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마치 세상 끝나는 고뇌와 슬픔에 마음이 지하를 뚫고 끝없는 추락을 했다.
오늘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아이들의 정겨운 사랑 고백에 하늘 뚜껑을 가뿐하게 펑크 내며 솟구친다.
행복이.
그 나이에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는 거야 라는 비난이 따라와도 어쩔 수 없다.
내 마음은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한 것은 팩트니까.
특히나 지랄 맞은 반이 있다.
몇 명의 나쁜 행동이 반 전체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
군중심리가 발동하여 권위에 도전하는 무례함이 또래 집단에서는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행동도 집단의 힘을 빌어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는다.
선생님도 함부로 못하는 것 같은 친구의 권력을 보면 덩달아 나도 권력을 누리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달콤한 유혹에 편승한다.
M이 이 반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 옆에 똘마니 역할을 하는 J는 오른팔이다. 또 다른 S는 왼팔이다.
몇 명 되지 않는 남자아이들은 4인자, 5인자... 즐비하게 일그러진 영웅 곁을 맴돈다.
딱, 이문열 소설인 '우리들이 일그러진 영웅' 속의 '엄석대'의 현실판이다.
극성맞은 남자아이들의 집단적 엇나감에 비해서 그 반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순한 양이다.
아니 공포에 떠는 어린양들이다.
남자아이들의 파행적인 수업 태도에 힘들어하며 수업시간에 숨도 제대로 못 쉰다.
보통 초등학생 고학년은 여자 아이들의 파워와 목소리가 더 커서 남자애들이 기를 못 피는 경우가 많은 데 완전 반대이다.
여자 아이들이 선량한 얼굴과 나를 동정하는 간절한 눈빛에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참고 또 참는다.
오늘도 결코 쉽지 않은 한 시간을 허벅지에 송곳으로 찌르는 인내심으로 쉬는 시간을 맞이했다.
남자아이들은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빛의 속도로 우당탕탕 교실을 벗어나는데, 여학생 몇 명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온다.
"선생님, 너무 힘드시죠? 힘내세요."
"쟤들 다른 전담시간에는 더 난리를 쳐요."
"담임 선생님도 힘들어하세요."
간증하듯이 한 마디씩 건넨다.
"흠. 얘들아. 위로해 줘서 고마워. 사실 좀 힘드네? 하지만 여학생들 보면서 꾹 참으며 수업한단다. 니들이 무슨 죄니? 걔들한테 주눅 들지 말고 어깨 쫙 펴고 수업해~"
마음속으로만 맴돌며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얘들아, 미안해, 선생님이 너희들을 구해 주지 못하는구나.'
한 아이가 하트 모양의 사탕을 수줍게 내민다.
아이들에게 사탕의 존재는 자기가 가진 최고의 것을 내어 준다는 의미이다.
우린 둥글게 포옹을 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건 마치 힘없는 백성의 소리 없는 아우성
이건 마치 불의에 용기 있게 맞서지 못하는 비겁함에 대한 열패감.
이건 마치 올곧은 길로 훈육하지 못하는 현실의 버거움에 대한 통렬한 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마음 졸이고, 안타까워하며, 온기를 나누어 주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있기에 숨을 쉰다.
고난의 가시밭길일지라도 문득 만나게 되는 이름 모를 들꽃들을 보며 시름을 잊는다.
질풍노도의 계절이 좀 더 빨리 찾아온 아이들이 철들고 뒤돌아 보며,
아, 그때 선생님께 너무 심했구나. 잘못했구나.
하늘 한 번 쳐다보며 떠올려 준다면 다행이고 그걸로 다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