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조광조가 정국공신(靖國功臣) 명단에서 공이 없는 이들을 삭제하려고 하자 남곤, 심정 등 공신 세력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중종을 미혹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중종이 끌어들여 기묘사화를 주도한 대신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종이 가장 먼저 조광조 제거의 뜻을 내비친 홍경주부터 살펴보자.
홍경주는 1등 정국공신이었으며, 명단 삭제 대상이 아니었다.
중종이 홍경주로 하여금 기묘사화를 계획하도록 한 이유를 난 다른 데서 찾는다.
기묘사화 당일의 기록을 살펴보자.
『윤자임이 크게 외쳐 말하기를, "공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니,
이장곤 등이 답하기를, "대내(大內)에서 표신(標信)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왔소." 하였다.
윤자임이 말하기를, "어찌 정원을 거치지 않고서 표신을 냈는가?" 하고,...』 (《중종실록》 1519년 11월 15일)
『윤자임이 성운에게 외치기를, "승지가 되었더라도 어찌 사관(史官)이 없이 입대할 수 있겠소?" 하고, 주서 안정을 시켜 성운을 말리게 하였다.
안정이 말하기를,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관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소." 하고, 드디어 성운의 띠를 잡고 함께 들어가려 하였으나, 성운이 안정의 팔을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문을 지키는 5∼6인이 안정을 밀어냈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15일)
실록의 기록에서 무얼 알 수 있는가? 당시 승지, 사관 등이 사림 세력으로 친 조광조파 인물들이며, 이들이 사실상 중종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조광조 측 인물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중종이 편전으로 남곤 등을 불러다 놓고 조광조를 축출하라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임을 감안하면, 중종이 왜 홍경주에게 가장 먼저 그의 뜻을 전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홍경주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였다. 중종이 승정원의 눈을 피해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중종이 홍경주에게 밀지를 내렸던 것이다.
『임금이 더욱 의구하여 홍경주에게 여러 번 밀지를 내렸는데, 그 밀지에는 글의 뜻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고 언서를 섞은 것도 있으므로 이제 기록하지 않으나 그 대개는 이러하다.
"임금이 신하와 함께 신하를 제거하려고 꾀하는 것은 도모(盜謀)에 가깝기는 하나, 간당(奸黨)이 이미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하여 제재하기 어려우니, 함께 꾀하여 제거해서 종사(宗社)를 안정하게 하려 한다..."』 (《중종실록》 1519년 12월 29일)
밀지를 통해 중종의 뜻을 알게 된 홍경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들을 떠올렸다. 중종이 대상을 찍어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홍경주가 접촉한 인물이 남곤과 김전이었다.
남곤과 김전 모두 애초부터 정국공신 명단에 올라있지 않았다. 즉, 이들 역시 삭제 대상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남곤은 1507년 고변의 일로 이미 조광조 등과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김전 역시 조광조 일파의 행태에 불만이 컸다. 조정에서 이를 대놓고 얘기한 적도 있었다.
『김전이 아뢰기를, "삼공과 대간이 상의하여 서로 도우면 국사가 잘되어 가고 조정도 화목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대간이 일을 논하는데 대신의 소견이 조금만 다르면 반드시 다르다고 하여 그르게 여깁니다...
요즈음 저 사람들의 소견을 보면 바르기는 하나 폐단을 일으킬 것을 헤아리지 않거니와, 어떻게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남이 반드시 같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17년 10월 8일)
실질적으로 기묘사화를 추진한 3인, 홍경주·남곤·김전 모두 공신 명단 개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닌데, 불만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결국 그들이 공신 명단 개정에 불만을 품고 중종을 부추긴 게 아니라, 중종이 시켜서 한 일이란 뜻이다.
그러면 중종은 왜 뜬금없이 조광조를 제거하라고 시켰을까?
내 생각에 조광조 등의 정국공신 개정 요구가 중종으로 하여금 '아, 더 이상 이것들을 가만두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 명단 개정을 요구했던 것은 1519년 10월 25일, 기묘사화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대사헌 조광조·대사간 이성동 등이 합사로 아뢰기를, "정국 공신은 세월이 오래 지나기는 하였으나, 이 공신에 참여한 자에는 폐주의 총신이 많은데, 그 죄를 논하자면 워낙 용서되지 않는 것입니다. 폐주의 총신이라도 반정 때에 공이 있었다면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이들은 또 그다지 공도 없음에리까! 대저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내고 이(利)를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으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지게 하려면 먼저 이(利)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성희안은 그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으나, 유자광이 제 자제·인아(姻婭)를 귀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였으니, 대저 이것은 전혀 소인(小人)이 모의에 참여하여 만든 일입니다. 지금 상하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때에 이(利)를 앞세워 이 일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 할 수 없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아래는 2등·3등 중에서 더욱 개정할 만한 자이므로 서계합니다. 【2등은 유순·운수군 이효성·운산군 이계·덕진군 이활·이계남·구수영·김수동, 3등은 송일·강혼·한순·이손·정미수·박건·김수경·윤탕로·신준이다.】
4등은 50여 인인데, 다 공이 없어 함부로 기록된 자입니다. 이우 등은 다 이미 훈적에서 삭거하였으니 이들도 삭거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중종실록》 1519년 10월 25일)
중종이 공신 명단 개정 과정에서 열받을 만한 포인트는 두 개가 있다고 본다.
먼저 삭제 대상. 조광조가 공신 명단에서 삭제할 대상으로 지목한 인물들 중에서, 중종이 명단에서 삭제하길 거부했던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윤탕로는 지친인 사람이므로 말하기 어려울 듯하나, 박원종이 매양 말하기를 ‘윤탕로는 몰래 모의해 온 지 이미 오래므로 1등에 기록될 만한데 마침 명을 받고 외방에 나가 있었으므로 3등에 기록되었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번에 표를 붙이지 않았다.
운산군이 그날 거사에 참여한 것은 내가 친히 보았다. 홍경주는 그때 승지가 되었으므로 그 공을 모를 것이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이 대목에서 중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박원종이 윤탕로의 공을 인정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중종이 박원종에게 부탁해서 공신 명단에 밀어 넣었다.
『전교하기를, "형조 참판 윤탕로는 거사할 때 비록 밖에 있어서 모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잠저에 있을 때부터 본디 배종한 수고가 있으니, 녹공하는 것이 어떠한가?"
삼공 및 유자광·신준·구수영·김감·정미수·유순정·성희안이 회계하기를, "거사할 때 탕로는 마침 밖에 있었기 때문에 미처 오지 못하였으나 추대하려는 마음은 반드시 다른 이의 배였을 것입니다. 하물며 주상의 잠저 때 배종한 공이 있으니, 녹공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탕로는 정국 3등에 기록하라." 하였다. 【탕로는 상의 외숙이다.】』 (《중종실록》 1506년 9월 17일)
기록의 마지막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윤탕로는 바로 자순대비의 남동생, 중종의 외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종이 거사에 참여한 걸 직접 봤다고 하며 제외하길 거부했던 운산군 이계, 이 자는 윤탕로의 장인이다.
그런 사람을 계속 공신 명단에서 파내자고 하니, 불만을 품었던 이는 홍경주나 애초부터 공신도 아니었던 남곤, 김전 등이 아니라 중종이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중종이 직접 나서서 실드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결국 이들을 모두 제외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는 대놓고 중종을 개무시한 처사나 다름없다.
두 번째, 조광조가 공신 명단 개정을 요구했을 때 대신들의 행동이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국공신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광조가 갑자기 꺼냈던 것이 아니었다. 중종 즉위 초부터 꾸준히 나왔다.
『대간이 합사하여 소를 올리고,... 그 소의 대략에, "반정하던 날 넋을 잃고 간담이 떨어져, 혹은 울부짖으며 합문 밖에 넘어지기도 하고, 혹은 엉금엉금 기어서 흙탕물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겁에 질려 도망쳐 숨기도 하였고, 혹은 대사가 이미 정해진 뒤에 오기도 했고, 혹은 무슨 일인지 몰라와서 묻기도 하고, 혹은 시위(試圍)에 들어갔다가 일이 정해지자 비로소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있다가 문이 열린 뒤에 들어오기도 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며 공신에 기록되기를 애원하기도 하고, 혹은 진흙에 꿇어앉아 애걸하기도 하는 등, 온갖 추태가 다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 그 공신의 반열에 들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07년 11월 30일)
내 생각에 사림 세력이 정국공신 명단 개정을 끊임없이 요구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유자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불구 대천의 원수인 유자광이 정국공신 1등에 오른 것도 모자라, 그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아무런 기여가 없음에도 명단에 밀어 넣어 나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을 그들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종의 거부 논리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비슷했다.
1507년 중종이 공신 명단 개정을 거부하면서 대간에 내린 전교가 실록에 전한다.
『대간에 전교하기를, "정국 공신을 녹훈할 때 공로가 있고 없던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그 때에 대신이 어찌 요량하여 하지 않았겠는가? 정난 공신은 또한 전례를 따라서 하였고, 음가(蔭加) 역시 고례가 있다."』 (《중종실록》 1507년 12월 1일)
조광조가 정국공신 명단 개정을 요구한 날, 그 자리에서 중종의 대답이 이러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공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하고서 뒤에 개정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중종실록》 1519년 10월 25일)
내 생각엔 핑계가 맞다. 수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그걸 하려 마음만 먹으면야 못할 일도 아니었다.
즉, 명단 개정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다. 안한 이유가 무어냐고? 뻔하지 않은가?
유자광이 가장 많이 밀어 넣었겠지만, 박원종 등 반정 주요 인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자기 사람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당장 중종도 외삼촌 윤탕로와, 그의 장인 이계를 명단에 밀어 넣지 않았던가!
아무튼, 조광조 등이 명단 개정을 요구하고,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당연한 수순으로 대간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이에 더해, 홍문관, 승정원까지 모두가 나서서 중종을 압박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결국 대신들이 나섰다.
『영의정 정광필·우의정 안당·좌찬성 이장곤·좌참찬 이유청·우참찬 이자가 아뢰기를, "정국 공신은 이미 삽혈 동맹하였으니, 이제 추개(追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간이 논한 지 이미 오래고 사직하기에 이르렀으니, 4등 중에서 물론(物論)이 시끄러운 자만을 특별히 재량하여 줄이게 하소서. 그러면 공론이 진정되고 조정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중종실록》 1519년 11월 2일)
정광필 등은 중종에게 타협책을 제시했다.
공신 명단을 고치지 않는 것이 옳지만, 대간들이 전부 사직하고 조정이 마비 상태니, 4등 공신 중에서 문제가 많은 인물들을 선정하여 개정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중종도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1주일이 지난 11월 9일, 중종은 명단에서 삭제할 사람들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임금이 유순·김감·구수영·강혼·정미수·이손·변준·유홍·성율·이성언·문치·서경생·김계공·김숙손·김은·임원산·권균·김준손·이곤 등의 이름에 황표(黃標)를 붙여서 내리고서 전교하기를,...』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그리곤 대신들과 조광조 등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영의정 정광필·우의정 안당·우찬성 이장곤·좌참찬 이유청·우참찬 이자·대사헌 조광조·대사간 이성동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표를 붙인 이 사람들도 죄다 제거할 것은 없다. 대간도, 폐조 때에 귀염받은 사람이 많이 기록되었으므로 그런다고 한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그 자리에서 중종과 대신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중종이 윤탕로와 운산군 이계를 감싸고 나온 것도 이때이다.
결국 조광조가 나섰다.
『임금이 한참 동안이나 답하지 않으매 조광조가 아뢰기를, "이렇게 하면 결단할 수 없습니다. 물러가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아래의 기록이 뒤이어 등장한다.
『정광필 등이 빈청에 가서 공신 중에서 삭제할 자를 단자(單子)로 써서 아뢰기를, "운수군 이효성·유순·김수동·김감·운산군 이계·이계남·구수영·덕진군 이활 【이상은 2등이다.】 과 신준·정미수·박건·송일·강혼·한순·이손·김수경·윤탕로·유경·장온·이석번 【이상은 3등이다.】 및 4등 전부입니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중종으로써는 정광필 등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낮에 이미 반복하여 일렀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소요하는가? 죄다 개정해야 한다면, 대신들이 처음부터 어찌하여 죄다 개정하기를 청하지 않았는가? 대신이 어려워한다면 내가 짐작해서 결정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승지를 불러서 이르기를, "윤탕로의 일은 박원종이 공언(公言)한 것이고, 내 사의(私意)가 아니다. 이석번 등은 당초의 논의에 나오지 않았었고, 운수군도 4등에 두어야 마땅하며, 그 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가려서 표를 붙이는 것이 옳다." 하매,
정광필 등이 아뢰기를, "2∼3등은 다 서로 같습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제 가려서 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저 대신에 대하여 임금은 한 마디 말일지라도 반드시 믿어야 하는데, 전에는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개정하자고 청하고서 이제는 죄다 개정하자고 청하니, 대신의 말이 어찌하여 전후가 다른가?"』 (《중종실록》 1519년 11월 9일)
이때 대신들, 특히 영의정 정광필이 보여준 행동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조정 생활을 오래 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행동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분명 정광필은 1주일 전에 중종에게 4등 공신 중에서 공이 없는 일부를 제외시키라는 타협책을 제시했고, 그걸 받아들인 중종이 고심 끝에 삭제 명단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런데 그걸 두고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는 중종의 편을 들지 않고 조광조를 편들었다.
이건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다.
이 순간 중종이 느꼈을 생각을 추측해 보자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
'뭐야 이거? 국왕의 말은 개무시하고 조광조를 편들어? 미친 거 아냐?'
중종에 머릿속에 이 생각이 떠오른 순간, 조광조의 운명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중종이 조광조를 날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신하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추진하는 것도 모자라 위상마저 그를 넘어선다? 이걸 놔둘 국왕은 없다.
그래서 중종은 홍경주를 통해 남곤, 김전 등을 끌어들여 기묘사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는 중종이 조광조를 날린 이유는 설명이 되지만, 죽일 필요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지금부터는 중종이 조광조를 날리는 데 그치지 않고 죽여야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겠다.
조광조가 조정에 출사한 것은 1515년이었지만, 처음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1511년의 일이었다.
『검토관 공서린이 아뢰기를, "성균관이 천거한 유생 조광조는 그 마음과 행실이 다른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있어서 특별히 천거를 받았으니, 이는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간·시종이 함께 아뢰기를, "아직 서용하지 말자는 것은 그 덕을 쌓아서, 다른 날 크게 쓰일 인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특별히 포상하는 글을 내리시어 권장하소서. 그렇게 하면 선비들이 많이 근면 정려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511년 4월 18일)
이때의 일이 중종과 조광조가 각각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종은 '조광조가 사림들의 기대주로군. 나중에 쟤를 통해 사림 세력들을 끌어들이는 데 써먹을 수 있겠어.',
조광조는 '언젠가는 조정에 나가 내 뜻을 펼칠 수 있겠군. 어떻게 해야 저 썩어빠진 무리들을 처치할 수 있을까?'
1515년 장경왕후 사후, 대신들에 의해 다시 한번 경빈을 중전에 자리에 앉히는 데 실패한 중종은 아껴두었던 조광조 카드를 꺼냈다.
그의 벼락출세는 그런 차원에서 봐야 설명이 된다.
조광조는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 그해 11월 사간원 정원, 1516년 3월 홍문관 부수찬 및 수찬, 1517년 2월 홍문관 부교리, 그해 윤12월 홍문관 직제학, 1518년 5월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519년 5월 대사헌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중종이 시켜준 것이라곤 해도, 같은 편이라 하여 저런 벼락출세를 하는 동안 태클 걸지 않았던 대간도 문제가 있다.
대간이 얼마나 집요하게 심정의 발목을 잡았었는지를 떠올려 보라. 이런 행태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가?
조광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중종과 사림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지만, 어떻게 불과 4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 정도로 조정을 장악할 수 있단 말인가?
조광조는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다 이뤄냈다. 현량과를 시행하여 사림 세력들을 곳곳에 심어 놨으며, 대간을 장악, 대신들을 탄핵하여 오히려 대신들이 그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난 이것이 1511년의 일을 통해 언젠가 조정에 나갈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조광조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강직한 선비가 이상을 좇아 벌인 일이라고? 난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광조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중종의 뜻에 반하는 일을 아랑곳 않고 밀어붙여 성사시켰던 것이다.
공신 명단 개정도 이미 1517년에 한 번 요구했었다.
그때도 중종은 개정을 거부했으나, 대간이 파직하고 대신들마저 이에 동조하고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정난공신을 개정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었다.
『시독관 조광조는 아뢰기를, "정국 공신을 의정할 때 작상(爵賞)이 외람하게 되어 공리의 길이 한번 열렸기 때문에 이과도 따라 간사한 꾀를 낸 것이요, 상산군이 고변한 일도 전연 적확하지 못했으며, 요사이 유담년을 무고한 일도 모두 공리를 바라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꾀를 낸 것입니다. 지금 그 근원을 막지 못하여 사람들이 한갓 공리가 있는 것만 알고 의리가 중한 것임을 알지 못하게 된다면 말류의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중종실록》 1517년 2월 26일)
『영의정 정광필 등이 육조 참의 이상을 거느리고 와서 아뢰기를, "대간은 기강(紀綱)이 매인 곳으로 하루도 없을 수 없는데, 합사하여 사직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습니다. 기강이 해이되면 폐단이 장차 적지 않을 것이오니 시급히 통쾌하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난 공신을 비록 옳다 그르다 하지만,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고치기가 너무도 어렵지 않은가? 평소에 하찮은 것이라도 주었다가 도로 빼앗는 것은 오히려 옳지 못한데, 하물며 공에 대한 상이겠는가. 그러나 온 조정이 모두 고쳐야 한다고 하니, 내가 스스로 결단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구는 마땅히 고치고 누구는 마땅히 고치지 않아야 할 것인지를 모두들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중종실록》 1517년 3월 24일)
여기까지만 해도 중종 입장에서는 조광조를 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치적 거물로 성장한 조광조는 중종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긴커녕, 기존 대신들처럼 중종을 얕잡아보는 모습을 보였다.
난 중종이 조광조를 죽인 이유가 여기에서 오는 배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대신들은 냉정히 얘기하면 중종이 키워준 게 아니었다.
반면 조광조는? 중종이 아니었다면 그 위치에, 그렇게 빨리 올라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마음먹고 제대로 밀어줬던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조광조 역시 중종을 얕잡아보고 무시하니, 저 순간 중종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려버렸던 것이다.
중종과 대신들 간에 격론이 벌어진 다음날, 조광조가 다시 면대를 청해 중종을 마주했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대신이 다들 옳지 않게 여기는데 임금의 뜻을 고집하시니, 아마도 임금의 뜻이 치우치게 매인 곳이 계신 듯합니다." 하고,
이성동이 아뢰기를, "성려(聖慮)에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매인 사의(私意)가 계시다면 크게 두려운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19년 11월 10일)
조광조의 발언이 어떻게 들리는가? 그의 발언에서 국왕 중종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가?
난 느껴지지 않는다. 중종 역시 기분이 나쁘니,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남곤과 심정이 중종에게 조광조를 죽이라고 강력히 청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오히려 남곤은 유배면 충분하다고 말리려 했고, 심정조차도 중종이 계속 사형을 고집하자 마지못해 동조했을 뿐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근본만 주벌하면 그 무리가 절로 그쳐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간이 여러 번 궐정(闕庭)에 와서 분분히 아뢰어 마지 않으니 사람들이 위구할 것이며 대간이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리려는 것은 옳지 않다. 조광조 등은 율문에 따라 명정(明正)하게 죄를 다스려야 하겠다."...
남곤이 아뢰기를, "임금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유배에 처해야 하고 대죄(大罪)를 가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옛말에 ‘송나라 백 년 동안에 조사(朝士)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이 근본을 배양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즉위하신 이래로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처형된 자가 없었는데 조광조 등은 비록 불초할지라도 전에 시종이었으니 율문대로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심정이 아뢰기를, "당나라 때에 왕비·왕숙문 등이 붕당을 지어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혔으나, 모든 사람이 다 면하고 왕비만이 사사되었습니다. 이제 죄다 사죄를 가한다면 성덕에 누가 될 듯하니, 그 괴수만을 다스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종실록》 1519년 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의 사형을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나는 그 이유가 중종의 다음과 같은 감정의 폭발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조광조... 내가 그토록 밀어줬건만, 결국 너도 날 무시해? 말 안 듣고 무시하는 대신 놈들한테 질려서 기껏 키워줬더니만, 보자 보자 하니 그놈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구나.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저 자리에 갈 수 있었을 성싶으냐? 네놈이 제일 나쁜 놈이다, 조광조!'
영화 '달콤한 인생'의 유명한 장면을 다시 써먹을 순간이 왔다.
(조광조)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중종)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