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3)

by Loxias

* 경국지색(傾國之色), 경빈 박씨


경빈 박씨(?~1533)는 미모 덕분에 궁에 들어와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할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박수림(경빈의 부친)은 대대로 상주에 살았다. 족계(族係)는 사족(士族)이지만 비길 데 없이 한미하고 군색했기 때문에 정병(正兵)에 예속되어 있었다.

연산군 을축년에 채홍(採紅)의 일 때문에 비로소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반정한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이다.』 (《중종실록》 1527년 4월 26일)

『중종의 빈(嬪) 박씨를 개장(改葬)하였다. 빈은 복성군 이미(李嵋)의 어머니인데, 본디 상주 민가의 딸로서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름다운 자태가 후궁을 압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1년 8월 1일)


어떤 이는 경빈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표 격인 포사(褒姒)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자(李耔)가 아뢰기를, "예부터 임금이 비록 한 미천한 부인을 총애했다고 해서 나라가 반드시 망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그 부인이 임금의 마음을 미혹하게 되면 일찍이 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한번 미혹되면 참소와 아첨이 또한 뒤따라 이릅니다. 혁혁한 주(周)나라를 포사가 멸망시켰으니, 후세 임금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중종실록》 1518년 1월 12일)


물론, 대신들이 단지 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빈을 포사에 비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를 왜 포사에 비유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포사가 정확히 뭘 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포사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왕이 총애했던 여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여산봉화(驪山烽火)'의 고사로 유명하다.

고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포사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는데, 유왕은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봉화가 잘못 올려지는 바람에 제후들이 왕의 호출인 줄 알고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가 허탕을 치고 털레털레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포사가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유왕은 포사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하여 거짓 봉화를 올리고 제후와 병사들을 똥개 훈련시켰다.

점차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졌고, 때마침 적국에서 쳐들어 왔다. 다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아 주나라는 망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산봉화'의 고사다.


이 '여산봉화'의 뒷이야기가 바로 경빈을 포사에 비유한 포인트다.

포사는 유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는데, 유왕을 꾀어 원래 있던 왕후(신후)와 태자를 쫓아내게 만든 후, 그녀 자신은 왕후가, 그녀가 낳은 아들은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신후의 아비가 견융을 끌어들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유왕을 폐출시켰던 것이다.

경빈과 포사의 접점이 여기에 있다.

후궁 출신이 왕후가 되려고 했으며, 이에 더해 자신이 낳은 아들을 태자(세자)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앞서 조강지처 신씨를 궁에서 내보낸 후 새로 들인 4명의 숙의 중에서 중종이 왕후에 자리에 앉히려던 사람은 숙의 윤씨, 즉 장경왕후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리고 덧붙여, 중종이 정말 사랑했던 여인은 바로 경빈 박씨였다는 것까지.

이때 중종이 경빈과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화를 재구성해 보겠다.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경빈)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를 왕비로 만들어줘."

(중종) "나도 정말 그러고 싶어. 그런데 당신도 박원종 성격 알잖아. 윤씨를 중전으로 삼지 않으면 날 쫓아낼 거야."

(경빈) "이미 왕이 될 수 있는 애들은 당신 빼고 다 죽였는데 무슨 수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중종) "아니야, 그건 당신이 박원종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나 그 사람 무서워."

......

(중종) "오늘 박원종이 중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면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도 된다고 했어."

(경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중종) "우리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나 박원종 말 거스르기 힘들어."

(경빈) "..."

(중종) "대신 내가 이건 약속할 수 있어. 당신이 내 첫 아들을 낳게 해줄게. 그리고 중전이 아들을 낳지 않으면 당신이 낳은 아들이 내 뒤를 잇게 되는 거야. 어때? 이렇게 하자, 응?"

(경빈)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로부터 2년 후, 경빈은 중종의 첫 자식을 낳았다.

『이날 밤에 숙의 박씨가 아들 미(嵋, 복성군)를 낳았다.』 (《중종실록》 1509년 9월 15일)

위의 대화처럼 생각하게 된 근거는 바로 경빈이 복성군을 낳기 전까지, 장경왕후나 다른 후궁들은 임신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종의 둘째 자식은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공주인데, 1511년 5월 18일에 태어났다.

내가 봤을 때, 경빈이 중종의 첫 아들을 낳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다분히 의도된 결과다.

만약 경빈이 낳은 첫 자식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장경왕후나 다른 후궁들의 출산은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복성군이 태어난 1509년부터 1515년까지의 기간이 아마 경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1511년 장경왕후가 아이를 낳긴 했지만, 경빈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딸이었다.

이 시기 그녀의 가슴은 꿈으로 가득 차 설레었을 터.

'언젠가는 내가 낳은 아들이 국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1515년,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1515년 2월 25일,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인종이다.

『밤 초고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중종실록》 1515년 2월 25일)

장경왕후가 아들을 낳는 순간, 특약조건은 폐기되고 경빈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장경왕후가 출산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불과 엿새 후인 3월 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경빈에게는 6일 전 날아가 버렸던 절호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며칠간 중종과 경빈 사이에 오갔을 법한 대화를 상상해 본다.


(경빈) "당신, 책임져. 이게 뭐야! 약속 하나 못 지키고."

(중종) "미안해, 나도 중전이 설마 아들을 낳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

(중종) "중전이 죽었대."

(경빈) "이번에는 반드시 날 왕비로 만들어 줘. 이미 박원종을 비롯한 삼대장도 다 죽고 없잖아?"

(중종) "그래."

(경빈) "내가 왕비가 되어야 복성군도 세자가 되어 당신의 뒤를 이을 수 있어. 그러니까 잘 좀 해봐."


장경왕후가 죽은 후, 경빈은 중전이 되고자 했다. 중종도 경빈의 편이었다.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 박씨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중종실록》 1517년 7월 22일)


비슷한 사례도 있었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에.

중종의 부친인 성종은 첫 왕비인 공혜왕후가 죽자 후궁 중에서 윤씨를 선택하여 중전으로 삼았고, 윤씨를 내친 후에도 역시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뽑았다. 그렇게 뽑혔던 이가 바로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빈은 이번에도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박원종 등은 죽고 없었지만, 이번에도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상이) 대신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겠으므로, 정광필·김응기·신용개 등에게 간곡한 말로 물어서 그 뜻을 시험하였다.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되었다.』 (《중종실록》 1517년 7월 22일)


『유순이 아뢰기를, "그 비(妃)의 자리가 비게 되어도 차서에 따라 계승하지 않은 것은 한때 같은 무리로 있던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면 아랫사람이 존경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후세에서 계립(繼立)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는 하나 같은 무리에 있던 자를 올려서는 안 되고, 새로 가려서 세워야 적처를 다투는 일이 없고 궁중이 다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어 체모가 매우 합당하므로,..."』 (《중종실록》 1515년 10월 3일)


정광필은 경빈이 한미한 집안 출신임을 트집 잡았다.

유순은 후궁 중에서 한 명이 중전이 된다면, 다른 후궁들이 과거 같은 위치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여 만만히 여길 것이므로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모두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유순의 말은 어찌 보면 성종과 자순대비까지 싸잡아 폄하하는 발언으로, 문제가 될 여지마저 있었다.

아무튼, 경빈이 왕비가 되지 못한 진짜 이유는 저게 아니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장경왕후가 낳은 중종의 적자, 인종이었다.


『유순이 아뢰기를, "국본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이처럼 염려한 것입니다."』 (《중종실록》 1515년 10월 3일)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원자께서 어리더라도 인심은 크게 정해졌으니, 신의 마음에는 늘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하고,..." 』 (《중종실록》 1515년 10월 3일)


유순과 정광필의 말에서 대신들이 경빈이 왕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이유가 바로 원자, 인종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서 후궁이었던 여인을 왕비로 승격시킨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자.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자식을 낳지 않았다. 죽었을 당시 적자가 없었단 얘기다.

성종의 두 번째 왕비 폐비 윤씨는 왕비 승격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성종의 적장자 연산군을 낳았다.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는 왕비 승격 당시 딸만 있었다. 그러므로 연산군의 지위를 위협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빈은 이와 달랐다. 그녀가 왕비가 되면, 그녀 소생의 서장자 복성군(당시 7세)이 적장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분란의 씨앗을 남기지 않도록 아예 원천봉쇄해버렸던 것이다.


경빈, 장경왕후와 함께 궁에 들어온 숙의 홍씨와 나씨를 기억할 것이다.

숙의 나씨는 장경왕후보다 몇 달 앞선 1514년 10월, 아이를 낳다 죽었다.

반면 숙의 홍씨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인 반정 1등 공신 홍경주도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숙의 홍씨 역시 경빈처럼 원자보다 나이 많은 아들(금원군, 당시 3세)이 있었기에 중전이 되지 못했다.

이로써 원자의 존재가 경빈의 앞길을 가로막은 원인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1517년 3월, 새로 왕비가 결정되었으니, 이이가 바로 문정왕후(1501~1565)이다.

『예조에 전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분부하신 가운데 ‘윤지임의 딸이 여러 대 공후(公侯)의 가문에 태어났고, 탁월한 덕행이 있어 중궁 자리에 가합하다.’ 하셨는데,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여 비로 삼기를 결정하였으니, 길일을 가려 아뢰라."』 (《중종실록》 1517년 3월 15일)

훗날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과 문정왕후가 낳은 명종의 양 지지세력간의 다툼, 즉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유명해서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당시만 해도 문정왕후는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비롯한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대신들은 경빈의 왕비 책봉을 막는 데 성공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중종에게 왕비와 후궁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유용근(柳庸謹)이 아뢰기를,

"옛날 사람이 처첩(妻妾)을 대하던 도리는 매우 지극하였습니다. 부부 사이에 분별도 없고 의리도 없으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 무제는 후궁에서 유연하다가 결국 화를 이루고, 진 헌공은 여희의 참소에 빠져 드디어 중이의 망명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부부의 분별이 없는 데서 생긴 것입니다..."』 (《중종실록》 1517년 윤12월 4일)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조광조가 ‘첩이 왕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을 가지고 아뢰기를,

"옛날 한 문제가 상림에 행차하였을 때에 원앙이 부인의 자리를 물리치게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외인이 금중에 입시할 수 없으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한 문제 때에 만일 원앙의 간언이 없었더라면 신 부인은 반드시 그 분수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외인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분수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1518년 1월 11일)


대신들이 이런 얘기를 중종에게 계속했다는 건, 그가 새로 간택한 중전, 즉 문정왕후보다 후궁을 더욱 총애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광조가 말하는 '분수를 모르는 첩 = 경빈'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정왕후의 입장에서 보자면 17살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는데, 남편이 경빈과 한 편이 되어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쌓인 설움이 훗날 문정왕후의 '흑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서술하겠다.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경빈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여전했다.

경빈은 중전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데는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아직 한 가지 꿈이 더 남아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중종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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