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즉위 이듬해인 1507년 윤 1월, 반정 공신 박원종과 유자광에게 불만을 품은 일부 사람들이 그들의 제거를 도모했다.
『공조 참의 유숭조가 아뢰기를, "이 달 초에 (김)공저가 신의 집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좌상(박원종)이 전왕의 나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고 또 빈객 접대를 좋아한다. 그리고 유자광이 공을 논할 때 그 고향 사람들을 많이 참록(參錄)하였는데, 그 날 시위 군사 중에 참여 못한 자들이 모두 분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별의 변괴가 있으니 변고가 생길까 염려된다.’ 했고,
이달 15일께 공저가 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박·유 두 정승이 지금 마음대로 방자하니 광망한 무리들이 공격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5일)
관련된 자들을 잡아와 국문하니, 실제로 그런 모의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일을 논의한 자들이 처벌받았다.
『추관들이 함께 의계하기를, "박경·김공저 등은 대신을 모해하여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참형을 하여야겠습니다. 이장길은 박경·김공저의 수종(隋從)이 되었으니 아주 먼 변방에 정속(定屬)하여야겠습니다. 이계맹·유숭조는 박경·김공저의 음모를 알고서도 고하지 않았으니, 고신을 다 추탈하고 먼 지방에 부처하여야 하겠습니다. 정미수·김감은 김공저가 대신을 모해하는 말을 듣고서도 고하지 않았으니, 고신을 다 추탈하고 외방에 부처하여야 하겠습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7일)
고변이 있던 다음 날인 윤 1월 26일,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은 이들의 명단 속에 조광조의 이름이 보인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조광조는 공술하기를, "7∼8일쯤 전에 신이 문서귀의 집에 갔는데 서귀가 신을 만류하여 함께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신을 데리고 박경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귀가 조광보가 하던 말을 가지고 경에게 말하기를, ‘과연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경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큰일을 하려는데, 병권을 잡은 자가 없으니, 일이 장차 잘 안 될 것같다. 이계맹이 이 일을 유순정에게 말하려 하였으나, 형편이 어려워 못하였다. 정미수·김감·김공저·이장길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김공저는 유숭조에게 말하기도 하였으며, 남곤은 이 사실을 듣고서 놀라고 두려워한다.’ 하였습니다. 그 밖의 다른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6일)
조광조 진술의 마지막 대목, "남곤은 이 사실을 듣고서 놀라고 두려워한다."에서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이 사건을 고변했던 사람 중에는 남곤도 있었다.
『상인(喪人) 남곤이 광화문 밖에 와서 정원에 전언하기를, ‘아뢸 일이 있어 감히 문밖에 왔습니다.’ 하고, 흰옷에 갓을 쓰고, 정원에 나와 아뢰기를,
"어제 심정이 우리 집에 와서 말하기를, ‘김공저가 영공을 와서 뵈었는가?’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보름께 와서 보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심정이 말하기를, ‘공저가 특별히 말한 것은 없는가?’ 하므로, 신이, ‘없다.’고 답하니,
심정이 말하기를, ‘공저가 이장길 등과 상의하고, 조정에 있는 1품 재상으로 장수를 삼아, 가만히 박·유를 습격한 뒤 정사를 도우면 성군이 치세를 이룰 수 있다 하더라.’하고, 또 김공저가, 조정에 있는 명사의 반은 우리 편에 들었고, 전번에 이 뜻을 남곤에게 은밀히 표시하였으나, 곤이 이렇다 할 대답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 왔다고 하더라.’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들으니 놀랍기 이를 데 없어, 자세히 물으려 하였으나, 마침 다른 객이 와서 정이 가겠다 하므로, 신이, ‘다시 오지 않겠는가?’ 하니, 정이 ‘내일 오겠다.’ 하고, 오늘 아침에 또 왔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 군은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서귀가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대가 이 말을 듣고서 어찌하여 지금까지 아뢰지 않았는가?’ 하니, 정이 대답하기를, ‘오늘 김극성과 함께 아뢰기로 의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의 말을 듣고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5일)
실록에는 유숭조가 아뢴 것이 남곤에 앞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유숭조가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알렸는데, 왜 고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았단 말인가?
『"이계맹·유숭조는 박경·김공저의 음모를 알고서도 고하지 않았으니, 고신을 다 추탈하고 먼 지방에 부처하여야 하겠습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7일)
이 사건을 고변했다고 하여 상을 받은 건 남곤, 심정, 그리고 김극성이었다.
『"그리고, 고발한 자 심정·김극성·남곤 등은 논상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7일)
이것이 역사 기록을 읽을 때 의심을 해봐야 하는 이유다.
뭔가 합리적이지 않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실록을 다시 살펴보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참찬관 홍경주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심정 등이 김공저의 일을 문서귀에게 듣고 미친 말이라고 여겨, 성희안을 가서 보고 논의할 때에 유자광이 마침 이르니, 심정 등이 자광이 들을까 두려워서 다시 의논하지 않았다 하니,...
이 날 저녁에 심정 등이 또 남곤의 집에 가서 상의할 때에 김공저·박경 등이 또 왔는데, 심정이 곧 말을 그치고서 나갔습니다. 또 유숭조가 남곤의 집에 가니, 남곤이 공저의 일을 귓속말로 하였는데, 숭조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곤이 말하기를, ‘자네는 또한 공저에 사련(辭連)되었는데,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숭조가 곧 위에 아뢰고자 하여 바로 대궐에 나가니, 남곤이 숭조가 대궐에 나갔다는 말을 듣고, 먼저 고하여 화가 자기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곧 심정과 함께 고변하였는데,..."』 (《중종실록》 1507년 9월 13일)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 세력들이 남곤과 심정을 어떻게 여겼겠는가?
사림들을 팔아넘기고 포상을 받은, 간사한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에 더해, 사림들이 남곤과 심정에 대해 악감정을 갖게 된 이유가 또 있다.
박경·김공저 등이 거사를 도모하려 해치려 했던 인물은 박원종과 유자광이었다.
『김식은 공술하기를, "이때 (박)경이 말하기를, ‘유자광은 무오년의 난을 일으킨 자이고 박원종은 이욕에 분주하니, 이 두 사람을 제거하고, 정미수로 정승을 삼아야 하겠다. 김감·이계맹 역시 큰 소임을 맡길 만하다.’ 하였으며,..."』 (《중종실록》 1507년 윤1월 26일)
유자광이라면 연산군 치세, 무오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 인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던가?
당시 사림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대간이 가자한 일을 아뢰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설령 박경 등이 대신을 모해하려 했다 하더라도, 유자광이란 자는 성종조에서부터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혀 간흉이라 일컬어져 사람들이 다 분하게 여기는데, 비록 제거된다 하여도 족히 애석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중종실록》 1507년 8월 23일)
『대사헌 민상안이 아뢰기를, "심정·남곤·김극성 등은,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 아닌데, 문서귀와 더불어 앞을 다투어 고소하여 공을 바라니, 선비의 기풍이 심히 아름답지 못합니다... 남곤 등의 상직은 진실로 줄 수 없는 것이니, 추탈하소서."』 (《중종실록》 1507년 8월 24일)
사림들의 생각을 쉽게 풀어보면, 이 정도 되겠다.
'박경·김공저의 일은 왕을 바꾸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자광은 죽어 마땅한 간신 놈에 불과하다. 그런 걸 고변했다고 상을 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남곤! 심정! 소인을 죽여 원수를 갚는 데 힘을 보태진 못할망정,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 버러지 같은 것들!'
흔히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남곤과 심정이 소인임을 알아채고 그들을 혐오하자, 이에 악감정을 품게 된 남곤과 심정이 중종에게 조광조 등을 모함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선조실록》 1568년 9월 21일)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건 거짓말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봤을 때,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이 이 고변을 이유로 남곤과 심정에게 악감정을 품고 지속적으로 딴지를 걸었다.
둘 중에서도 더욱 사림의 미움을 받은 것은 심정이었다.
그의 경우,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대간에서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이조 참판 심정은 출신한 지 오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인물도 전조에 적합하지 않으니, 빨리 개차하소서."』 (《중종실록》 1514년 11월 2일)
『간원은 아뢰기를, "판윤 심정은 마음씀이 간사합니다. 판윤의 직은 육경(六卿)과 마찬가지니, 이 같은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속히 체직하소서."』 (《중종실록》 1518년 12월 13일)
『대사간 박호와 지평 박훈이 심정의 일을 아뢰니,... 박호는 아뢰기를, "판윤과 육경 등은 사림이 모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쓸 수가 없습니다. 비단 판윤뿐 아니라 특진관에도 적당치 않으니, 모두 고치소서."』 (《중종실록》 1519년 1월 21일)
내 생각에 심정이 남곤에 비해 더 미움 받은 이유는 출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남곤은 김종직의 직계 제자였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 동문이니, 조광조에게 있어 남곤은 사숙(師叔)인 셈이다.
반면 심정은 스승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1507년 거사 모의에 있어서도 남곤에게는 김공저가 직접 찾아와 포섭하려 했으나, 심정은 그렇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심정은 모의를 계획한 이들과 그다지 친분 관계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507년의 고변은 문서귀를 통해 거사 계획을 알게 된 심정이 주도했다.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계획에 연루된 바도 없으니, 심정은 별로 거리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심정은 고변하러 가기 전, 돌연 남곤을 찾아갔다.
심정이 왜 굳이 남곤을 찾아갔는지,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남곤을 떠봄으로써 거사 계획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남곤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걸까?
한편, 심정이 찾아왔던 그날 밤이 아마 남곤의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밤이었을 것이다.
심정이 조정에 가서 고변하면, 그 역시 다른 이들처럼 계획을 알고도 묵인한 자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심정과 함께 고변에 나서자니, 지 혼자 살겠다고 사림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게 뻔했다.
밤새 고민했던 그에게 결정적 한 방은, 유숭조가 궁궐로 향했다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걸 안 순간, 그는 결국 심정과 함께 거사를 고변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상태에서 기묘사화마저 발생했으니, 아무리 홍경주가 남곤 등이 참언한 게 아니라 중종의 뜻이었다고 말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조광조부터가 자신의 죽음이 저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다.
『의금부 도사 유엄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지고 이르니,... 누가 정승이 되었고 심정이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가를 물으매 유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조광조가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 없소.’ 하였다. 아마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 당로에 있으므로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는 뜻이겠다.』 (《중종실록》 1519년 12월 16일)
남곤과 심정에 대한 사림의 악감정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이 시강하다가 기묘유현 조광조에 언급되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광조가 임금을 만난 것은 천 년에 한 번이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하겠는데 결과가 없고 말았으니 천고의 한입니다. 남곤·심정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정광필이 정승에서 체직된 후 남곤이 수상이 되어 제현(諸賢)들이 차례로 죽어갔습니다."』 (《현종실록》 1669년 1월 5일)
『정언 송성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체로 그가 핑계대고 장난하며 임금을 속이는 것은 정동준과 비슷하고, 날뛰면서 세력을 믿기는 홍국영보다 지나치며, 허황된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기는 윤행임보다 심하고, 훌륭한 부류를 모함하여 밀어넣는 데는 남곤·심정과 너무나 비슷하고,..."』 (《순조실록》 1830년 6월 7일)
사림의 비난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남곤과 심정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남곤은 의연히 받아들였다. 홍경주가 중종의 뜻을 전해왔을 때 그가 했다던 말, "임금의 뜻을 안다면 후세에서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하더라도 진계하련다."이 그것을 보여준다.
반면, 심정은 강하게 반발했다. "천감은 밝으실지라도 사방에서 듣고 후세에서 전하는 것은 어찌 신에 대하여 의심이 아주 없겠습니까?... 옥에 나아가 발명하여 이 수치를 씻게 하여 주소서."
남곤과 심정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킬 빌 2'가 떠오른다.
빌(데이비드 캐러딘)을 비롯한 '데들리 바이퍼' 멤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키도(우마 서먼)를 바라볼 때, 빌의 동생 버드(마이클 매드슨)의 표정은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훗날 키도가 원수들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빌이 버드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했다.
"과거를 잊을 순 없을까? (Can't we just forget the past?)"
이에 대한 버드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녀는 복수할만하지, 우리는 죽을만하고. (That woman deserves her revenge, and we deserve to die.)"
이 장면을 남곤과 심정에게 대입해 보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심정) "아니, 예전에 한번 잘못한 거 가지고 언제까지 괴롭힐 건데?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남곤) "이봐, 그냥 받아들여. 우리가 예전에 걔네들 배신한 건 맞잖아? 걔네는 그럴만하지."
나는 이것 역시 앞서 설명한 남곤과 심정의 출신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남곤은 자신의 동문들을 고변했기에,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심정에 비해 훨씬 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곤의 유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임종할 때 평생 동안의 초고(草稿)를 모두 불사르고, 이어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 했고, 또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를 청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 했다.』 (《중종실록》 1527년 3월 10일, 남곤 졸기)
나는 이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다’는 대목을 이렇게 해석한다.
심정을 따라 했던 고변도, 중종의 뜻을 따랐던 기묘사화도, 남곤은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모든 정치적 선택들은 결국 그에게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다. 조광조가 죽었을 때다.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의 죽음은 정광필이 가장 상심하여 마지 않았으며, 남곤까지도 매우 슬퍼하였다.』 (《중종실록》 1519년 12월 16일)
남곤은 1527년 3월, 작서의 변이 벌어지기 한 달 전에 사망했다.
홀로 남은 심정의 불안감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이 기록이 뭘 의미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심정이 이미 사림에 화를 꾸며 공론에 죄를 얻자 스스로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동궁의 후일의 지위를 굳히려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26일)
심정의 머릿속엔 1507년의 일로 사림 세력에 찍혀 있던 와중에, 그들의 절대 존엄 조광조마저 계략을 꾸며 보내버렸다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고 나니, 이대로 있다간 제 명에 죽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윤여필을 통해 '작서의 변'에 대해 알게 되고는 이번 기회에 인종과 문정왕후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총대 메고 나섰던 게 아닐까?
그런데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말처럼, 그는 '작서의 변'을 처리하는 와중에 또다시 경빈과 결탁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심정, 어찌 보면 '프로억울러'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