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10)

by Loxias

* 작서(灼鼠)의 변(變) (6)


마지막으로, 경빈과 복성군의 최후에 대해 알아보자.

작서의 변 6년 후인 1533년, 이번에는 '가작인두(假作人頭)의 변'이 발생했다.

『동궁의 빈청 남쪽 바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이 있었습니다. 전체를 종이에 싸바르고 머리카락과 눈·귀·코·입을 분명히 새겨 목패(木牌)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목패의 양쪽 면에 모두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한 쪽에 석줄씩 나누어 썼습니다. 거기에 쓰인 말은 모두가 흉역스럽고 부도한 말로 입으로 형용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목패의 1면에 석 줄로 나누어 쓴 글에 ‘이와 같이 세자의 몸을 능지(凌遲)할 것. 이와 같이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이와 같이 중궁을 참할 것.’이라 했고, 또 1면에 쓴 글에는 ‘5월 16일 병조의 서리 한충보 등 15인이 행한 일임.’이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17일)


확인해 보니, 한충보는 실제 병조의 군색 서리(軍色書吏)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전에 궁궐 서문에 화살이 꽂혔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한충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평 신거관이 한충보의 이름이 적힌 참서 단자를 받은 일도 있었다.

중종은 한충보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그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 위해 꾸민 일로 여겼다.

한충보를 불러 원한을 살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몇 명의 이름을 댔다.


언급된 이들에 대한 추국이 이뤄지는 가운데, 대간에서 이 사건을 동궁을 위해하기 위한 음사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작업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대간이 합사하여 아뢰기를, "지금 이 일을 보니 고금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따라서 철저히 추문해야 될 것이요, 애매한 사정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어제 동궁에 출입한 모든 차비인과 별감, 시강원의 서리와 하인, 동궁 근처의 각문을 수직하던 군사들을 모두 추국하게 하소서."』 (《중종실록》 1533년 5월 18일)


다음 날, 대간은 그들의 심중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의 화근, 경빈과 복성군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그들의 모계(謀計)는, 인심을 동요시키고 국본을 해침으로써 흉수(凶首, 경빈과 복성군)를 복귀시켜 뒷날 멋대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여지를 만들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흉악한 간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원망을 품은 독한 마음도 끝내 풀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동궁에서 발생하였으므로 그 화근의 소재를 역력히 알 수 있는데도 의심스런 사람을 억지로 정죄(定罪)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화근의 소재를 알았으면서도 모든 옥사를 한충보 등에게 돌려버린다면, 이야말로 간인(奸人)이 곁에서 엿보면서 남모르게 웃을 일입니다.

화근을 근본적으로 없애지 않는다면 변고의 발생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예측할 수 없는 화가 곧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속히 결단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소서."』 (《중종실록》 1533년 5월 19일)


중종은 경빈과 복성군을 죽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동궁 때문에 저지른 일이라면, 바로 동궁에다 하지, 무엇 때문에 여러번 다른 곳에다 저지르고, 그것이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뒤에야 동궁에다 저질렀겠는가. 더구나 크게 부도한 말만 썼을 뿐이 아니라 충보와 경종 일가(一家)의 이름까지 적어서 이 일을 저질렀는데야 말할 게 있겠는가...

화살을 쏘고 방을 붙이고 투서를 하는 등의 일은 과연 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경인년에 많은 사람이 죄를 받은 뒤부터 이런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만일 저들 【박씨의 부류들.】 이 한 짓이라면 정해년 이후 3∼4년 동안 어째서 이런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0일)


이때 유력한 용의자, 수견이 붙잡혔다.

『위관이 아뢰기를, "한충보에게 다시 혐의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말질비 【김형경의 처모.】 · 수견 【김형경의 처남.】 · 송허룡 【김형경의 사위.】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잡아오면서 가택을 수색해 보니 밑바닥이 없는 수통(水桶)이 있었습니다. 전일 빈청에 모였을 적에 본 목패가 물에 젖어 있었는데 이것이 통판(桶板)이었던 것 같았으므로 이제 의심이 나서 목수에게 그 목패를 살펴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뭇결이 물에 젖은 지 오랜 것으로 보아 필시 통판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술이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형경의 집에는 언문으로 된 편지가 있었으며, 그 편지의 사연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숨길 일이 뭐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추문하니, 궁내에 들어가 있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세(語勢)가 맞지 않았습니다. 초사에 나타났으므로 아울러 그 편지도 아룁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0일)


수견에 대한 추국이 이뤄졌고, 그 결과 범인들이 드러났다.

『위관 등이 아뢰기를, "이 일의 중죄자(重罪者)는 수견과 강손입니다. 수견은 ‘목패를 만든 나무는 바로 통판이다. 그 통판은 내가 바로 우리 집에서 내어다가 강손에게 주었다. 한쪽에 쓰인 한충보 등 15인의 일에 대한 것은 내가 썼다. 그러나 한쪽의 글은 나로서는 모르는 것으로 강손이 썼다.’고 했습니다. 한쪽에 쓴 것은 중한 말이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는 것 같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별감 이은석을 10여 차례 형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당성위 홍여의 집에 갔더니 ‘수견과 강손이 글을 가지고 대궐로 갔다. 네가 즉시 가서 살펴보라.’ 하기에 내가 즉시 대궐로 들어가다가 승문원 앞에서 수견과 강손을 만났다.

그래서 ‘너희들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이며 또 누가 지휘하는 것이냐?’ 하니, 수견과 강손이 ‘상전의 명령에 따라 목패와 인상(人像)을 동궁에 걸기 위해 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것을 거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으니, 수견 등이 ‘이는 동궁을 모해하기 위한 방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보모 효덕을 몇 번 형문하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견·강손과 같이 모의해서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박씨를 위하여 동궁을 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이들 네 명은 전부 능지처참(凌遲處斬)에 처해졌다.

『수견·강손·효덕·이은석을 능지처참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였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3일)


같은 날, 경빈의 사사가 결정되었다.

범인들이 그녀를 위해 인종을 해하려 벌인 일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에 중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삼공과 추관 등에게 의논하기를, "박씨가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박씨를 위해서 했다는 말이 있으니, 일의 형편상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3일)

『의녀 2인을 상주로 보내어 박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3일)


중종은 복성군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간인(奸人)들의 입에 오른 것은 박씨이고, 복성군은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먼 곳에 안치시켰으니 가벼운 것이 아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이 아들을 죽였다는 이름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중종실록》 1533년 5월 23일)

특히 이 말, '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이 아들을 죽였다는 이름을 가져서야 되겠는가?'는 아비로서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한 애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삼일 후인 5월 26일, 홍여가 국문을 받다 그만 죽어버렸다. 그는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간은 지속적으로 복성군을 죽일 것을 요구했고, 사실상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대간이 아뢰었다. "박씨의 흉모는 오로지 이미(복성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한 집안의 일인데 이미가 간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자(母子)의 흉모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어 작서의 변에서 드러났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흉모만 다 드러났을 뿐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초(供招)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미가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복주(伏誅)된 죄인들도 박씨만을 위해서 이런 흉모를 저질렀겠습니까. 박씨도 미가 없었다면 어떻게 엿볼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춘추법(春秋法)에도 수악(首惡)은 반드시 베어야 한다고 했으니 미가 천주(天誅)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33년 5월 26일)


결국 중종은 복성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전교하였다. "미에게는 사약을 내리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고, 김인경은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박수림·박인형·홍서주도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홍숙은 고신을 죄다 추탈하라. 이항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정광필은 체직하라."』 (《중종실록》 1533년 5월 26일)


실록은 이때 중종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미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상이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는데,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미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로 실어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중종실록》 1533년 5월 26일)


개인적으로 이 가작인두의 변 역시 조작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수견과 강손에 대한 추국이 벌어질 때, 중종이 그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전에 효정옹주가 궐내에 있을 적에 수견이 배노로 있었고, 그 뒤에는 숙노로 있었다. 그때 그 아비가 속신(贖身)시켜주기를 원했으나 박씨가 숙노로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금억(禁抑)하여 속신하지 못하게 했었으니, 원망을 품을 일이 없지 않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전교하기를, "이 10여 년 사이 옹주 【홍여의 아내임.】 가 가장 어렸었는데 길례(吉禮)를 올리기 전에 여염으로 피접 나가 있었다. 이때 노(奴) 강손이 반비(班婢)와 몰래 간통하다가 보모에게 발각이 나서 논죄(論罪)하였다...

그러나 그뒤 수견은 숙노로 있으면서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강손으로 숙노를 개정하였으니, 자리 다툼으로 원망할 수도 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수견이 경빈에게 원한을 가졌으면 가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어 보인다.

수견과 강손 역시 이런 일을 함께 도모할 만큼 돈독한 사이도 아니었다.

즉, 중종이 이런 말을 굳이 했던 이유는 이 사건 역시 경빈에 대한 모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대간 또한 중종의 발언 취지를 정확히 알아챘다.

『"어제의 전교에 ‘수견이 상전을 증오한 일이 있었으니 이 내용을 추관들은 알고 있으라.’ 했습니다.

이는 종묘 사직의 대적(大賊)을 한 집안의 사혐(私嫌)에 귀착시킴으로써 대악(大惡)으로 하여금 빠져나갈 길을 열어준 것이므로 신들은 경악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그리고 하나 더, 가작인두의 변에도 흥미로운 이름이 등장한다.

김형경의 집을 수색했을 때 궁에 있던 여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여인의 이름은 '은이(銀伊)'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어제 의금부의 추안(推案)에서 거론된 은이 【언문 편지를 통한 여인.】 는 중궁의 나인으로 궁에 들어와 있던 사람이다. 비록 자신이 범한 일은 아니지만 동생이 흉모(凶謀)를 범했으니 대궐에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궁에서 내쫓았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21일)


이 '은이'라는 이름을 혹시 기억하는가?

그렇다. 작서의 변 당시 내시 김귀인을 통해 쥐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던 안상궁의 방자, 그녀의 이름도 '은이'다.

『"방자 은이(銀伊)가 지난 2월 10일 경에 도둑 누명을 쓴 일 때문에 액땜하기 위해 산 쥐를 잡아가지고 궐내로 들여올 일로 내관 김귀인에게 말했었지만, 끝내 잡아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은이가 대궐을 나간 것은 2월 14일이니 근래의 일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10일)


이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한자까지 똑같은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고 했을 때, 작서의 변에서 혜순 옹주의 여종들이 행한 비밀스러운 음사를 어떻게 안상궁이 알아채고 자순대비에게 일러바쳤는지가 설명이 된다.

중종의 말에서 은이는 수견의 누이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빈에게 원한을 가진 수견이 그녀의 진영에서 벌어졌던 각종 음사를 은이에게 말했고, 은이는 그 정보를 안상궁과 문정왕후에게 전달했다면? 어떤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경빈과 복성군을 꼭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에 대한 부분이다.

6년 전 작서의 변을 통해 경빈과 복성군을 상주로 유배 보냈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경빈 측 대신들도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데 굳이 왜?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당시 중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장순손, 우의정 한효원 등이 빈청에 나아가 아뢰기를, "성체(聖體)가 건강을 회복한 뒤 어제 처음 거둥하셨습니다. 신들은 체후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5월 5일)

중종이 1488년생이니, 당시 나이 47세. 조선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중종이 죽는다면 당시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물려받게 될 테지만, 인종은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은 편이었고, 건강에 확실히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인종은 죽을 때까지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이 시기 이미 인종에게 자식이 없음을 걱정하며 양제(良娣, 세자의 후궁)를 들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삼공이 아뢰기를, "조종조에 세자의 양제를 뽑아 들인 예가 있는데 이제 세자는 가례를 치른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계사가 없으니, 신들은 마땅히 조종조의 구례를 본받아 정신 온량한 여자를 가려 세자의 양제로 삼는다면 후사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종실록》 1532년 2월 14일)


이때는 아직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기 전이다.

만약 인종이 세손을 남기지 못하고 중종보다 먼저 죽는다면?

세자의 자리가 복성군에게 갈 수도 있었다.

그 상태에서 중종마저 사망하거나, 양위라도 하는 날엔 복성군이 왕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경빈과 복성군이 문정왕후와 김안로를 가만히 두겠는가?

그들에겐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들로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막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경빈과 복성군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난 경빈 진영에서 인종과 문정왕후를 해치려는 음사가 실제로 행해졌을 것으로 본다.

인종과 문정왕후만 없어지면 그들 앞에 밝은 미래가 펼쳐질 텐데, 그러한 음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러나 수견과 같은 배신자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이 문정왕후 측에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결국 조작된 사건을 통해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결국 중종이 경빈과 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렸다면서 그의 사랑이 별거 아니었다고 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중전에 앉히고, 그녀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만 그의 권력이 미약했던 바람에 그만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을 제 손으로 사지에 밀어 넣은 셈이 되어 버렸다.

경빈과 복성군의 죽음은 그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중종은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인 첫 번째 국왕이 되었다. 두 번째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

그러나 중종과 영조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영조는 평소 사도세자를 못마땅해했고, 사도세자의 행실 역시 사형이 지나치지 않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상 그것은 영조의 자의(自意)였다.

그러나 중종은 달랐다. 복성군을 아끼고 사랑했음에도, 조정의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식을 죽였던 것이다.

그것은 중종의 자의가 아니었다.


난 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리며 중종이 쏟아냈던 절규를 보며, 영화 '해바라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마지막, 주인공 오태식(김래원 배우)이 원수들을 앞에 두고 이런 대사를 했다.

"니네 꼭 그랬어야 되냐? 니네 그러면 안됐어.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난 오태식의 마음과 중종의 마음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를 진심으로 동정한다.


역설적이게도, 중종이 경빈과 복성군을 위해 그토록 원했던 왕권의 강화는 조정의 압박에 못 이겨 그들을 처단하면서 이뤄졌다.

여론이란 게 얼마나 쉽게 변하는 것인지, 경빈과 복성군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중전과 세자의 자리를 노릴 땐 분수를 모르는 적폐라 욕했던 사람들이, 막상 그들이 궁에서 쫓겨나고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들을 동정하고 나섰던 것이다.


『인제 훈도 최억령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골육의 은혜는 천성이므로 독실하게 해야지 손상시켜서는 안됩니다. 지난번 왕빈(王嬪) 박씨는 일찍이 후궁의 선발에 참예하여 여러번 웅비의 상서로움을 꿈꿨고, 금지옥엽의 왕자군과 옹주의 빼어난 광채는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르던 바입니다...

하물며 왕빈과 왕자군이 하룬들 궁벽한 곳에 처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봉공(奉供)하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고 하니, 이는 사사로운 은혜가 오히려 공의(公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 오륜(五倫)의 이치에 있어 은의(恩義)는 빼버릴 수는 없는 것인데, 은미하여 밝히기 어려운 일로 왕빈을 폐하고 아울러 왕자군까지 내쳤으니, 명을 듣던 날 왕빈은 여자로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중종실록》 1529년 8월 15일)


『충청도 부여에 사는 김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박씨를 축출하자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들 무죄라고 했습니다. 신은 사사로 그에 대하여 평하건대 ‘복성군은 나이가 세자보다 위이고 총애받는 어머니의 후원이 있으므로 잘못 생각한 자들은 여희가 신생을 무고한 것과 같은 변이 일어나 국본을 동요시킬 위험이 있지 않겠나고 우려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중종실록》 1529년 9월 13일)


『한산군수 이약빙이 상소를 올렸다. "늘 미(복성군)는 곧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먼 곳으로 폐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에는 괴이한 일이라 생각하다가 도리어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곧 미의 죄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전하께서 대의(大義)로 결단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사진(賜盡)의 명을 내리셨다는 말을 듣고는 밥을 먹다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떨어뜨렸으며, 잠도 잊고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하께서 차마 못할 일을 하심이 아니요 그렇게 만든 자들이 차마 못할 일을 한 셈입니다.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차마 하시었으니 그때에 어떻게 견디시었습니까?"』 (《중종실록》 1539년 윤7월 5일)


중종은 이런 여론의 변화를 알아챘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면서 그가 흘렸던 피눈물이, 그의 손에 복수의 칼을 쥐여 주었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1막 마지막 넘버,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선물할게 끔찍한 지옥, 너희들에게. 기대해도 좋을걸, 나의 심판을."


중종은 잠자코 기다리며 김안로가 깽판을 치고 악명을 떨치도록 내버려두었던 것 같다.

김안로가 탄핵하고 죽이는 사람들이래야 대부분 경빈과 복성군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었을 터.

그리고 복수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된 이듬해인 1534년,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저들 세력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혈육인 윤원로와 윤원형을 공격하자 중종은 이것을 기회 삼아 김안로의 세력을 일망타진해 버렸다.


김안로의 사사를 명하면서, 중종은 이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역시 영화 '해바라기'에서 오태식이 복수전을 시작하면서 했던 대사를 빌려왔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더라. 알아들었냐? 지금부터 내가 벌을 줄 테니까 달게 받아라."

keyword
이전 09화중종(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