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8)

by Loxias

* 작서(灼鼠)의 변(變) (4)


작서의 변의 범인을 추측해 봤으니, 이제 이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과 입장에 대해 알아보자.

당연히 국왕이자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인 중종의 생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중종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경빈, 아들은 복성군이었다.

그런데 중종은 왜 경빈이 범인이라고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녀와 복성군을 내쫓았을까?


중종은 처음부터 이 사건이 궁인을 모함하기 위함이며, 그 대상이 경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교하기를, "만약 요괴로운 술법을 부리려 했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곳에다 했을 것이다. 어찌 여러 사람이 다 보는 곳에다 했을 리가 있겠는가?"』 (《중종실록》 1527년 3월 23일)

그는 수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어, 목격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대답만을 반복했다.

온 조정이 나서다시피 했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3월 24일 이후 수사에는 어떤 진척도 없었다.

사실상 그냥 덮고 가겠다는 의지 표현이고,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중종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끝내주는 타이밍에 또 다른 일이 터졌다.

평시서(平市署)의 샘에 나인 한 명이 빠져 죽는 일이 발생했는데, 조사 결과 복성군이 연루되었던 것이다.

『형조 판서 한형윤·참판 이사균·참의 김영 등이 아뢰기를, "지금 샘에 빠져 죽은 사람을 조사해보니, 바로 무수리 업종의 문안 비자인 천비(千非)였습니다. 이 사간(事干)에 복성군의 비자(婢子)와 나인도 참여되었습니다."

【전일 대신들이 아뢰기를 "평시서 샘에 궐내의 문안 비자가 빠져 죽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의당 급속히 추문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형조로 하여금 추문하게 했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4일)


이 사건의 정확한 날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음은 이후 진행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다.

4월 3일, 중종이 더 이상 조정의 추가 조사 요구를 뭉개고 있을 수 없었던 듯 결국 경빈·안씨·김씨 등으로부터 공초를 받았다.

4월 7일, 경빈의 종 범덕이 '모두가 경빈을 의심하고 있다.'라고 진술하는 바람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중종은 범덕에게 고신을 가하며 조사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종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범덕만 아무 말 안 하고 형신 받다가 죽는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다.'

증거도 없고, 자백도 없으니 도무지 경빈을 처벌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4월 10일, 사옹원 각색장 등이 쥐를 잡아가지고 궁내로 들인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왔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변자가 드디어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중종·경빈·복성군, 문정왕후·인종 양측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고변한 자들을 추문해서 이 사건의 진범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종과 대신들은 이들의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중종은 이들이 작서의 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다고 했고, 대신들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4월 10일의 고변을 처리하는 중종과 대신들의 행동을 보면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후반부, 고니(조승우 배우)의 밑장빼기를 눈치챈 아귀(김윤석 배우)가 패를 까보자고 나서자, 고니가 판돈으로 가진 돈 전부와 손모가지를 걸며 이렇게 외친다.

"쫄리면 뒈지시던지!"

고니가 밑장 빼기를 했다는 확신이 있던 아귀는 주저 없이 패를 까봤던 것이고, 그 결과 손모가지가 날라갔다.

반면, 이 경우에는 중종과 대신들 모두 쫄려서 패를 까지 않고 덮는데 동의했다.


중종은 왜 추가 조사를 반대했을까?

내 생각에는 경빈이 작서의 변과 비슷한 음사를 지속적으로 해왔고, 이걸 중종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 문정왕후가 이어할 때 경빈의 사위집에서 벌어졌던 일도 그렇고, 경빈의 딸인 혜순 옹주의 종, 모이강의 공초에도 그런 정황이 드러난다.

『이 추문에 대한 공초는 ‘비자 귀인이 나에게 너는 외간 사람이니 쥐로 액땜한 일을 발설한 사람은 너도 의당 타매(打罵)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불에 그스른 나무 작대기로 땅을 두 번 때린 뒤에 발싸개 목을 찢으면서 저주하기를 「쥐의 일에 대해 말한 사람은 그 몸을 이 모양으로 찢겠다.」 했다.’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8일)

이런 상황에서 혹시나 추가 조사를 했다가 경빈이 연관되었다는 진술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설사 경빈이 한 짓이 아니더라도, 고변자들이 매수되어 경빈이 시킨 게 맞다고 진술한다면?

그때는 경빈과 복성군 모두 끝장이다.


문정왕후 측 역시 경빈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뻔했다.

중종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을 모함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때는 문정왕후나 인종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동조하여 움직였던 대신들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연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중종 역시 분노의 칼춤을 추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딨는가?

그랬기에 위관(委官) 심정을 비롯한 대신들 역시 추가 조사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말 한번 잘못한 것에 불과한 경빈의 시종 범덕은 며칠에 걸쳐 고문까지 했으면서, 실제로 쥐를 잡아왔다고 고변했던 사람들은 조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다 풀어줬겠는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앞선 글에서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족쳤어야 했을 인물이 처음 이 사건을 알린 인종의 외조부 윤여필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이 사건을 알렸던 조정 대신을 기억하는가? 당시 우의정이었던 심정이다.

심정에 대해 실록에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복성군 이미는 상(인종)의 서형(庶兄)으로 박빈의 아들이다. 박씨가 왕의 총애를 받고 미가 장성하게 되자 상은 동궁으로 있었으나 외롭고 미약했다.

심정이 이미 사림에 화를 꾸며 공론에 죄를 얻자 스스로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동궁의 후일의 지위를 굳히려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26일)


심정이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인종과 문정왕후 측에 협력, 경빈을 쫓아내려 했다는 단서가 되는 대목이다.

이것은 결국 심정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은 이 사건이 경빈을 노린 음해사건임을 알았다는 얘기로도 볼 수 있다.

위의 근거를 모두 종합해서, 나름대로 작서의 변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평소 경빈은 문정왕후와 인종을 해칠 목적으로 음사를 계속 해오고 있었다.

- 궁궐 내에서도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경빈이 범인으로 의심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경빈의 사위집에서 벌어진 음사로 아픔을 겪은 문정왕후가 경빈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창빈 안씨를 사주하여 일을 벌였다.

- 그리고 이것을 인종의 외조부 윤여필을 통해 심정에게 알려 조정에서 공론화하고, 경빈을 범인으로 몰아 없애버리려 했다.

- 이걸 알고 있던 중종은 사건의 조사를 계속 미루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 그러던 차에, 생각지도 못한 고변자의 등장으로 인해 양측 모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조정 여론이 갈라지게 된다.

그전까지는 온 조정이 하나가 되어 중종더러 제대로 조사하라고 압박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4월 10일 이후 추가 조사를 막았던 대신들과 달리, 대간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들이 대신들을 비난하며 끝까지 조사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중종도 그렇지만, 아마 심정을 비롯한 대신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였을 것이다.


이때 자순대비가 나서 경빈을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지목했다.

대비의 전교에 이유청 등이 했다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이유청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전교하신 뜻이 이와 같으니 이는 종묘 사직의 대계를 염려해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신 등은 감동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4일)

어떻게 이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까 출구 전략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대비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 줬으니 "감동스럽기 그지없다."는 아마 그들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자순대비는 그녀의 전교에서 잊지 않고 은이와 김귀인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다시 한번 못 박았다.

그렇기에 나는 대비 역시 이 사건의 범인이 창빈 안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우스갯소리로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대비가 창빈 안씨의 말에 따라 혜순 옹주의 계집종들을 불러다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것을 조사했던 것이 4월 1일이었다.

이것은 아마 끝까지 쥐를 잡았다는 고변자가 나오지 않을 것을 가정하고, 경빈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회심의 카드였을 것이다.

그런데 쥐를 잡았다는 사람이 나왔고, 창빈 안씨의 계집종 은이가 관련되었다는 말이 돌자 어쩔 수 없이 그걸 덮는데 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비가 저렇게까지 나서는데, 중종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대비의 전교에 따라 경빈과 혜순 옹주의 시종들에 대한 강력한 조사가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경빈이 범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경빈이 범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근거다.

한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을 7일간이나 혹독한 고문을 가했는데, 아무도 자백하지 않았다는 게 뭘 뜻하겠는가?

결국 4월 21일, 중종과 대신들 간에 처벌 수위를 둘러싼 합의가 진행되었다.

이때 중종과 대신들의 대화도 속뜻을 알고 다시 보면 심리전이 장난이 아니다.


『심정이 첨의로 아뢰기를, "지금 형신을 가해도 형세가 실정을 알아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6차나 형신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맥이 너무 약해져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끝내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모두 장하(杖下)에서 죽게 된다면 조정의 물론이 더욱 흉흉해질 것입니다...

사간(事干)들이 지금은 죽지 않았지만 금명(今明) 간에 반드시 죽은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사간은 자복받기가 매우 어려우니 위에서 결단을 내려 선처하소서. 위에서 결단하기가 곤란하면 조정에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심정의 이 발언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난 그가 중종을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을 해석해 보자면 이쯤 되겠다.

'쟤네들 고문받다가 다 죽으면 그땐 경빈한테 더 불리해. 그리고 만약 한 명이라도 죽기라도 하면 겁에 질린 누군가가 거짓 진술을 할 수도 있어. 이렇든 저렇든 간에 그렇게 되면 경빈은 죽는거야. 경빈을 살리고 싶다면 잘 생각해.'


결국 중종은 대신들의 협박에 굴복했다. 대신 경빈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부탁했다.

『전교하기를, "조종조 적에도 의심스런 일로 대죄(大罪)를 결정한 때는 없었다. 조정에서는 모름지기 상세히 헤아려 의논해서 조처가 중도(中道)에 맞게 함으로써 후세의 기롱이 없게 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대신들은 경빈과 복성군을 내칠 것을 주장하면서, 이게 다 중종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유청 등이 다시 의논해서 아뢰기를, "대내의 일을 신 등이 알 수는 없습니다만, 생각건대 위에서 틀림없이 엄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빚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정상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물정이 모두 지적하는 곳이 있으니 죄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빈은 폐하여 서인을 만들고 복성군은 작호를 삭탈하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21일)


이건 대신들이 처세를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건대 위에서 틀림없이 엄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빚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 역시 직설적으로 풀어서 다시 써보자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이건 다 네가 경빈한테 헛바람 집어넣어서 벌어진 일이다. 너나 그녀나 주제를 알아야지.'

이미 항복한 것만으로도 억울해 죽겠는데 거기에다 이런 말까지 듣는다면 어떻겠는가?


4월 21일, 경빈을 내쫓는다는 발표에 대신들을 제외한 온 조정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경빈을 의율(擬律)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녀가 범인이니 법률에 의거 처벌 수위를 결정하라는 뜻으로, 곧 죽이라는 얘기였다.

이에 대한 중종의 답변이 사뭇 강경했다.

『전교하기를, "대죄(大罪)는 반드시 사간(事干)의 증언이 귀일된 뒤에야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그 실정을 알아내어 죄를 정할 일로 추관(推官)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추관도 실정을 알아내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의죄(擬罪)할 일로 와서 아뢰었다. 때문에 조정과 같이 의논해서 의죄한 것이다.

그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대죄를 결정하는 것은 고금에 못들은 일이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2일)


그럼에도 대간, 홍문관 등에서 경빈을 의율하라는 청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중종은 정광필, 심정 등 경빈의 의죄에 합의했던 대신들을 다시 불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영중추부사 정광필과 우의정 심정 등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이 이미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간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여러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일을 가지고 다른 죄를 가중시킬 것을 의논하는 것은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저들 모자를 외방(外方)으로 귀양보내야 하겠는가, 무슨 죄를 가해야겠는가?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7년 4월 26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대신들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정광필 등이 첨의로 아뢰기를, "지금 하문을 받들어 다시 각자의 의논을 모으고 되풀이 생각해 보았지만 전일의 의논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고쳐서 가죄(加罪)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부터 총애하던 사람을 외방으로 귀양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예전에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귀양보내게 되면 폐단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신 등은 가죄하는 일이 합당한 처사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6일)


그러자 대간들이 대신과 육경을 탄핵하는 한편, 사직서를 내던졌다.

『"대신과 육경들은 모두 참혹한 흉계가 종묘 사직의 화임을 알면서도 다같이 입을 모아 화의 씨앗을 곡진히 비호하고 있으니 그 세력이 조정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박씨의 뒷날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음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경상들이 ‘가죄하는 일이 합당한 처사인지 모르겠다.’고 아뢰었고, 전하께서도 굳게 거절하심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신 등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 등의 직을 갈아주소서."』 (《중종실록》 1527년 4월 27일)


대간들은 중종과 대신이 함께 경빈을 보호하여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의죄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실제로는 중종과 대신들이 같은 편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중종이 놀라운 정치적 결단을 실행, 돌파구를 찾아내고 반격의 여지를 만들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중종은 정치질에는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간 계속 끌려다니기만 했던 중종이 이번에는 먼저 경빈과 복성군을 귀양보내겠다고 말했다.

『전교하였다. "자복을 받지 못한 일에 대해 다른 죄를 가할 수는 없다. 오늘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저들 모자를 본 고향으로 찬출(竄黜)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서울과 단절될 것이고 조정과 물론도 쾌하게 여길 것이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30일)

이 기록에서는 약간 모호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확실히 중종이 먼저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시강원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신은 머뭇거리며 사태만 관망하면서 이렇다할 가부가 없다가, 전하께서 ‘다만 폐함이 합당하고 가죄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면 대신도 ‘가죄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전하께서 ‘지금 찬출함이 가하다.’ 하면 대신도 ‘내쫓는 것이 가하다.’ 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1527년 5월 4일)


내가 왜 이걸 중종의 정치적 결단이라고 보냐면, 그저 단순히 궁에서 내쫓기만 하는 것과 귀양을 보내는 것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저 궁에서 내쫓기만 하는 거라면, 훗날 다시 돌아올 여지가 있었다.

성종 때 폐비 윤씨도 복귀시키자는 주장이 있었으며, 중종이 박원종의 압박으로 내쳤던 신씨 역시 장경왕후가 죽었을 때 불러들여 중전으로 삼으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숙종 때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밀려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5년 만에 복귀했다.

대간 등이 가장 우려했던 부분도 이것이었을 터. 시간이 지나 잠잠해지면 중종이 경빈을 복귀시킬 여지가 충분했다.

『"사람의 마음은 출입(出入)이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전하께서 춘추가 많아지시어 경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짐으로써 다시 인연을 얻게 되면, 조정의 화를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7년 4월 27일)


이에 더해 중종은 대간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빈의 인척인 대신들을 전부 잘랐다.

『대간이 이유청·홍숙·김극개·홍서주·김헌윤과 전 대간 등의 일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제천 현감 윤인범은 바로 복성군의 처부입니다. 이 역시 혼가이니 파출시키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이유청·홍숙·김극개는 체직시키라. 홍서주·김헌윤·윤인범과 전(前) 대간은 송서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27년 5월 5일)


즉, 중종이 경빈과 복성군을 귀양 보내고 그녀와 사돈을 맺은 대신들을 전부 자른 것은 일종의 대외 선언인 셈이다.

경빈을 중전에 앉히고, 복성군을 세자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불러들이지 않겠다는 선언.

대간 등이 원했던 것이 경빈과 복성의 목숨이 아니라 인종의 후계자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음을 중종이 알아채고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실제로는 작서의 변을 주도하여 경빈을 제거하려 했던 대신들에게 오히려 그녀와 결탁하여 봐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씌우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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