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서의 변을 통해 경빈과 복성군을 귀양보내고, 그들과 인척 관계에 있는 대신들을 잘라냈던 중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김극개, 홍숙을 복귀시켰다.
『김극개를 개성부 유수에, 김희열을 홍문관 부교리에, 송순을 부수찬에 제수하였다.』 (《중종실록》 1527년 7월 8일)
『정광필을 영의정에, 심정을 좌의정에, 이행을 우의정 겸 홍문관 대제학에, 이유청을 영중추부사에, 홍숙을 좌찬성에, 윤풍형을 홍문관 수찬에, 소봉을 정자(正字)에 제수했다.』 (《중종실록》 1527년 10월 21일)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복성군의 복귀를 타진했다.
1528년 10월, 복성군의 아내 윤씨가 궁궐로 올라와 복성군을 서울 근처에 있게 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정원이 아뢰었다. "어제 하문하신 복성군 부인의 상언에 관한 일은 그 대의가 복성군이 있는 곳은 독사의 해독이 있고 또 복성군이 병이 나서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서울 근처로 이배(移配)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는데, 22일 정원에 바쳤으나 본원이 입계하기 어려워서 도로 주었습니다."』 (《중종실록》 1528년 10월 29일)
자순대비도 윤씨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혜순·혜정 옹주 등이 대비에게 눈물로 호소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극성 등에게 전교하였다. "부인이 올라온 일은 내가 처음에는 몰랐는데 영릉에서 환궁한 뒤에 자전께 문안하였을 때에 자전께서 그 올라온 일을 말하셨으므로 내가 알 수 있었다.
또 복성군은 죄를 얻었으므로 그 부인이 올라왔더라도 진실로 자전께 문안할 수 없으나, 그 밖의 당성위와 광천위의 집 같은 데서는 다 자전께 문안하였을 것이니, 자전께서도 이 문안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아셨을 것이다."』 (《중종실록》 1528년 윤10월 13일)
이것이 알려지자 대간에서 곧바로 윤씨를 상주로 돌려보내는 한편, 그녀의 상경을 알리지 않은 관리들을 처벌하라고 건의했다.
『대간이 합사하여 아뢰기를, "복성군은 이미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본향으로 내쳤고 부인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아비를 따라야 하거니와, 내려갈 때에 상께서 아셨다면 올라오는 것도 반드시 상명이 계셔야 하니 마음대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복성군의 일은 친히 범한 죄가 아니기는 하나 【쥐를 태운 일은 박씨가 한 일이라는 뜻이다.】 국본에 관계가 있으므로 서울에 편안히 있을 수 없다 하여 이미 본향으로 보냈는데 그 도의 감사와 본읍의 수령이 단속하지 못하여 올라오게 하였으니, 부득이 나래하여 추고해야 뒷사람들이 다 부인이 마음대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중종실록》 1528년 10월 29일)
이에 대해 중종은 윤씨가 한양에 올라온 이유를 설명했다.
『전교하였다. "올라온 것은 내가 처음에는 몰랐으나, 그 뒤에 듣건대 그 아비 윤인범이 상중에 병이 났으므로 병든 아비를 보러 올라왔다 한다. 무지한 아낙이 어버이를 보고 돌아가는데 무엇이 해롭겠는가?...
저 감사와 수령의 생각도 내 생각과 같이 어버이를 보고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여 올려보냈을 것인데 이 일로 나래하여 추고한다면 소문에 있어서도 놀라울 것이다."』 (《중종실록》 1528년 10월 28일)
대간은 윤씨가 상주로 돌아가지 않자 윤인범까지 추문하라고 나섰다.
『대간이 아뢰기를, "복성군 부인의 일은, 당초 논계하였을 때에 상교(上敎)에 ‘대간의 논계를 들으면 스스로 내려갈 것이다.’ 하였으나 이제까지 지체하여 거의 내려갈 생각이 없으니, 처음에 올라온 것과 올라와서 지체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은 가장이 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인범이 조정이 놀라와하는 뜻과 상께서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고 분부하신 뜻을 아는데도 곧 내려보내지 않으니, 이는 조정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감히 진소한 까닭은 위로 상의 뜻을 시험하고 아래로 조정을 엿보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일은 작으나 앞으로 올 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니, 윤인범을 조옥(詔獄)에 내려 추고하소서."』 (《중종실록》 1528년 윤10월 8일)
결국 윤씨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윤10월 17일 상주를 향해 떠났다.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난 경빈과 복성군을 분리했던 전략이 매우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경빈은 자순대비에 의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지목되었고, 결국 유죄 판결을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복성군은 달랐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경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처벌받았다.
대비를 찾아가서 인정에 호소한 것 역시 매우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복성군은 대비에게 있어 첫 손주였다. 경빈은 모르겠지만, 대비도 복성군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시도를 알게 되었을 때, 대신들은 식겁했을 것이다.
작서의 변을 통해 밟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스멀스멀 저들이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대비가 복성군을 용서하고 불러들이라고 했다면, 대신들도 반대하고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복성군 측 인물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하게 되었다.
1530년, 이번에는 김헌윤과 김극개가 타깃이 되었다.
『김공예가 아뢰기를, "헌윤이 신석간에게 ‘네가 성명을 사칭하고 과거에 응시한 일에 대해 위에서 나에게 「석간이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너는 의당 조심해야 한다.’ 하였고, 그밖에 전한 말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 논의는 나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2일)
중종은 이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설명했다.
『상이 이르기를, "신석간의 일을 헌윤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때 이조의 정청(政廳)에 전교하기를 ‘신석간이 성명을 사칭하고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이런 사람을 청현직에 의망(擬望)한다면 사습(士習)이 어떻게 바루어지겠는가.
꼭 쓸만한 사람이라면 끝내 이 때문에 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즉시 청현직에 서용하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고 했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2일)
중종이 직접 아니라고 했는데도 대신들은 계속 물고 늘어졌다.
『정언호가 아뢰기를, "이 일은 신도 들었습니다. 만일 상께서 헌윤에게 직접 물으신 일이 아니라면 헌윤이 어떻게 이런 말을 전하겠습니까."』 (《중종실록》 1530년 5월 22일)
그러자 중종이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이 노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이르기를, "조정의 일을 어째서 김헌윤에게 의논하겠는가. 석간에 대한 일은 그때에 다만 이조에 전교하였을 뿐이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2일)
김헌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일의 본말이 드러났다.
『헌윤의 공사에, "무자년(1528년) 겨울에 아들 김인경이 문안할 일로 대궐에 나가자, 상께서 하교하기를 ‘너는 무슨 글을 읽느냐’ 하시고 이어서 말하기를 ‘근래에 사습이 바르지 못하여 신석간은 이름을 사칭해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니, 사람들의 마음씨를 바루지 않을 수 없다. 너도 부지런히 배워라.’ 하였는데, 이 말을 내 아들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후 신석간과 왕래하며 얘기를 나눌 때에 ‘네가 이름을 사칭하고 응시한 그 부당한 처사에 대해 상께서 누차 전교를 했을 뿐만 아니라 광천위에게도 하교하였다.’는 말만을 했을 뿐이다.
그 ‘석간이 어떤 사람이냐?’라든가, 또는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는 등의 말은 전혀 모르겠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6일)
중종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확인했지만 대사헌과 대사간이 꼬투리를 잡았다. 김헌윤이 중종에게 자신이 잘 말해준 것처럼 꾸며 신석간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이다.
『대사헌 김근사와 대사간 심언광 등이 상차하였다.
"김헌윤은 전하께서 우연히 말씀 한 마디 한 것을 가탁하고, 자기 집안에 대한 상의 치우친 은총을 빙자하여 전하의 수십년 동안 쌓아 놓은 정심·성의의 공부가 사특한 제 입 한 번 놀리는 데서 모조리 없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덕에 누를 끼치고 아름다운 명성을 손상시켰으며, 오늘날의 화를 일으키고 훗날의 기롱을 초래하였으니, 임금을 불의에 빠뜨린 죄는 진정 도피하기 어렵습니다."』 (《중종실록》 1530년 5월 28일)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김헌윤의 아비인 김극개와 백부 김극핍도 공격하고 나섰다.
『"김헌윤의 집은 권세의 치성함이 사람을 도취시키고 있습니다. 헌윤의 아비 김극개는 성질이 음흉하고 사특한데도 형조 참판이 되었고, 숙부 김극핍은 성질이 경조하고 잔인한데도 정부의 중한 지위에 있으므로, 빌붙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고 그에게 동조하는 무리가 매우 많습니다...
극개는 항상 박씨(朴氏)를 기화(奇貨)로 삼아 겉으로는 인척을 가탁하면서 속으로는 노비를 바치는 등 음흉하고 비루하기 그지없고, 극핍은 편벽되고 음험하여 선량한 사람을 꺼리고 정직한 사람을 시기하며, 게다가 또 정직한 사람을 육경의 반열에서 물리쳐 제거하려 합니다...
전하께서는 굳센 결단력을 크게 발휘하시어 부정한 자를 제거하는데 머뭇거리지 말아서 헌윤의 간악한 정상을 끝까지 국문하시어 무거운 형전(刑典)에 처하시고, 극핍과 극개에게서는 속히 관작을 빼앗고 외지로 귀양보내서 공론을 유쾌하게 하소서."』 (《중종실록》 1530년 5월 28일)
중종은 대간의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이들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
『대간이 세 번째 아뢰자, 비답하였다. "김헌윤은 고신(告身)을 모조리 빼앗고 외방으로 부처(付處)하라. 김극핍과 김극개는 모두 파직하고, 전 대간 및 김의정과 한두 등은 서반으로 보내라."』 (《중종실록》 1530년 6월 4일)
그럼에도 대간의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김극개와 김극핍도 고신을 회수하였다.
『양사 및 홍문관에 전교하였다. "극핍과 극개에게 고신을 모두 빼앗게 하면 되겠다. 헌윤은 이미 외방으로 귀양보냈는데, 배소(配所)도 경기의 근읍(近邑)이 아니니 기필코 바꿀 것이 없다."』 (《중종실록》 1530년 6월 9일)
김헌윤·김극개·김극핍을 쫓아내는 과정을 주도했던 것은 대사헌 김근사와 대사간 심언광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당시 그들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사신은 논한다. 김안로가 다시 쓰이게 된 조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이는 김근사와 심언광의 소행이다.』 (《중종실록》 1530년 6월 1일)
이것이 김안로의 복귀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사신은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중종의 치세 전반기에 걸친 조선 조정의 권력 다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흔히 이 시기 권력투쟁을 남곤·심정 등의 훈구파와 조광조를 대표로 하는 사림(士林)의 대결이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남곤·심정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연산군 시절 발생한 사화로 해를 입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였거나, 이후 복귀한 자들이다.
이들은 중종반정 이후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그 후로 오랜 기간 권력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반정 이후 조정에 출사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승진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권력을 장기간 독점하고 있는 공신들과 비교하고 불만이 커지게 된다.
'저들이 나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으면서 단지 시기를 잘 만나 일찍 출세하여 나이 사십도 안돼 당상(堂上)의 반열에 올랐는데, 내 꼴은 이게 뭐란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멀리 갈 것도 없다. 5·16이 좋은 사례이다.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장도영으로, 1923년생이다.
그는 육사가 세워지기 전인 1945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소위로 임관했다.
6·25 발발 당시 대령이었고, 전쟁 초기인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채 서른도 되지 않아 별을 달았던 것이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대한민국 최초 4성 장군인 백선엽이 대장을 달았을 때가 1953년 1월인데, 그가 1920년생이니 당시 나이가 서른셋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들의 이른 출세에만 있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이들이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들끼리 돌아가며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었다.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 역임했고, 합참의장·야전군사령관 등 최고위 보직을 여러 번 돌아가며 수행했다.
정일권, 유재흥 등 당시 고위직 장군들 역시 비슷한 경력을 거쳤다.
정광필·남곤·심정 등 반정 주요 세력들이 십수 년간 돌아가며 정승, 판서를 역임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반면 5·16 중심세력인 김종필은 1923년생으로, 임관이 늦어 육사 8기였다.
백선엽, 장도영 등과 나이는 비슷했고, 임관 시기도 고작 3년 정도 늦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종필은 1961년 5·16 당시 나이 사십이 가까웠음에도 계급이 중령이었다.
그의 육사 8기 동기들 중에는 대령만이 몇명 있었을 뿐, 장군은 없었다.
실제로 그 당시 이에 불만을 품은 육사 출신 군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들은 시기를 잘 만나 삼십대에 장군달고 수년간 온갖 특혜를 다 누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중령에 불과하니 이게 뭐란 말인가?'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는 말이 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로, 세대교체가 세상의 이치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중종 때 조선 조정이나 5·16 당시에 적용해 보자면, 앞물결, 즉 기성세력들이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바다로 빠져줘야 하는데, 강 하구에 둑을 쌓아놓고 버티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뒷물결, 즉 신진 세력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적체되기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수위가 점점 올라가 둑을 미는 압력이 커지게 될 것이고, 버티다 못해 둑이 무너지면서 앞물결은 바다로 강제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있다.
권세는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인데 위의 '장강후랑추전랑'의 의미와 함께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십 년 정도 권세를 누렸으면 알아서 내려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뒷물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달이 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야지, 죽을 때까지 해먹으려 한다면 험한 꼴을 보게 된다는 얘기다.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다시 돌아오도록 하자.
중종은 박원종과 반정 세력에 의해 왕이 되다 보니, 실권이 없어 이들 공신 세력에 끌려다녔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저들의 요구에 신씨를 내쫓았으며, 경빈을 중전에 앉히는 것도 두 번 모두 실패했다.
이 상태로는 답이 없었다고 느꼈던지,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로 했다.
오랜 기간 권력을 틀어쥐고 비켜주지 않는 공신 세력들에 대한 사림의 불만도 팽배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때 중종의 픽을 받은 사람이 조광조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조광조의 등용 시기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장경왕후가 죽고, 대신들의 반대로 경빈을 중전에 앉히지 못하고 새로 왕비를 뽑기로 결정된 것이 1515년이었다.
문정왕후가 실제로 궁에 들어온 것은 1517년이지만, 그것은 장경왕후의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혼례를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1515년에 결판이 났던 것이다.
조광조가 조정에 들어온 것이 1515년 6월의 일이었다.
『안당이 아뢰기를, "이제 성균관이 천거한 것을 살펴보니, 조광조·김식·박훈 등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거되었으니, 반드시 성균관의 당상 장관과 2백 생원들의 뜻에 맞은 뒤에 천거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문신(文臣)을 등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중종실록》 1515년 6월 8일)
그렇게 공신 세력 견제의 목적으로 픽해서 고속 승진을 시켜줬던 조광조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제거되었다.
난 조광조가 제거된 이유가 중종의 말을 듣지 않아서라고 본다.
위에서 설명했듯, 중종이 조광조를 픽해서 팍팍 밀어준 이유가 공신 세력에 대항할 세력을 키우는 데 있었다.
중종이 대항 세력을 왜 키우려고 했겠는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줄 친위세력이 필요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조광조는 그런 거 없었다.
중종의 기대대로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는 중종의 친위대는 되지 않았다.
중종으로서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조광조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토록 하겠다.
실패를 겪은 중종은 투 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경빈 소생 자녀들을 유력 대신들과 혼인을 맺게 하여 공신 세력을 분열시켰다.
그리고 사림 역시 끌여들여야 했다.
중종은 사림의 대표로 김안로를 픽하면서,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 공주를 그의 아들 김희와 혼인시켰다.
김안로의 이런 그의 절묘한 포지션을 모르면 그와 대신들 간에 벌어진 정쟁(政爭)을 이해할 수 없다.
김안로의 아들이 효혜 공주와 결혼한 것이 1521년인데, 남곤을 위시한 대신들은 1524년 김안로를 탄핵해서 귀양보냈다.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인종의 후원세력끼리 왜 서로 탄핵하고 싸운단 말인가?
인종을 매개로 보면 같은 편처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대신과 사림이라는 정적(政敵) 관계였다는 얘기다.
작서의 변이 마무리되고 약 한 달이 지난 1527년 6월 4일, 연성위 김희가 아비의 사면을 건의했다.
이때 역시 대신들의 답변은 '노'였다.
『대신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김안로는 관질이 높은 재상으로 여러해 동안 귀양가 있었으니, 다른 죄라면 사면받겠지만 이는 일이 나라를 그르치는 데 관계되므로 조정에서 논계하여 죄를 정한 것입니다. 어찌 경솔히 놓아줄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7년 6월 6일)
그런데 1528년 윤10월, 복성군 복귀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홍숙·김극개·김극핍 등 복성군 측 대신들은 진즉 조정에 돌아와 있었다.
인종 측 대신들이 이것을 어떻게 느꼈겠는가? 아마 작서의 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까 봐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연성위 김희가 다시 한번 아비의 사면을 요청했고, 결국 대신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김안로를 귀양에서 풀어주었다.
『삼공에게 전교하기를, "경들의 뜻은 놓아주자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 가뭄이 극심한 때를 당하여 원통한 일들을 풀어줄 때에 놓아주는 것이 좋겠다. 이는 당초에 조정의 의논에서 거론된 것이기에, 경들에게 알리고 놓아주려는 것이다." 하매,
영상 정광필이 아뢰기를, "세월이 이미 오랬지만, 은전(恩典)에 관한 일이라 아래에서 감히 계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짐작하여 조처하소서." 하고,
좌상 심정은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정광필과 같습니다." 하고,
우상 이행은 아뢰기를, "이 일은 당초 거론할 적에 신도 간섭하였었습니다. 다만 당초에 자복받지 않고 정죄(定罪)했었고 세월도 이미 오랬으니, 놓아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대신들의 의견은 모두 놓아주라 한다. 놓아주라는 것으로 판부하라."』 (《중종실록》 1529년 5월 24일)
이때 김안로는 귀양에서는 풀려났지만, 조정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1530년, 이번에는 김헌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때 대신과 대간들이 중종에게 김헌윤 등을 탄핵하며 했던 말이 무엇이었던가?
『"상교(上敎)를 가탁해서 신석간에게 공공연히 말하여 광영이 중함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아서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따라붙게 하려 하였고, 또 사특한 말을 지어내어 은혜를 파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중종실록》 1529년 5월 28일)
대신과 대간들의 위기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들은 이걸 김헌윤 등 복성군 측 대신들이 신석간 등의 사림 인물을 자기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으로 봤을 것이다.
예전에 경빈이 청탁을 들어줌으로써 조정에 자기측 사람을 확보했던 것과 동일한 목적의 행동으로 볼 여지가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결국 이를 기회로 김안로가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고, 그 뒤로 대신들의 몰락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정에 복귀한 김안로가 죽이거나 탄핵한 대신들을 보면 인종파나 복성군파를 구분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팀킬'을 더 많이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심정이다.
그런데 김안로 측에서 심정을 탄핵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경빈과 결탁했다는 이유였다.
『심정의 죄상을 고쳐 전지를 내렸다. "심정은 본래 음험한 성품으로 갑자기 높은 권좌에 올라 위복을 자기 멋대로 부리고 사특한 의논을 선동하여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였다. 지난번 작서의 변 때 은밀히 박씨(朴氏)의 뇌물을 받아 그의 문앞이 저자 같았다."』 (《중종실록》 1531년 12월 3일)
이 혐의에 대해 심정이 부인한 내용이 실록에 전한다.
『좌의정 심정이 아뢰기를, "이종익은 신이 박씨에게서 비단 5필을 받았다고 하고 있으나, 신은 나라의 외척이 아니니 내게 청탁할 리가 만무합니다...
신은 작서(灼鼠)의 사실을 듣고 그 일이 국본에 관계되므로 천은을 중하게 여겨 제몸을 잊고 아뢰었습니다. 신이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면 감히 제몸을 잊고서 아뢸 수 있겠습니까? 계달한 뒤로는 박씨가 물건을 줄 리가 없습니다."』 (《중종실록》 1530년 10월 2일)
난 심정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애초에 사건의 고변자가 심정이고, 앞장서서 경빈을 범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그였다.
쥐를 잡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중종과 타협하여 경빈을 살려뒀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를 죽이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