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6)

by Loxias

* 작서(灼鼠)의 변(變) (2)


쥐를 잡은 일에 대해 고하겠단 이들은 사옹원(司饔院)의 각색장(各色掌)들이었다.

사옹원은 궁중음식을 담당한 관청이고, 각색장은 여기에 소속된 요리 담당자들이다.

『각색장노 명수 등이 바로 승전색(承傳色)에게 가서 진고하니, 승전색이 초사(招辭)를 받아 대내로 들였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정원이 모두 와서 아뢰기를, "낭관이, 하인이 서로 말하는 것을 보고 물으니 사옹원 각색장 등 4∼5인이 원문 밖에 모여서 ‘전일 쥐를 잡아가지고 궁내로 들어간 사람을 진고하려 한다.’ 했다고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중종은 이들의 조서를 정원에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자 은이가 지난 2월 10일 경에 도둑 누명을 쓴 일 때문에 액땜하기 위해 산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여올 일로 내관 김귀인에게 말했었지만, 끝내 잡아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은이가 대궐을 나간 것은 2월 14일이니 근래의 일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방자 은이로부터 쥐를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내시 김귀인의 공사부터 살펴보자.

『"지난 2월 10일 경에 안상궁(安尙宮)의 방자 은이가 나와서 나에게 ‘내가 도둑 누명을 쓴 일이 있으니 산 쥐를 잡아달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은기성상노 귀석과 쥐를 잡을 일에 대해 서로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귀석이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은이가 같은 달 14일 대궐에서 나갈 때 직접 만나 알았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귀석의 공사에도 김귀인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적은 있으나 거절했다고 되어 있다.

『"지난 3월, 날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차비내관 김귀인이 ‘어떤 나인이 내게 「산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여오면 술을 주거나 부채나 입모를 상으로 주겠다.」 하더라.’ 했습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은기를 깨끗이 닦는 일이 긴급한데 어느 겨를에 잡을 수 있겠는가? 네가 잡아 가지고 들여보내라.’고 대답했습니다. 답변할 때 서원 이춘일이 옆에서 내 말을 들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귀석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들었다던 이춘일의 공사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지난 3월 중궁전에 수라상을 들여가기 위해 동전(同殿) 수라간에 앉아 있을 때 은기성상노 귀석이 ‘나에게 쥐를 잡아 궐내로 들여가라고 하지만 어느 겨를에 잡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김귀인, 귀석, 그리고 이춘일 이들 셋은 모두 쥐를 잡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들의 진술에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김귀인은 분명 2월 10일에서 14일 사이에 부탁했다고 했는데, 귀석과 이춘일은 그때를 3월이라고 했다.


한편, 각색장노 명수는 쥐를 잡은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각색장 종석의 말을 들었는데 이러했습니다. "양손이 구질달에게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여간 것은 바로 네가 한 일인데, 너는 이 사건의 진전을 알고 있는가?’ 하니, 구질달이 ‘모른다.’고 대답하고 나서 이어 양손과 면대해서 말을 내지 말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양손 역시 구질달이 쥐를 잡아서 궐내에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어제 각색장노 금부가 ‘구질달이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째서 진고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그 때야 내가 듣고 알았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쥐를 잡은 범인으로 지목된 구질달은 이를 부인했다.

『"어제 설리의 지시에 따라 동전 각색장들에게 승전을 받들도록 알려주어 들여보냈을 뿐,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어간 일은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이때, 쥐를 잡아올 것을 의뢰한 은이는 2월 14일부로 출궁 조치되어 궁에 없었다.

『전교하기를, "장무 내관에게 물어보았더니 ‘안상궁의 계집종 은이에 대해서는 2월 14일 미시에 대내에서 내준 출궐패를 보고 나서 내보냈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일에 관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은이가 궐내에 있을 적에 궁중 사람들이 ‘은이가 물건을 훔쳤다.’ 하니, 은이가 분노해서 ‘나를 도둑으로 여기는구나.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액땜을 해야겠다.’ 하고 내관을 시켜 쥐를 잡아 궐내로 들여오게 했더니 내관이 잡아가지고 들여오지 않았다는 것을, 은이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말을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거개 알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일에 관계가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정원에서는 이들의 공사가 서로 어긋난 단서가 있으므로 추가로 추문할 것을 요청했고, 중종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중종이 우부승지 유관으로 하여금 위관(委官)들에게 형추 여부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이 사건은 2월 25일과 3월 1일의 일과 관련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유관이 금부에서 와서 각색장 명수 등의 공사와 위관들의 의견을 아뢰기를, "지금 은이와 김귀인의 일을 추문하니 그 사간(事干)의 초사는 약간의 착오가 있었지만 대사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1일)


위관들은 다른 사람들은 놓아주되 은이와 김귀인은 형추할 것을 요청했다.

『"은이가 궁중에서 이런 사술을 쓰려 했었고 김귀인이 그의 말을 듣고 쥐를 잡아가지고 들여보내려 했으니, 이는 실로 너무 지나친 일입니다.

그리고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여오라는 말에 대해서는, 은이는 ‘2월 10일 김귀인에게 말했다.’ 하고 귀인은 ‘2월 13일에 들었다.’ 하니, 이 점이 어긋난 단서입니다. 또 김귀인이 산 쥐를 잡아가지고 들여오고도 도리어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은이와 김귀인을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게 해주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11일)


위관들의 요청에 중종은 술법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형추한다 해도 다시 신문할 단서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현재 조사된 내용만을 가지고 형벌을 정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은이와 김귀인의 형벌이 결정되었다.

『은이는 정범(正犯)이므로 장 80, 도 3년에 처했다. 그러나 여자이기 때문에 장 1백을 때리고 나머지 죄는 속(贖)바치게 했다.

김귀인은 종범(從犯)이므로 장 70, 도 1년반에 처하였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1일)


다음 날, 홍문관이 관계자들을 조사하라며 들고일어났다.

『"나인이 쥐를 찾은 것이 도둑의 누명을 받고 액땜하려고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내관이 굳게 숨기는 것도 잡아 들여오고 나서 도리어 숨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엄하게 고문을 가하면 옥사(獄事)가 귀착될 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추문을 늦추고 의율하여 죄인이 노출될까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인심이 흉흉하고 울분이 더욱 심합니다. 추국하는 관원도 정상이 이미 드러난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구차스럽게 상의 뜻을 받들어 다시 힐문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그 의향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비호하지 마시고 기필코 죄인을 색출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풀게 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12일)


홍문관의 차자의 내용은 사람들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당연히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은이가 쥐를 찾은 것이 액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저주에 쓰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 김귀인이 실제로는 쥐를 잡아 오고도 발뺌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 뒤의 내용은 중종과 추문에 참여한 대신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으로, 그들은 중종이 '죄인이 노출될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신들 역시 '구차스럽게 상의 뜻을 받들어' 사건을 덮으려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홍문관의 요청에 중종은 이 일은 작서의 변과 관련이 없고, 결정은 유사가 한 것이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시했다.

『전교하기를, "유사가 이 일은 큰 일과 관계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조율하게 한 것이다. 어찌 유사가 상의 뜻을 승순(承順)해서 그랬겠는가?

지금 다시 추문하여 자복을 받아내더라도 그 죄가 이에 불과할 것이다. 진실로 내가 스스로 결단을 내려 추문하지 말고 놓아주게 한 것도 아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2일)


중종이 추가 조사를 거부하자 다음 날에는 사헌부와 사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다르다.

추문에 참여한 고위직들은 홍문관으로부터 논박을 당했으니 관두겠다고 한 것이나, 하위직들은 장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사표를 던진 것이었다.

중종은 대사헌과 대사간을 교체했지만, 대간은 중종에게 김귀인 등을 끝까지 추문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운명의 날, 1527년 4월 14일이 되었다.

중종은 대간의 주장을 어떻게 처리할 지 상의하기 위해 심정 등을 불렀다.

『위관 심정과 금부 당상 등이 명을 듣고 왔다. 전교하기를,

"지금 대간이 와서 ‘김귀인의 일은 큰 일에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의당 끝까지 추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일이 큰 일에 관계가 없고 또 이미 죄를 정했으니 이제 다시 추문하는 것은 사체에 어긋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이에 대해 심정 등의 대답은 이러했다.

『심정 등이 아뢰기를, "본디 쥐를 지진 일 때문에 추국하던 즈음에 또 이 일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은이가 14일에 대궐을 나간 출궐단자는 이미 계하했으니, 이는 사실 무근한 일이 아님은 물론 큰 일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 등이 양사의 장관과 같이 추국했습니다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단서가 있었다면 어찌 끝까지 추문하여 실정을 캐내지 않은 채 경솔히 버려두려 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다시 추문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덧붙여 말하기를,

『"대저 궐내 사람은 방자 등의 유(類)라면 외정으로 끌어내어 추국할 수 있지만 시녀의 경우에는 외정으로 끌어내어 추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 그 간사한 짓에 대해 끝까지 추문하여 그 죄를 정하신다면 조정의 의논이 분요(紛搖)스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추관들의 말에 중종은 자순대비와 이 일을 상의했는데, 대비가 직접 의심스러운 사람을 알려주겠다며 나섰다.

『이유청에게 전교하였다. "내가 즉시 추관들의 뜻을 직접 자전에게 주달했더니 자전께서 ‘조정이 근래 매우 소요스러워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늘 편치 못하다. 이제 의심스러운 사람을 대신들에게 알려주려고 하고 있으니 명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자순대비는 언문으로 작성한 전교를 내렸는데, 약간 길지만 실록에 수록된 전문을 소개한다.

『"동궁에 매달려 있던 쥐에 대해서는 전일 세자궁 시녀들의 초사와 같다.

3월 1일 경복궁 침실에 버려져 있던 쥐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경빈이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었고 그의 계집종 범덕은 뜰 밑을 두번이나 왕래하였다.

계집종이 왕래한 일에 대해서 경빈이 스스로 변명하기 위해 ‘나의 계집종이 두 번이나 뜰 밑을 왕래했지만 어찌 그가 쥐를 여기에다 버렸겠는가?’ 했고, 계집종이 왕래한 일은 바로 경빈이 스스로 한 말이었다.

쥐를 보았을 때도 경빈 혼자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여기에다 버렸다면 경빈이 의당 보았어야 했다.

그 쥐가 꾸물거릴 때 상께서 나와서 보고 ‘이 쥐를 집어다 버리라.’ 하자, 시녀가 즉시 치마로 싸서 내다 버렸다.

그때 경빈이 갑자기 ‘그 쥐는 상서롭지 못하다.’ 했다. 달리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고 그 사상은 이와 같다.

그러나 이는 작은 일이 아니라서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렵게 여겨 감히 발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경빈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의심한다.’ 하면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28일 신시에 경빈의 딸 혜순 옹주의 계집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참형에 처하는 형상을 하면서 ‘수레가 몇 대나 왔는가?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 하고, 이어 온갖 욕설을 했는가 하면 저주하느라고 매우 떠들썩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추문했더니 자복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복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술법을 하는 사람을 궁중에 머물게 하는 것은 온편치 못하기 때문에 대궐 밖으로 쫓아내고 다 추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일 추문한 바 은이와 내관의 일은 전혀 이 일에 관계되지 않았고 궁중 사람들도 모두 그들의 애매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근일 결정한 공사가 매우 지당한 것으로, 지금 다시 추문하는 것은 매우 애매하다.

경빈의 계집종 3인을 즉시 추문할 일로 이미 상께 아뢰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자순대비의 전교를 요약해 보자면,

1. 2월 25일 동궁에서 발견된 쥐는 누구 소행인지 알 수 없다.

2. 3월 1일 대전에서 발견된 쥐는 경빈이 의심된다. 다른 사람들도 경빈을 의심하고 있다.

3. 3월 28일 경빈의 딸 혜순옹주의 종들이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을 죽이겠다.'며 저주하는 요사스런 행동을 했다.

4. 은이와 내시 김귀인은 이 일과 관련이 없다.


자순대비의 전교에 대한 대신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이유청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전교하신 뜻이 이와 같으니 이는 종묘 사직의 대계를 염려해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신 등은 감동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뒤이어 대신들은 경빈을 궁에서 내쫓을 것을 요청했다.

중종 역시 이에 동의, 경빈을 출궁조치했다.

『상이 사정전으로 나아가니, 좌의정 이유청·우의정 심정·좌찬성 이행·우찬성 이항이 입대하였다.

이유청이 아뢰기를, "지금 자전께서 분부하신 내용을 보니 사상(事狀)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는 조종과 종묘 사직의 신령이 은연중에 묵묵히 도운 덕분에 발각된 것입니다. 신은 그 사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루도 궁중에 머물게 할 수 없으니 속히 대궐 밖으로 내쳐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를 져서 궁중에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이미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였다. 죄상은 하인들의 자복을 받고 난 다음 결정하겠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다음 날부터 기존에 조사받고 있던 범덕에 더해, 대비가 지목한 경빈의 계집종 3인(사비, 춘월, 덕복), 혜순 옹주의 계집종 3인(모이강, 자귀, 귀인)에게 추문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매일 형신을 가했는데, 이들 중 단 한 명도 경빈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한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을 고문했는데, 아무도 자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혜순 옹주의 계집종 3인이 그들이 인형에 관한 일을 시행한 것이 맞다고 자복했다.

『모이강이 다시 공초하기를, "이 달 초하루에 대비전께서 추문하셨는데 그 추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추문에 대한 공초는 ‘비자 귀인이 나에게 너는 외간 사람이니 쥐로 액땜한 일을 발설한 사람은 너도 의당 타매(打罵)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불에 그스른 나무 작대기로 땅을 두 번 때린 뒤에 발싸개 목을 찢으면서 저주하기를 「쥐의 일에 대해 말한 사람은 그 몸을 이 모양으로 찢겠다.」 했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귀인·금이·자귀 등의 공초도 대략은 이와 같았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8일)


범덕 등에 대한 추문이 계속되었으나, 쥐를 지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복하지 않았다.

결국 대신들이 중종에게 의죄(擬罪)할 것을 요청했다.

저들이 자복하지 않아 법에 의거 처벌할 수 없으니, 알아서 죄를 정하라는 것이었다.

『추관 등이 아뢰기를, "그들의 형세를 보건대 죽을 결심을 하고 있으니 실정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신 등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궁내에서 이미 지적하여 대궐 밖으로 내치셨으니, 자전께서도 어찌 범연히 생각해서 지적해 말했겠으며 성상께서도 어찌 범연히 생각해서 내보냈겠습니까?

내전에서 내린 자지(慈旨)가 물론에 합당하니 자복을 받지는 못했더라도 위에서 재단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널리 의논해서 처치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대신들의 요청에 중종은 반대했다. 어찌 의심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교하기를, "박빈을 대궐에서 내보낸 일은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자전게서도 분명히 지적할 수 없었던 차에 마침 하인이 인형을 만들어 형벌을 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여 추문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지금 정범을 분명히 모른 채 단지 의심스런 일만을 가지고 죄를 정하면 되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그렇지만 중종은 결국 이를 논의하기 위해 고위 대신들을 불렀다.

그들은 중종에게 다음과 같은 안을 제시했다.

『영중추부사 정광필·좌의정 이유청·이조 판서 홍숙·좌참찬 안윤덕·호조 판서 김극핍·형조 판서 한형윤·예조 판서 허굉·한성부 판윤 김당·병조 판서 성운이 첨의로 아뢰기를, "상의 분부와 추관의 말을 듣건대 그 사세가 끝내 실정을 알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경솔히 버려둘 수가 없으니 의죄해야 합니다."

"지금 정상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물정이 모두 지적하는 곳이 있으니 죄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빈은 폐하여 서인을 만들고 복성군은 작호를 삭탈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중종은 경빈과 복성군을 내치라는 대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지당하다... 박빈과 복성군은 조정의 의논에 따라 의죄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그리고 경빈을 폐하는 전지(傳旨)를 내리니, 이 전지에 작서의 변이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역시 실록에 수록된 전문을 소개한다.


『"지난 2월 25일 동궁에서와 3월 1일 대비전 침실에서 있었던 쥐를 지져 저주한 일에 대해 상하가 통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의당 끝까지 추문해서 치죄해야 했지만 궁인이 많아 누구라고 분명히 지적할 수가 없었다.

단지 초하룻날 박빈이 침실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심했고, 그뒤 혜순 옹주의 시비(侍婢)가 또 송백당 동족 뜰에서 인형을 만들어 참형을 집행하는 형상을 했다.

자전이 그 자취를 염탐하여 알아냈으므로 쥐를 지진 요술을 부린 것도 이들의 소위인가 의심하여 유사로 하여금 하인을 추국하게 했었다. 그리하여 누차 형장을 가했으나 죽음을 한하고 승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이 국본에 관계되고 종묘 사직에 죄를 얻는 것이었으니 자복을 받아내어 의(義)에 입각하여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과 같이 의논한 결과 박빈을 길이 궐외(闕外)로 내치고 폐하여 서인을 삼을 것으로 의죄했다. 이 사실을 중외에 효유할 일로 의정부에 내리라."』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이로써 한 달여 만에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작서의 변이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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