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과 인종의 부자(父子) 관계는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종은 중종 사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년을 채 못 넘기고 죽었을 만큼 효성이 지극했으며, 그만큼 중종도 인종을 매우 아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종이 인종이 아닌 다른 왕자로 원자를 바꾸려 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단지 어그로를 끌기 위한 주장이 아니다.
실록에 그 증거가 떡하니 제시되어 있다.
인종 탄생, 장경왕후 사망, 그리고 문정왕후 책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경빈은 큰 좌절감을 맛봤을 테지만, 이것은 중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중종의 좌절감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중전에 앉히지 못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대신들은 그로부터 '후계자 선택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요샛말로 하자면 '답정너'다.
인종은 태어나는 순간, 중종의 의지와 상관없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경빈의 왕비 책봉과 관련된 중종과 대신들의 대화를 직설적으로 재구성해 보겠다.
(중종) "박씨를 왕비에 앉히려고 하는데, 어때?"
(정광필 등) "안돼. 그녀의 집안이 너무 별 볼일 없어."
(중종) "그녀는 이미 나의 첫아들, 복성군을 낳았잖아. 그런데도 안 된다고?"
(정광필 등) "그게 제일 문제야! 복성군은 서자에 불과해. 네 뒤는 적장자인 원자가 이어야 해."
(중종) "뭐라고?"
(정광필 등)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얘기할게. 너 박씨랑 짰지? 그녀를 왕비에 앉히고 나서 복성군을 적장자로 신분세탁해서 후계자로 삼기로 말이야. 우리가 그 정도도 생각 못 할 줄 알았냐? 꿈도 꾸지 마."
대신들은 경빈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한편, 인종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 역시 계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미 3살(만 2살) 때 천자문을 뗐다.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
『원자가 초열흘날 입알(入謁)하고 대비전에 머물다가 이날 하성위 집에 있으려고 도로 나가는데, 기질이 침중하여 경솔하게 말을 하지 않고, 《천자문》과 《유합》을 모두 환하게 익혔었다.』 (《중종실록》 1517년 4월 13일)
중종도 인종의 총명함에 기뻐했다.
『임금이 책을 들고 묻자 따라 외되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기를 마지않았고,...』 (《중종실록》 1517년 4월 13일)
그런데 몇 개월 후, 인종이 실수를 저지르자 중종은 이번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원자가 밖에서 문자를 배운다 하더니, 이제 친히 보니 여느 아이와 다름없다. 듣고 본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말하고 취사(取捨)할 줄 모르니,..."』 (《중종실록》 1517년 8월 26일)
이것 역시 직설적으로 재구성해보자면 이럴 것이다.
(대신들) "원자는 천재야. 세 살밖에 안 됐는데 천자문을 다 알잖아!"
(중종) "내가 보니까 그냥 보통 애들하고 똑같더만. 천자문만 읽을 줄 알면 다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고 보고 들은 대로 그대로 따라 하던 걸. 유난 떨지 마."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 자랑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대신들은 인종이 영특하다며 추켜 세우는 반면, 아비인 중종은 오히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살때부터 글을 읽은 것이 대단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대신들은 인종을 실상보다 훨씬 올려치기 하고 있다. 물론 그것에는 목적이 있었다.
앞서 중종반정 때의 일을 통해 조선의 국왕과 세자의 지위와 관련, 명 황제의 승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야기했었다.
내가 보기에, 대신들이 인종을 계속 올려치기 했던 건 하루라도 빨리 명의 책봉을 받아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할 목적이 다분했다.
『좌의정 남곤·우의정 이유청·좌참찬 한세환 등이 아뢰기를,
"국본을 일찍 정하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며, 임금으로서 종묘를 봉승(奉承)하는 대효(大孝)입니다... 선왕조의 일을 살펴보건대, 원자의 나이 7∼8세가 되면 책봉하였는데, 지금 원자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고 숙성하시어 오히려 8∼9세 된 보통아이들보다도 훌륭하시니, 마땅히 일찍 정해야 합니다."』 (《중종실록》 1520년 1월 17일)
인종이 1515년 2월 25일에 태어났으니, 1520년 1월이면 갓 6살이 된, 채 만 5살이 되지 않은 시점에 벌써 세자로 책봉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이에 대한 중종의 대답이 또한 의외였다.
『비답하기를, "예전에 이른바 일찍 정해야 한다고 한 것은 국본이 미정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지금은 누군들 원자가 국본임을 모르겠는가? 성종조 적에도 8세에 책봉하였으니 6세에 책봉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중종실록》 1520년 1월 17일)
너무 길어 여기에 다 수록할 순 없지만, 《중종실록》의 1520년 1월 17일 기록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중종이 도승지와 저 세 명(남곤, 이유청, 한세환)을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신들이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하면 중종은 인종이 너무 어려 예(禮)를 제대로 행할 수 없으므로 시기상조라고 답하고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린다.
새로운 주제에 대해 대신들이 답하고 나면 저 중 한 명이 다시 세자 책봉을 건의하고, 그러면 중종은 또 똑같은 대답을 하면서 주제를 바꾼다. 아주 재미있다.
전체를 읽고 나면 이 느낌을 받을 것이다.
'중종이 인종의 세자 책봉을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대신들은 계속 인종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청했고, 중종은 마지못해 따라가는 모양새를 보였다.
결국 약 3개월 후인 1520년 4월 22일, 중종은 인종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세자 책봉식 며칠 전,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가 벌어졌을 때 김식(金湜)이라는 자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
김식은 조광조에 버금갈 정도로 벼락출세했던 인물로, 사화 발생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었으며, 원자의 스승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1520년 4월 16일, 이신(李信)이라는 자가 제 발로 궐문에 불쑥 들어와 김식에 관한 일을 고변했다.
중종은 영의정 김전·좌의정 남곤·우의정 이유청·의금부 당상 권균, 심정 등을 불러 함께 이신의 공초(供草, 죄인에 대한 심문 결과를 초록해 놓은 문서)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러던 중, 도승지 윤희인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윤희인이 아뢰기를, "이신이 처음에 공초하기를 ‘최운이 「상께서 원자를 바꾸려 하시니 나라가 장차 날로 기울 것이다.」 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상서롭지 않으므로 차마 글에 쓰지 못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20년 4월 16일)
최운 역시 사림 세력의 일원으로,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었지만 김식 등과 교류가 있던 인물이다.
그런 자의 입에서 중종이 원자를 바꾸려 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건, 당시 그런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한 중종의 반응은 이랬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여정(輿情)을 경동(驚動)하려는 것이다. 최운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도록 하라." 하였다.』 (《중종실록》 1520년 4월 16일)
쉽게 말해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란 것이다.
중종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사림도 파악했던 그의 의중을 눈치 백단인 대신들이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던 것이다.
세자 책봉과 관련된 뒷이야기가 남아 있다.
세자 책봉 이후 조선 조정은 명에 책봉 승인을 요청하는 주청사를 보냈고, 1521년 4월 명의 사신이 조선에 당도했다.
이때 조선 조정과 명의 사신이 협의했던 내용이 실록에 남아 있다. 조금 길지만 소개한다.
『원접사가 치계했는데, 그 대략은, "신이 통사 이화종을 시켜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 ‘세자의 나이 7세입니다... 세자가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으니, 뛰어나게 영리하고 숙성하지만 칙서를 받는 성례를 어린 몸으로 해낼 수 없습니다. 전에도 세자 세우기를 주청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직접 칙서를 받은 예는 없었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어째서 전례가 없다고 하는가? 김 태감이 왔을 때 세자를 만나본 일은 중국 조정에서도 벌써 알고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답하기를 ‘그때 김 태감이 세자 만나보기를 너무 고집했기 때문에 부득이 잠깐 나와서 보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너무 당황하자 김 태감도 후회하고, 즉시 도로 들어가게 했었습니다. 이는 바로 귀감이 되는 일인데 두분 대인께서는 이를 전례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사와 부사가 답하기를 ‘그렇다면 직접 칙서를 받는 예를 거행할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를 접견할 때에 세자를 배시(陪侍)해야 한다. 우리들이 봉책 책서를 받들고 와서 세자의 얼굴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게 될 말인가?’ 했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이 또한 전례가 아니니 다시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하 근처에 배시하게 하는 것이 뭐가 일에 해롭기에 이렇게 못보게 하는 것인가?’ 하면서 완강히 고집하였습니다."』 (《중종실록》 1521년 4월 13일)
1년 전만 해도 인종이 나이에 비해 매우 영특하여 8~9세 보다도 나으니 하루라도 빨리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고 그 난리를 쳐놓고선, 정작 사신이 오자 원자가 직접 칙서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조선 조정과 명의 사신이 언급하는 사례는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이황이다.
1503년, 이황은 명의 사신으로부터 칙서를 직접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인종과 같은 7살이었다.
『"오직 계해년 김보가 명나라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만 폐주(廢主)의 세자가 직접 칙명을 받은 예가 있습니다...
그때 김보가 앞으로 나아가 몸소 주었는데도 세자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눈물을 흘리며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관이 겨우 부축하여 나갔었습니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한 일입니다."』 (《중종실록》 1520년 12월 28일)
결국 인종은 1521년 4월 29일, 칙서를 받는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신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났다는 기록 역시 없다.
중종의 진심이 무엇이었느냐는 차치 하더라도, 원자가 너무 어려 예를 행할 수 없으니 세자 책봉을 미루자고 했던 말은 타당했다는 얘기다.
내가 중종이었다면, 대신들의 이러한 행태에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괘씸했을 것이다.
이 시기 중종의 속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야대에 나아갔다. 시독관 황효헌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상께서 위의(威儀)를 갖추실 때에는 매우 엄연하시다 하겠으나 온화한 기운이 부족하시고, 뭇 신하를 접대하실 때에는 상례(常例)만을 따르시고 논란하는 일을 보지 못합니다...
근일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엄위(嚴威)가 지나쳐서 화후(和厚)한 기운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성종조에서도 뭇 신하와 농담을 하신 적이 있는데 어떤 한림이 말하지 않고 나가니 불러서 말을 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상께서 스스로 하신 것을 헤아려보면 지나치게 엄하시지 않았습니까?"』 (《중종실록》 1520년 윤8월 17일)
이에 대한 중종의 답이 걸작이다.
『"사람은 다 요·순 같은 성인이 아니므로 허물이 없을 수 없거니와 허물이 있는데도 꾸민다면 그 허물이 더 심해질 것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엄연하고 온화하고 엄정한 세 가지는 아울러 있어야 마땅하나, 임금과 신하 사이는 여느 사람의 벗 사이와 같은 것이 아니므로 그 뜻이 서로 잘 맞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그 형세가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고 짐짓 지나치게 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종실록》 1520년 윤8월 17일)
이 역시 직설적인 대화로 재구성해 보겠다. 영화 '신세계'의 한 장면을 가져왔다.
(대신들) "앞으로 분위기 좀 좋게 하자. 농담도 좀 하고."
(중종) "거, 됐고. 솔직히 우리가 피차 마주 앉아 농담 따먹기 할 만큼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내가 보기에, 인종은 중종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었다.
중종이 인종을 대하는 태도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무슨 의미냐면, 대신들의 요청이나 전례에 따라 당연히 해줘야 할 것들을 할 뿐, 특별 대우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중종이 인종을 이렇게 대했던 이유가 뭘까?
우선 인종이 박원종의 외조카 장경왕후의 태생이었다는 걸 들 수 있다.
박원종은 반정을 주도하여 중종을 왕위에 앉히긴 했으나, 이후 중종에게 원한 살만한 일을 꽤 했다.
조강지처 신씨를 내쫓게 만들었으며, 사랑하는 여인 대신 그의 인척을 중전으로 삼도록 했다
박원종의 행태를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를 축출할 모의를 진행하다가 발각된 적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에 더해 한 가지 꼽고 싶은 것이 있다.
인종은 태어난 지 4일 만에 장경왕후를 따라 궁을 떠났다.
『이른 새벽에 원자를 받들고 교성군 노공필의 집으로 나아가 우거(庽居)했는데, 중궁이 미령하기 때문이었다.』 (《중종실록》 1515년 2월 29일)
그런데 이후 오랜 시간 인종은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들이 원자를 궁에서 길러야 한다고 수 차례 의견을 제시했다.
『홍문관 부제학 김근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자옵건대 원자가 늘 외간에 거처하여 천한 여염을 가리지 않고 기혈이 안정될 사이 없이 항상 옮긴다 하니, 이것이 어찌 보양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중종실록》 1515년 10월 1일)
『검토관 조광조는 아뢰기를, "원자는 국가의 근본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여 보육하는 일을 마땅히 어렸을 때부터 삼가야 하는데, 지금 여염에 있으니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중종실록》 1516년 10월 19일)
물론 인종이 궁을 떠나 살았던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윤임을 비롯한 장경왕후·인종 지지세력은 모후가 없는 상태에서 갓난아기가 궁 안에 머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훗날 '작서(灼鼠)의 변(變)'에서도 알 수 있듯, 궁궐 내부는 외부와 단절된 세계다. 대신들이 접근할 수가 없다.
인종 지지세력은 그들이 쉽사리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인종을 두기보다는, 같은 편인 대신들의 집에서 돌아가며 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1517년 문정왕후가 중전이 되자, 대신들이 인종을 궁으로 불러들여 모자(母子) 관계를 친밀하게 하라고 중종에게 건의했다.
『영사 정광필이 아뢰기를, "중전께서 이미 위에 오르셨으니 어머니와 아들 사이는 친친(親親)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의 정리는,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같이 길렀으면 비록 남의 아들이라도 또한 친애하게 되고, 아들된 자도 어릴 때부터 양육받았으면 효심이 또한 지극하게 되는 것이니, 원자도 이제 마땅히 대궐로 들여와서 날마다 중전의 곁에서 모시게 하여 친친하는 일을 도탑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중종실록》 1517년 7월 27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윤임 등 인종 지지세력이 비록 경빈을 막기 위해 문정왕후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긴 했으나, 그녀를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인종이 궁궐로 완전히 들어온 것은 태어난 지 3년이 훌쩍 넘은 1518년 8월의 일이었다.
『원자가 하성위의 집에서 동궁으로 들어왔다.』 (《중종실록》 1518년 8월 17일)
왜 이때서야 인종이 궁으로 들어갔을까? 아마 인종이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던 듯하다.
요즘에도 누가 때리거나 괴롭히면 부모에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아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양육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과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다 보니, 중종과 인종 사이에 유대감을 쌓을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는 태어나서 3년 동안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이가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부모가 아기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시기가 그 때라는 얘기다.
인종의 신변에 대한 우려로 궁 밖에서 기르게 하면서 중종이 인종에 대한 사랑을 두텁게 할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 중종이 인종을 그렇게 아끼지 않았던 데는 이런 이유가 컸을 것이다.
중종이 정말 사랑하고 아꼈던 왕자는 따로 있다. 바로 경빈이 낳은 중종의 첫아들, 복성군이다.
중종은 복성군을 편애했고, 특별대우했다. 확실히 남다른 점이 있었다.
『전교하였다. "경연에서 아뢴 대로 왕자군(王子君)의 사부를 차정(差定)함이 합당할 듯하다.
또한 학업은 그저 배우게만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예법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니, 지금 왕자군의 사부들 중에 학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 항시 학수(鶴壽) 【복성군 이미의 아이 때 이름】 의 처소에 가서 가르치되, 아울러 예법도 가르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16년 11월 15일)
왕자들 중에서 복성군을 콕 찝어 교육을 강화하라는 명령이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잠저 시대의 본궁을 복성군에 내리시고 또 증축한다 하니, 대군이나 왕자군의 가옥에는 반드시 등급이 있는데, 위의 본궁은 본시 대군의 가옥 제도에 따라서 지은 것이라, 왕자군에게는 이미 과분한 것이어늘, 어찌해서 더 짓습니까?"』 (《중종실록》 1518년 6월 12일)
중종이 진성대군이던 시절 기거하던 집을 복성군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 증축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종은 실제로 복성군에게 자기가 살던 집을 주진 않았던 듯 하지만, 이런 말이 괜히 나왔던 것이 아니다.
다음 기록에서도 중종의 본심이 드러나고 있다.
『신상이 아뢰기를, "신이 조종조의 의궤를 상고하여 보건대, 태종·세종·문종·노산을 책봉할 때에는 모두 도감(都監)을 설치하였었으며, 폐조 때에는 단지 예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었으니, 이제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예전에도 도감을 설치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 것이 많지 않으니, 도감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하매,
신상이 이르기를, "교명·책명에 드는 여러 가지 의물(儀物)이 많지는 않으나, 조종조에서는 모두 도감을 설치하였었습니다." 하고,
이유청은 아뢰기를, "일은 비록 많지 않으나 역시 큰 일이니,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복성군 가례 때에도 도감을 설치하는 것이 가하다."』 (《중종실록》 1520년 1월 26일)
중종은 인종의 세자 책봉식을 준비할 도감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신들이 그래도 이전에는 모두 도감을 설치했으니 그렇게 하자고 하자, 뜬금없이 그럴거면 복성군의 가례도감도 설치하라고 하는 것이다.
중종이 인종보다 복성군을 더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중종이 장경왕후·인종보다 경빈·복성군 조합을 더 아꼈다는 것은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종 입장에서는 국왕임에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 불만을 느꼈을 테고,
경빈과 복성군 역시 그들의 걸림돌인 장경왕후와 인종을 미워하게 됨과 동시에, 사사건건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대신들에게 불만이 대단했을 것이다.
장경왕후와 인종,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빈과 복성군은 중종의 총애만을 믿고 천지분간 못하는 적대세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가 곪아 터진 것이 중종 치세 최대의 비극, '작서의 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