치죄하도록 하겠다.

난들 추문하여 죄주고 싶은 마음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3월 24일)


지금까지 중종의 발언을 보면, 왠지 중종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꺼려 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3월 24일의 발언, 즉, 고발자를 기다리겠다고 하고는 그냥 시간 때우기, 버티기에 들어간 모양새인 것이다.


삼 일이 지나, 참다못한 시강원이 즉시 범인을 색출할 것을 요청했다.

『시강원 보덕 황사우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당초부터 못들으셨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외정에서 말을 들으셨으니 의당 황황히 침식을 잊은 채 기필코 죄인을 색출해 내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형적(形迹)이 없는 일이므로 혹 잘못되어 죄없는 사람이 다치는 폐단이 있을까 우려한 나머지 어렵게 여겨 늦추려는 뜻이 많았습니다.

처음 들은 날 대내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부녀 두서너 사람에게만 물었을 뿐이고, 조정에서 굳게 추신(推訊)하자고 청했지만 장(杖) 한 대도 때리지 않은 채 어긋난 단서를 말로만 끝까지 힐문하시니, 어떻게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나인들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서 그 흔적을 염탐한 뒤에 추문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내일 그럭저럭 지낸 지가 이미 6∼7일이 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래 일의 단서를 찾아내셨습니까?"』 (《중종실록》 1527년 3월 27일)


이번에도 중종은 다시 단서가 없으니 아무나 추문할 수 없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사건은 인종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궁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교하기를, "세자는 총명하고 착해서 내외의 사람들이 다함께 탄복하고 있으니, 누가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동궁에만 이런 요괴로운 술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또 있었으니, 이는 필시 궁인(宮人)을 무함하여 해치려고 한 짓일 것이다.

하지만 단서를 알 수가 없으니 역시 아무라고 지적해서 추문하게 할 수는 없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27일)


중종이 버티기에 들어가자 4월 1일과 2일,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이 나서 다시 한번 범인을 잡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다시 한번 중종의 행태를 꼬집었다.

『당초에 대신이 면대해서 아뢰었을 때 전하께서 반드시 벽력 같은 결단을 통쾌히 내리시어 왕법의 올바름을 명시하실 줄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근거 없다고 핑계하시면서 추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부득이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대신에게 명하여, 외정에서 추국하라고 하면서 ‘나는 모르겠으니 그대들이 추핵하라.’ 했습니다.

대저 궁금(宮禁)의 일을 전하께서도 오히려 모르겠다고 하시면 외신(外臣)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서 추신할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7년 4월 2일)


이번에도 역시 중종의 대답은 도돌이표였다.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나도 경악한 바이다. 어찌 처음에 추문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당초 동궁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저질러진 일은 보았지만 범인은 못보았다.’ 했다.

따라서 그 공초만 받아 대신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을 찾아 추문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궐정에서 추문했지만 역시 전의 공초와 같았다. 대저 이 일은 위에서 누구의 소위인지 모르겠으니 반드시 현고인(現告人)이 있어야 추문할 수 있겠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일)


그러자, 대신들의 공격포인트가 바뀌었다. 동궁이 아닌, 대전에 있었던 일을 조사하라고 했던 것이다.

『대신이 첨의로 아뢰기를, "요사스런 괴변이 동궁과 대전에 두 번씩이나 있었으니 이런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동궁은 그만두더라도 대전에서 있었던 일은 더욱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초하룻날 그 일을 먼저 목격한 사람을 추문하여 그 단서를 힐문하게 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이것은 거절할 수 없었던 지, 중종은 경빈, 안씨, 김씨, 그리고 시녀 등의 공초를 받아다 조정에 내렸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3월 1일 벌어진 일을 재구성해 보겠다.

그날, 대전에서 발견된 쥐는 중종이 가장 먼저 봤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교하기를, "그 날 오후에 내가 남고란으로 들어갈 때는 아무 물건도 못보았었다. 그런데 앉아서 세수를 끝내고 나서 남고란 아래를 내려다보니 쥐가 엎드려 있었으므로 내가 집어다 버리라고 명했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 쥐가 바로 이 쥐였다고 한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중종이 쥐를 발견했을 때, 함께 있던 사람은 경빈이었다.

『경빈의 공초에는, "조금 있다가 상께서 그 침실로 나오셨고 마주 대하여 앉아 있다가 세수하러 나가셨습니다.

소첩은 제 아비의 병이 위중하기 때문에 의원에 관해서 아뢰려 할 때 상께서 ‘저기에 쥐가 있다.’ 하셨습니다... 소첩이 즉시 그 곳으로 가보니 남고란의 유지의(襦地衣) 위에 쥐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상께서 아랫것들을 불러 ‘집어다 버리라.’ 하셨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경빈은 다른 사람들을 불렀고, 안씨, 김씨, 시녀 돈일 등이 와서 쥐를 보았다.

그리고 쥐를 내다 버렸는데, 처음에는 김씨가 서쪽 뜰에 버렸다가 이를 주워다 다시 쥐구멍이 있는 곳에 버렸다.

『안씨의 공초에는,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는데 그때 상께서 ‘이곳에 쥐가 있다.’ 하셨고, 경빈도 ‘모두들 와서 이 쥐를 보라.’ 했으므로, 저와 김씨와 시녀 돈일 등이 함께 가서 보았습니다.

그 쥐는 전(殿) 앞 남고란 지의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김씨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가지고 서쪽 뜰에다 버렸습니다.

상께서는 공사청으로 나가셨고, 그 쥐는 그때까지도 생기(生氣)가 있었지만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돈일 등이 소리개가 채갈까봐 종이로 쥐를 싸서 수모 종가이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종가이는 쥐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시녀 금비 등을 만난 후, 쥐를 도로 가져왔다.

『수모 종가이의 공초에는, "그때 침실의 시녀 돈일이 종이에 싼 물건을 주면서 ‘이것이 쥐니 갖다버리라.’ 했습니다.

제가 즉시 살펴보니 아직 죽지 않은 쥐였습니다. 그래서 남수구에 버리고 곧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칠금·오비 등이 소주방 앞에 앉았다가 저를 향해서 ‘버린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하기에, 제가 ‘이것은 사향쥐다.’ 했더니, 오비가 나에게 도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가져다가 금비에게 준 뒤에 드디어 세숫간으로 돌아갔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칠금·오비 등이 쥐를 살펴보고 있을 때, 시녀 향이가 이것을 보고는 안씨를 불러왔다.

안씨는 쥐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중궁전에 알렸고, 문정왕후가 이를 다시 대비전에 알리게 했다.

『시녀 향이의 공초에는, "중궁전에 세숫물을 올릴 때 동침실 근처에서 쥐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소주방에 전할 일이 있어 북고란으로 나가니,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오비·칠금이 앉아서 어떤 물건을 돌려가며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무슨 물건이냐? 했더니, 금비가 ‘쥐다.’ 하고, 이어 ‘작은 쥐의 다리는 본디 이런가?’ 하기에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 있는 쥐였는데 발이 없고 꼬리도 끊겼으며 주둥이는 지져졌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못보던 물건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아야겠다.’ 하고, 고란에 두고서 대내로 들어가 안씨와 함께 동시에 나와보았습니다.

안씨가 ‘이는 황당한 짓이다. 중궁전에 계달해야 한다.’ 하고, 즉시 안씨와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중궁께서 하람(下覽)하신 뒤 이어 전교하기를 ‘이는 황당한 짓이니 대비전에 계달해야 한다.’ 하셨으므로, 즉시 저와 안씨와 함께 대비전에 계달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일)


대신들은 쥐가 살아있었다면 범인은 분명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며, 곁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을 추문하라고 요청했다.

『"목숨이 있는 생물은 끊거나 지지면 즉시 죽는 법인데 곡란에 있는 것을 직접 보았을 때도 오히려 생기가 있었다면, 그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곁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을 추문하면 되는데 어찌 증거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7년 4월 6일)


결국, 중종은 7명의 추문 대상 명단을 내렸다.

『상이 제명기를 내리면서 전교하기를, "여기에 이름이 씌어진 사람들을 추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명기에 기록된 사람은 경빈의 계집종 범덕, 안씨의 방자 잉읍화이, 김씨의 방자 가지가이, 시녀 향이의 방자 가응지, 돈일의 방자 생심, 효덕의 방자 석비, 천이금의 방자 이비 등 7인이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7일)


이들을 추문했는데, 7명 모두 자신은 이 일을 본 적이 없고, 누가 했는지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중종이 질문을 바꿔보라고 지시했다. 의심 가는 사람을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전교하기를, "방자들이 이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각 방의 방자들은 배시(陪侍)하는 사람이므로 모두 침실을 출입하고 있으니, 요사한 일을 하기 위해 쥐를 잡아서 지질 적에 하인으로서 모를 리가 없을 것이기에 추문하라 했었다.

이제 공초를 보니 모두 예사로 받은 공사였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바른 말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지금 다시 추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쥐를 가지고 왕래할 때 네가 보았지?’ 하거나 ‘이 일은 너의 주인이 한 짓이지? 너의 주인이 한 일을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너의 주인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궁중에 반드시 의심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네 생각에 의심가는 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네가 빈 그릇을 가지고 드나들 적에 같이 드나든 사람은 누구냐? 또 어느 곳에 서 있었느냐?’ 하고 다방면으로 힐문하면 착오점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7일)


이때 경빈의 시녀 범덕이 걸려들었다. 그녀만이 경빈에 대해 말했을 뿐, 나머지는 의심 가는 자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도승지 유보가 즉시 다시 추문한 초사로 입계하였다. "나인들을 전교의 뜻에 의거 힐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범덕의 공사에는 ‘지난 달 초하루 오후 홍귀인은 대비전으로 갔었고 우리 주인 경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쥐를 불에다 지진 일을 사람들이 혹 우리 주인의 소위인 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고 억측했을 뿐입니다. 기타 의심스러운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했고,

잉읍화이의 공사에는 ‘나는 당초에 그 쥐를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했습니다.

가지가이·가응지·생심·석비·이비의 공사도 대략은 위와 같았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7일)


대신들이 범덕을 의심하여 다시 추문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4월 8일부터는 범덕에게 추문이 집중되었다.

이때는 그저 묻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형장(刑杖)을 가하는 조사였다. 즉, 고문다는 얘기다.

내 생각에, 이때 범덕에 대한 조사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었다.

범덕에게 계속 고문을 가하는 목적이 경빈이 했다거나, 아니면 그녀의 지시를 받아서 했다는 진술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부승지 유관이 아뢰기를, "범덕을 다시 힐문했으나 전처럼 자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 형신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그런데, 갑자기 사태가 급변했다. 쥐를 잡아 궁내로 들어간 사람을 고하겠다는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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