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7)

by Loxias

* 작서(灼鼠)의 변(變) (3)


지금까지 '작서의 변'의 진행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경빈을 폐하는 중종의 전지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사건의 범인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경빈의 행동에 의심을 살만한 여지가 있고, 그녀의 딸 혜순 옹주의 계집종들이 사람들을 저주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의죄(擬罪)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범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경빈은 범인이 아니라고 본다.

당시 상황에서 인종을 노린 저주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녀가 '유주얼 서스펙트'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설령 저주를 했다 하더라도, 이걸 왜 동궁에다 매달아서 남들에게 알린단 말인가?

경빈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일 처리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남는다. 이것이 인종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원한과 관계된 일이었거나, 아니면 경빈을 모함하기 위한 일이었거나.

첫 번째 가정 역시 가능성이 낮다. 그 경우라면 저주를 한 후 증거를 숨기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종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전교하기를, "만약 요괴로운 술법을 부리려 했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곳에다 했을 것이다. 어찌 여러 사람이 다 보는 곳에다 했을 리가 있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3월 23일)

그러므로 작서의 변은 경빈을 제거하기 위한 모함이었을 확률이 높다.


작서의 변의 범인을 추측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다.

1527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즈음 경빈은 조정 내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녀는 예전의 경빈이 아니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경빈은 오직 중종의 총애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1507년과 1517년, 두 차례에 걸친 중전 간택의 과정에서 그녀를 지지했던 조정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녀가 이 문제를 해결했단 말인가?

해결책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작서의 변이 일단락된 후, 실록에 나타나는 경빈에 대한 평가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6일)

그녀가 중종의 총애를 이용, 베갯머리송사를 통해 사람들의 청탁을 들어주고 뇌물을 받아 힘을 길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간청이래봐야 뻔하지 않는가? 그녀는 아마 매관매직을 했을 것이다.

즉, 뇌물을 바친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꽂아줌으로써, 돈도 벌고 자기 사람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던 것이다.


이에 더해 경빈은 자녀들을 명문가와 혼인시켰다.

『경빈 박씨가 한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이미는 복성군에 봉하였고 현감 윤인범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혜순 옹주는 광천위 김인경에게 하가하고, 혜정 옹주는 당성위 홍여에게 하가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4일, 중종 대왕 지문)


복성군의 장인 윤인범은 벼슬이 현감에 불과하여 일견 한미한 가문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파평 윤씨 출신이다.

당시 파평 윤씨는 몇 대에 걸쳐 연속으로 왕비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 가문이었다.

파평 윤씨 출신 왕비들만 해도, 1) 세조비 정희왕후, 2) 성종비 정현왕후(자순대비), 3) 중종비 장경왕후, 4) 중종비 문정왕후가 있다.

이에 더해, 관련 기록을 찾지 못해 확정할 수는 없으나, 나는 윤인범이 중종이 아꼈던 윤인경과 매우 가까운 친척 관계가 아닐까 한다.

윤인경 역시 파평 윤씨로, 작서의 변 당시 승지였으며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521년 혜순 옹주와 결혼한 김인경은 김헌윤의 아들인데, 김헌윤의 아비, 즉 조부가 당시 예조 판서 김극개이다.

김극개도 고위직에 있었지만, 그의 친형 김극핍 역시 당시 호조 판서였다.

1525년 혜정 옹주와 결혼한 홍여 역시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조부 홍숙은 당시 이조 판서를 지내고 있었다.

김극개, 김극핍, 홍숙, 3인은 모두 승정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난 이런 측면에서 중종이 경빈의 자녀들의 혼처를 마련할 때 적극 개입하지 않았나 싶다.


경빈에 대한 또 다른 기록에서 당시 그녀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엿볼 수 있다.

『대간이 합사로 아뢰기를, "박씨는 참람스럽게 상의 측근에 있으면서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었고, 권세가 치열하여 문정(門庭)이 시장과 같았고, 서로 굳게 교결하여 중외에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대간이 관망만 하고 대신이 편견을 고집하는 것은 모두 박씨의 인척이 조정에 뿌리박고 있어 그 권세와 기염이 너무도 대단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7일)

물론 어느 정도 과장이 더해졌을 수도 있지만, 당시 경빈이 대신들 중 적지 않은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인종이나 문정왕후의 지지 세력은 정체되어 있었다.

인종은 열 살이던 1524년 3월, 박용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는데, 그는 딸이 세자빈이 된지 3개월 만에 죽었다.

『세자빈의 아버지 박용이 죽었다.』 (《중종실록》 1524년 6월 27일)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 공주는 1521년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혼인했다.

그런데 김안로는 탄핵을 받아 1524년 말부터 유배형에 처해진 상태였다.

『대간이 다시 상차(上箚)하여 김안로의 죄를 논하니, 도중에 밤잠을 자고 갈 만한 곳으로 옮기라고 명하여 드디어 풍덕군으로 귀양보냈다.』 (《중종실록》 1524년 11월 18일)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았는데, 작서의 변 당시는 의혜 공주와 효순 공주만 태어난 상태였다.

『왕비 윤씨를 높여 왕대비로 삼았다. 대비께서 한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다.

효순 공주는 능원위 구사안에게 하가하고, 의혜 공주는 청원위 한경록에게 하가하고, 경현 공주는 영천위 신의에게 하가하였고, 이환은 경원 대군에 봉하였고 별좌 심강의 딸을 맞아들였으며, 다음 딸은 어리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24일, 중종 대왕 지문)

물론 두 공주는 아직 나이가 어려 혼인하지 않았다.


무섭게 세력을 넓혀가는 경빈과 복성군을 보면서, 인종과 문정왕후가 느꼈을 불안감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내명부의 수장, 자순대비다.

중종이 경빈을 중전에 앉히지 못했던 것은 자순대비의 반대도 한몫했다. 아니, 어쩌면 중종에겐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수도 있다.

연산군의 횡포 속에서 중종을 지켜줬으며, 반정이 일어나던 날 대신들과 협상을 벌여 왕위에 앉게 해준 어머니였다.


만약 자순대비가 죽는다면, 인종과 문정왕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과거 성종이 폐비 윤씨를 내쳤듯이, 중종도 얼마든지 꼬투리를 잡아 문정왕후를 내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조정에는 경빈의 지지세력이 상당했고, 이를 막아줄 대비마저 없으니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만약 문정왕후가 쫓겨나고 경빈이 중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뒤이어 복성군 역시 인종을 밀어내고 세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훗날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유명해서 그렇지, 이때까지만 해도 인종과 문정왕후는 운명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1462년생인 자순대비는 당시 66세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다.

『전교하기를, "자전께서 편찮으시어 음식을 들지 않으시려는 지가 거의 여섯 달이나 된다... 그런데 내가 이어한 뒤부터 곁에서 모시며 체후(體候)를 살피건대, 날로 쇠약해지시어 혼수 상태인데 증세가 가볍지 않고 약도 효험이 없으므로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중종실록》 1522년 12월 14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자전께서 여름이면 매양 불편하셨었다. 근래에는 비위(脾胃)가 좋지 않아서 약간의 부증(浮症)이 있으시다."』 (《중종실록》 1526년 6월 9일)

자순대비는 작서의 변 삼 년 후인 1530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작서의 변으로 인해 경빈과 복성군이 모두 내쳐지면서, 더 이상 문정왕후와 인종의 지위가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범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유명한 말이 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다면, 그것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을 찾아라. 그가 범인이다."

작서의 변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군가? 바로 인종과 문정왕후다.


일반적으로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 공주의 남편인 김희가 그의 아비 김안로의 사주를 받아 작서의 변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지 유생 이종익이 상소에 언급했던 것에 불과하다.

『이종익이 옥중에서 올린 상소는 다음과 같다. "전일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전하와 조정이 누구의 소행임을 알지 못하여 끝까지 힐문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많은 궁중의 사람들이 원통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는 김희가 사심을 일으켜 요사를 부린 소치에 불과하며,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죄를 받은 것입니다."』 (《중종실록》 1532년 3월 20일)


난 김안로가 아들 김희에게 사주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당시 김안로는 풍덕군으로 귀양간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유배형에 처해지면 가족의 면회나 서신 교환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이 사건을 원격 조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김희가 실행했다는 것 역시 가능성이 매우 낮다.

궁궐 중에서도 특히 내전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김희가 어떻게 거길 몰래 들어가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불에 지진 쥐를 동궁 근처에 매달고, 대전에 갖다 놓은 사람은 내부인이 분명하다.


내가 봤을 때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려고 했다면 가장 먼저 족쳤어야 했을 인물이 바로 처음 조정에 이 사건을 알린 인종의 외조부, 윤여필이다.

당시 중종조차 모르고 있던 내전의 비밀스러운 일을, 윤여필은 어떻게 알고 심정에게 알렸단 말인가?

정보 습득 경로가 매우 의심스럽다.

2월 25일이 인종의 생일이었으니, 윤여필이 궁에 들어가 인종을 만났을 수는 있다.

하지만 2월 25일은 아직 쥐가 발견되었다는 말이 퍼지기도 전이며, 3월 1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아마 내부의 범인으로부터 이 사건을 전달받아 공론화시키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생각하는 이 사건의 범인을 눈치챘을 것이다.

작서의 변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봤으며, 궁궐 내에 있던 인물, 바로 문정왕후다.

문정왕후를 용의자로 가정하고 이 사건을 들여다 보면 여러 가지 정황이 이해된다.

우선 당시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간절함의 측면에서 봤을 때, 문정왕후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고 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김안로건, 윤여필이건 냉정히 보자면 자기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순대비가 사망한 후 경빈이 중전이 되고 복성군이 세자가 된다 해도, 물론 좋은 시절은 끝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귀양가거나 사약먹을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문정왕후에게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다.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경빈이 그녀를 가만두겠는가?

폐비 윤씨처럼 사약 먹고 죽을 게 뻔했다.


그리고 이에 더해, 그 시점에서 문정왕후가 경빈을 제거해야 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 본다.

앞서 문정왕후가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은 것을 설명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기록에 등장하는 5명의 출생년도를 알아보자.

1) 의혜 공주 : 1521년, 2) 효순 공주 : 1522년, 3) 경현 공주 : 1530년, 4) 명종 : 1534년, 5) 인순 공주 : 1542년


이 기록을 보면 효순 공주와 경현 공주 사이에 8년의 텀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정왕후가 1501년생이니 23~30살에 해당하는 시기다.

한창 아이를 낳을 시기에, 8년간이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것이 약간 의아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효순 공주와 경현 공주의 사이에 문정왕후가 출산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중궁도 잠시 감기 증세가 있고 또한 평소와 같은 때가 【3월이 임박했음을 말한다.】 아니기 때문에 이달 13일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해 단속해 놓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6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중궁이 해산했으니 7일 안에는 경연을 열기를 품하지 말고 문묘의 별제 날짜도 10일 후로 물려서 정하고, 문무과의 별시도 차례차례 물려서 정하라."』 (《중종실록》 1528년 8월 30일)


1528년의 기록은 문정왕후가 해산했다고 명시했으며, 1525년의 기록 역시 문정왕후가 임신 중(=평소와 같지 않은 때)이었으며, 이듬해 3월이 출산 예정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저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1525년과 1528년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중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1525년의 일이다.

그해 윤12월 13일, 문정왕후가 계획대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 때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 대사헌 박호 등이 차자 올리기를, "전일에 중궁께서 이어하실 때를 당해 바로 길 곁의 광천위 김인경의 집에 무당들을 모아놓고 북 울리는 소리가 길을 덮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었습니다.

시위하는 관원들이 거의 모두 놀라서 그 사람들에게 따져 묻자,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고 중궁을 위해 비는 제사를 차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어찌 전하께서 아실 일이겠습니까?"』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16일)


중종이 자순대비에게 물으니, 대비가 지시한 건 맞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그녀도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전교하였다. "그 뒤에 자전의 분부이신지를 품하니 ‘이는 곧 행행(行幸) 때면 으레 하는 일로서 아랫사람들이 품하기에 내가 단지 그대로 들었을 뿐이다. 어찌 그처럼 외람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하시었다...

이 일은 이미 자전께서 아신 것이었으니, 핑계한 것이 아닌 듯하다."』 (《중종실록》 1525년 윤12월 18일)


이때 음사가 벌어진 장소가 광천위 김인경의 집인데, 그는 바로 경빈의 장녀, 혜순 옹주의 남편이었다.

즉, 문정왕후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빈의 사위의 집에서 벌어진 음사로 인해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뜻이다.

당시 해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이가 유산되었고, 이로 인해 문정왕후가 건강을 해쳤을 가능성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가? 문정왕후가 경빈에 대해 이를 갈고 있지 않겠는가?

정황상 나는 문정왕후가 이 사건을 벌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작서의 변을 동일 인물이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생각했기에 범인을 찾는 데 실패했다.

문정왕후가 이 사건을 벌일 만한 이유와 근거는 차고 넘치는데, 그녀가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정왕후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러한 일을 직접 실행했을 리는 없다.

거동의 자유가 없다시피 한 중전이 이런 일을 직접 하기에는 무리이거니와, 만에 하나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바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작서의 변의 계획자와 실행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궁궐 내에 있지만 거동이 자유로운 편이고, 사람들의 의심을 덜 받으면서도 만약 걸렸을 시 독박 쓰고 나갈 문정왕후의 대행자.

난 작서의 변을 실제로 실행한 이는 창빈 안씨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작서의 변의 범인으로 창빈 안씨를 꼽았던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왜 창빈 안씨를 실행자로 봤느냐?

먼저 '위키백과'에 나오는 창빈 안씨에 대한 설명을 소개한다.

『창빈 안씨는 1499년 음력 7월 27일 금천에서 안탄대와 황씨의 딸로 태어나, 1507년(중종 2)에 내명부 궁인으로 들어가 자순대비를 시봉하였다.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행동이 정숙하고 참신하여 자순대비 윤씨의 눈에 들어 대비의 후원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1520년(중종 15년)에는 정5품 상궁에 배수되었다.

1529년(중종 24)에는 종4품 숙원에 올랐으며, 1540년(중종 35) 숙용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

1520년 상궁이 되었고, 1529년 숙원에 올랐다고 하니 작서의 변이 벌어진 1527년 창빈 안씨는 '안상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 그럼 사건의 주요 관계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주요 순간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다.

1527년 2월 25일, 세자궁 근처에 걸린 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안빈의 계집종 내은덕이었다.

그리고 3월 1일, 쥐의 사체를 가져다 문정왕후와 자순대비에게 알린 사람은? 바로 안씨다.

내시 김귀인에게 쥐를 잡아올 것을 부탁한 은이는 안상궁의 방자이다.

마지막으로, 자순대비에게 혜순 옹주의 시종들을 일러바치고 그들을 추문하는 자리에서 욕을 했던 이 역시 안상궁이다.

자, 안빈 = 안씨 = 안상궁. 어떤가?

난 작서의 변이 문정왕후 계획, 창빈 안씨 실행 작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후에 문정왕후는 창빈 안씨를 특별대우했다.

일반적으로 성은을 입어 왕자를 낳으면 바로 숙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창빈 안씨는 1521년 영양군을 낳았는데도 숙원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상궁에 머물러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순대비가 총애하던 궁녀라고 했으니, 아마 문정왕후가 숙원 책봉을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작서의 변에서 창빈 안씨가 문정왕후 대신 총대 메고 맹활약, 큰일을 성사시켰으니 그 공을 인정하여 1529년에 그녀를 숙원으로 승진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원래대로라면 선왕이 죽은 후 3년 상을 치르고 나면 선왕의 후궁들은 궁에서 나가야 했지만, 문정왕후는 중종의 삼년상을 마친 후에도 창빈 안씨를 궁에서 계속 지내도록 했다.

이 역시 그녀의 공로에 대한 문정왕후의 보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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