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중종하면 떠올리는 가장 유명한 사건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묘사되는 기묘사화일 것이다.
나뭇잎에 꿀로 글자를 써놓고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한 후, 그것을 중종에게 보임으로써 '조(趙, 즉 走+肖)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라고 모함하여 그를 위시한 사림 세력을 축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주초위왕' 에피소드는 《중종실록》이 아닌 《선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나라 공손인 병이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선조실록》 1568년 9월 21일)
기묘사화가 일어난 당대의 기록인 《중종실록》에는 이와 다르게 적혀 있다.
1520년 4월 16일, 이신이라는 자가 궁궐에 들어와 기묘사화 때 도망친 김식에 대해 고변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이신이 최운으로부터 '상이 원자를 바꾸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여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었다고 위에서 언급했었다.
이 발언의 주인공 최운은 한 달여가 지난 1520년 5월 20일, 자진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최운이 공초하기를, "회덕에서 송세일을 만났는데, 세일이 ‘심정이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는 참서를 궐정에 던진 뒤에 남곤과 함께 정광필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상께서 고립되신 줄 아느냐?」 하매 광필이 「상께서 조광조 등을 부족이 없이 대우하셨는데 그런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였다.’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이신에게 전하여 김식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20년 6월 3일)
이 기록에서는 남곤이 아닌 심정이 일을 꾸며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주초위왕' 역시 온데간데없고 '주초대부필'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 '주초대부필' 참어를 던진 이로 지목된 심정은 자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최운과 대질을 시켜달라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이조 판서 심정이 아뢰기를, "천감(天鑑)은 밝으실지라도 사방에서 듣고 후세에서 전하는 것은 어찌 신에 대하여 의심이 아주 없겠습니까? 최운의 복초에 확실하게 누구에게서 들었다고 하지 않았으니 신이 어찌 발명할 수 있겠습니까? 옥에 나아가 발명하여 이 수치를 씻게 하여 주소서."』 (《중종실록》 1520년 6월 3일)
중종 역시 최운의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상이 이르기를, "참어를 궐정에 던졌다는 것은 경에게 해가 될 뿐 아니라 위에도 관계된다. 내정(內庭)에 던졌다고 한다면 내정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고 외정(外庭)에 던졌다고 한다면 반드시 주워서 올린 사람이 있을 터인데, 이는 다 내가 일찍이 알지 못한 일이다."』 (《중종실록》 1520년 6월 3일)
시간이 지나 1544년, 중종이 죽고 난 후 성균관 생원 신백령 등이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사관이 의견을 달면서 기묘사화에 대해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남곤 등은 국초에 유행하던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이요,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다.’ 라는 도참설을 빌어 ‘목자는 이미 쇠퇴하고[木子己衰] 주초가 천명을 받는다[走肖受命].’라는 등의 말을 나뭇잎에 새겨 마치 벌레가 갉아먹은 것처럼 만들어 귀인으로 하여금 상에게 올리면서 ‘후원 나뭇잎의 벌레먹은 무늬가 이상합니다.’ 하게 하였다.
상이 이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비밀히 경주에게 명하여 남곤·심정 등을 밤중에 신무문 밖에 나오도록 약속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2월 21일)
이 기록에는 나뭇잎이 등장하긴 하나, 벌레가 실제로 갉아먹은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고 했으며, 글자 역시 '주초위왕'이 아니라 '주초수명'이다.
기록된 것마다 내용이 서로 다르니, 도대체 뭐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기묘사화의 본말에 대해 중종이 직접 말했기 때문이다.
기묘사화가 벌어지고 3일이 지난 1519년 11월 18일, 중종이 영의정 정광필 등과 면대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언단(言端)이 나왔으므로 말한다. 근자에 홍경주가 지친이기 때문에 와서 ‘급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하기에 내가 물으니 홍경주가 말하기를 ‘무사들이 저 사람들을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죄다 죽이려고 꾀하니, 조정에서 미리 처치하지 않으면 크게 어지럽게 될 듯한데, 조정에서 먼저 신진(新進)의 사람들을 죄주지 않으면 그 화(禍)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저 신진의 사람들을 억제하여 호오(好惡)를 먼저 보이면, 저 무사들의 원망이 절로 풀리고 조정의 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부득이 조광조를 죄주었으나,..."』 (《중종실록》 1519년 11월 18일)
중종은 '주초위왕'이니, '주초대부필'이니 이런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무사들 사이에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 세력들에 대한 불만이 너무 커 고려 시대 '무신정변'과 같은 난리가 재현될 우려가 있어 부득이하게 조광조 등을 죄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전한 것 역시 남곤이나 심정이 아닌 홍경주였다.
무사들의 대표격인 몇 명을 잡아다 조사를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의논이 있었다고 했다.
『임금이 장곤을 시켜 정귀아에게 먼저 물으니, 정귀아가 아뢰기를,
"금년 8월에 신이 박배근의 집에 가서 서로 이야기하였는데, 박배근이 말하기를 ‘지금 이 성조(聖朝)에서 문신들이 붕류(朋類)를 만들어 저희가 좋아하고 미워하는 대로 인물을 진퇴하여, 우리들을 초개(草芥)같이 여긴다.
훈구(勳舊)는 다 물러가 있어 인심이 어그러지게 하니 이들을 제거하고서 아뢰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18일)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된다. 무사들이 신진 세력을 공격할 것이 우려된다면 무사들을 막아야지, 왜 신진 세력들을 잡아다 죄를 준단 말인가?
아무튼 중종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자, 영의정 정광필 등이 지금 홍경주와 남곤 등이 사림의 공격을 받고 있으니 일의 본말을 명확히 밝힐 것을 요청했다.
『안당이 아뢰기를, "외간 사람은 다들, 아랫사람이 참소해서 사림이 이렇게 화를 당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과연 외간 사람이 임금의 뜻을 잘 모르고 다들, 홍경주·남곤 등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니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생의 소에도 참언이 들어왔다고 여기고 있다."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아랫사람들은 다 이 사람들 【홍경주·남곤을 가리킨다.】 이 한 것이라 합니다. 간사한 자로 지목되면 장차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명백히 알리셔야 합니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18일)
그러자 홍경주가 나서 기묘사화의 본말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중종에게 신진세력의 축출을 건의한 게 아니고 이 일이 중종의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다소 길지만, 그가 말한 내용을 전부 소개한다.
『홍경주가 아뢰기를, "사림을 해치려고 신이 앞장섰다고 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오늘 김전(金詮)을 만났는데, 김전이 신에게 말하기를 ‘사림들이 다 우리들을 참인(讒人)으로 지목한다.’ 하였습니다. 김전·남곤 등이 신 때문에 악명을 얻게 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저들이 지나치다 하여 바로잡으려고 생각하시는 것을 신이 알았으므로, 신이 남곤·김전 등에게 말하여 와서 그 죄를 분명히 바루기를 청하였습니다.
당초 신이 가서 김전을 만나보고 사습(士習)의 잘못을 논하고 바로잡아 구제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니,
김전이 말하기를 ‘이제 국가의 일이 이토록 크게 잘못되었으니, 임금의 뜻을 안다면 아침에 아뢰고 저녁에 죽더라도 어찌 후회하겠는가마는,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경솔히 발설하겠는가?’ 하기에, 신이 임금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또 남곤을 만나서 말하기를 ‘사습이 온통 이토록 잘못되었고 천의(天意)도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신다.’ 하니,
남곤이 말하기를 ‘나도 그 잘못을 환히 보았으므로, 임금의 뜻을 안다면 후세에서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하더라도 진계(進啓)하련다,’ 하기에, 신이 임금의 뜻을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드디어 남곤과 의논하기를 ‘이 일을 조정의 삼공이 하면 좋을 것이다. 조정의 일을 그르침을 알고 바로잡으시려는 임금의 뜻을 수상(首相) 【정광필】 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수상이 알고서 능히 바로잡으면 좋겠다.’ 하고 곧 남곤이 정광필에게 가서 말하게 하였는데,
정광필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저들 【조광조 등】 이 지나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한두 사람이 경연에서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을 제재한다면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겠으나, 형세가 할 수 없게 되었고 나도 어질지 못해서 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공언(公言)을 들었으나 나는 꾀를 낼 수 없으니, 그대들이 바로잡으려면 선처(善處)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죄주기를 청하던 날 밤에는 ‘대신이 결단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대신을 불러서 의논하여 결단하기를 계청하였습니다.
또 이 일은 신이 임금의 뜻을 알았으므로 김전·남곤에게 임금의 뜻을 말해서 한 것이고, 신의 일신은 돌볼 것도 없던 일이었으나, 김전과 남곤이 신 때문에 군자를 모해(謀害)하였다는 이름을 얻게 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환히 알게 하셔야 합니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18일)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하여 개인적으로 기묘사화를 재구성해 보겠다.
이 사건은 중종이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의 제거를 결심하고, 홍경주에게 이러한 뜻을 내비치면서 시작되었다.
애초에 '주초위왕'이니, '주초대부필'이니 이런 건 없었다.
홍경주는 중종의 의도를 알게 되자, 함께 일을 도모할 이들을 포섭하여 남곤과 김전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남곤이 포섭하고자 했던 정광필은 끝까지 참여를 거부했다.
거사 시행을 결정하자 그들은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단지 왕이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대신을 잡아 처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남곤이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다. 무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 사림 세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걸 명분으로 삼자고 말이다.
바로 무사 대표자를 섭외하고 말을 맞췄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중종이 홍경주에게 조광조를 제거하고자 하는 뜻을 전했고, 홍경주를 비롯한 김전·남곤 등이 모두 왕의 뜻에 따른 것이 맞다고 했는데, 도대체 왜 실록에는 '주초위왕'이니 '주초대부필'이니 이런 말들이 버젓이 쓰여있는 것인가?
내 생각에 이건 조광조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
남곤과 정광필의 말에 당시 조광조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해 볼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임금의 뜻을 안다면 후세에서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하더라도 진계하련다."
"간사한 자로 지목되면 장차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명백히 알리셔야 합니다."
그들은 조광조를 건드리는 순간, 유생들의 공격을 받아 후세에 간신으로 기록될 걸 알고 있었다.
조광조는 조선 사대부들에게 그 정도의 '슈퍼스타'였다.
중종이 죽기 전부터 조광조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중종의 아들 인종은 죽기 전날,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대신 등에게 전교하기를,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늘 마음 속에서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하고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병이 위독하여 날로 더욱 심해져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뒤미처 인심을 위로하니, 조광조 등의 벼슬을 일체 전일의 중의(衆議)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하겠다."』 (《중종실록》 1545년 6월 29일)
선조 1년(1568년), 조광조는 마침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건 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했다.
그런 사람을 중종이 제 뜻대로 판단하여 죽였다면, 그건 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 된다.
하여 선조로써는 간신들의 농간에 조부(중종)의 판단이 흐려져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선조가 조광조에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면서 내린 전교에 이런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전교하였다. "죽은 대사헌 조광조는 세상에 드문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품으로서 사우(師友) 연원(淵源)의 전수를 얻었고 도학을 드러내 밝혀 세상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간사한 남곤·심정·이항 등이 평소 공론에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홍경주와 결탁하고 불칙한 말로 교묘하게 허물을 꾸며 임금이 듣고 놀라게 하여 끝내 귀양보내 죽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기를 여지없이 깎아 없앴으니, 이것은 실로 간신들의 공갈과 무함에 몰리었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중종의 본심은 아니었다..."』 (《선조실록》 1568년 4월 11일)
난 조광조 제거가 중종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일을 밀어붙였던 건 중종이었다.
즉위 후 중종은 자기 뜻대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조강지처 신씨를 내보내야 했고, 총애했던 경빈을 왕비의 자리에 앉히지도 못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 복성군도 세자로 만들지 못했다.
1506년 허수아비 왕이 된 이래, 처음으로 제 뜻대로, 그것도 강하게 밀어붙였던 일을 두고 그게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니...
그리고 하나 더, 왜 사림 세력들은 남곤과 심정을 희대의 간신으로 콕 집었을까?
남곤은 그나마 홍경주가 포섭하기라도 했지만, 심정은 그런 기록도 없다. 그는 기묘사화에서 큰 역할을 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곤과 심정은 사림 세력을 한번 배신한 적이 있어, 이미 배신자로 낙인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