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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의 매스게임

운동회에 부침

by 정유스티나
만국기.jpg 만국기 펄럭이고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이다.

학교에서도 각종 행사가 열린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는 축제일 지 몰라도 교사로서는 고된 업무가 가중되는 힘든 날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인교육을 지향하며 지, 덕, 체 를 겸비한 동량을 키워내기 위한 행사이다 보니 책임감과 의무감과 사명감을 갖고 행사들을 치른다.

그중 가장 큰 행사는 단연코 '가을 대운동회'이다.

요즘은 '대'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저, 중, 고학년으로 나뉘거나 학년 체육대회로 규모를 축소하여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대운동회를 하더라도 학예발표회와 격년제로 번갈아 하기도 한다.

설사 대운동회를 하더라도 행사 업체에 의뢰해서 해당 업체가 준비와 진행까지 다 하기 때문에 교사의 업무는 그야말로 격감했다. 프로그램도 전통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시대에 맞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활동으로 재구성되었기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호응도와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45년 전 80년대의 운동회는 찐이었다.

학교 내 교사와 아이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온 마을이 들썩이는 큰 잔치였다.

공활하고 쾌청한 가을 하늘 아래 알록달록 만국기가 펄럭이고, 운동장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흔적같이 달리기 선과 매스게임 대형선이 하얗게 그려져 있다.

운동회 당일에는 교사들의 출근도 평소보다 1시간 이상 빨랐다. 각종 준비물 점검과 시설물 관리를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다. 운동장 구석에 걸어 놓은 솥에서 펄펄 끓는 육개장 한 그릇은 지금도 생각나는 꿀맛이었다.

아이들은 단체 체육복-기껏해야 하얀 티셔츠와 검정 반바지-과 지난 장날에 엄마가 사다 주신 새 운동화를 신고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새 신을 신은 아이들의 마음은 하늘을 뚫고 날아올랐다.

저마다 부채나 소고 등 운동회에 필요한 도구를 손에 쥐고 함박웃음과 재잘거림과 함께..

교문에는 아이들의 코 묻은 동전을 노린 솜사탕 장사나 풍선 장사나 뽑기 장사등이 장사진을 쳤다.

이날만큼은 학부모들도 동심에 젖어 두 손 무겁게 도시락과 삶은 밤이나 고구마, 사이다나 환타같은 음료수를 들고 아이들과 함께 등교하였다. 마치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부모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했다.

개회식의 총탄이 울리면 국민체조로 운동회의 포문을 연다.

면장님, 경찰서장님, 학부모회장님, 노인회장님 등등 운동회를 축하하러 오신 내빈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길고 맥락 없고 뜬금없는 자아도취로 무장된 내빈 축사에 쓰러지는 아이들도 생기고, 아이들 앞에서 땡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 있는 교사들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지는 최악의 시간이다.

나름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야 진심이었겠지만 너무 긴 연설은 말하는 당사자만 빼고 모두가 괴로운 시간이다.

자고로 가장 훌륭한 연설은 짧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어찌어찌 식전 행사가 마무리되면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된다.

100미터 달리기, 각종 학년 경기, 단체경기, 중간중간 각 학년에서 준비한 매스게임이 펼쳐진다. 줄다리기와 박터뜨리기는 요즘도 살아남은 불멸의 경기이다. 운동회의 꽃인 '청백계주'가 되면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이 터져라 하는 응원은 정점을 찍고 겅중겅중, 쌩쌩 달리던 계주 선수는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평소에 코찔찔이더라도 달리기 선수 한 번 하고 나면 인기남, 인기녀로 거듭난다.

학부모 계주는 더욱 가열하서 엎어지며 부상투혼도 종종 연출했다. 치약 하나, 비누 하나 때문에 저들이 그리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달리는 것은 아니리라. 뒤에서 응원하는 자식들 앞이라 초인의 힘이 난 것 이리라.

모든 것이 흥겹고 신나고 즐거운데 옥에 티가 있었으니, 거나하게 대포 한 잔 기울인 학부형과 마을 청년들이 꼭 한 번은 시비가 붙어서 이 좋은 잔치를 소란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매번 그런 것이 아니지만 그런 불상사는 심심찮게 일어났고 깜짝 놀란 교사들은 서둘러 아이들을 귀가시켰다.


그래도 유난히 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뭉게구름도 함께 달리기 하던 그 시절 운동회가 그립다.






운동회를 준비하며 가장 힘들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종목은 단연코 '매스게임'이다.

1학년 단골 레퍼토리는 '꼭두각시'였고, 고학년인 5, 6학년 여학생은 '부채춤'이나 '소고춤'이 대세였다.

나는 초임 시절 고학년만 했고 여선생님이 달랑 2명뿐이었기에 고학년 매스게임은 자동 당첨이었다.


음악 준비가 급선무이다.

레코드 가게에 가서 사장님과 함께 여러 노래를 듣고 원하는 노래를 픽한 후 필요한 부분을 끊고 붙이는 작업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고 퇴근 후 몇 번의 방문을 거쳐서 음원이 완성된다.

보통은 가사를 배제한 경음악으로만 사용했는데 나는 가사를 반드시 넣은 음악을 사용했다.

가사를 들으며 연습하면 동작을 익히기도 쉬웠고, 구경하는 관중들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고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흡족했다.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바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 가세


개나리 진달화 만발해도 매난국죽만 못하느니

사군자 절개를 몰라 주니 이보다 큰 설움 또 있으리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온다

공수래공수거하니 아니나 노지는 못 하리라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를 좇아 날아들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버들 사이로 왕래한다


(후렴)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나 좋다

벌나비는 이리저리 펄펄 꽃을 찾아 날아든다


[출처] 태평가. 악보 가사 유형(청사초롱 - - -) 국립국악원|작성자 양효정


김영임 명창의 '태평가'는 내가 애정하던 음악이었다.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매스게임'의 보조 출연자들이다.

45년이 흐른 지금도 귀에 쟁쟁한 명창의 간드러진 노랫소리는 내 심장을 후벼 판다.


그다음 작업은 안무 짜기이다.

녹음기를 끼고 살면서 음악을 수십 번 듣고 끊으며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안무를 짰다.

춤이라고는 막춤밖에 못 추는 몸치이지만 신기하게도 안무는 잘 짠 것을 보니 천부적인 선생체질인가 보다.

개인동작, 짝 동작, 네 명 동작, 8명 동작, 16명 동작 이런 식으로 인원을 늘리며 변화무쌍한 대형을 짜는 것은 고난도의 지능과 과학적 두뇌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제자리에서 걷다가 뛰다가 돌다가 여러 명이 휘몰아치면서 매스게임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이제 대미를 장식하는 시그니처 대형으로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여야 하기에 머리에 쥐가 나도록 구상하고 수정하고 실제 적용해 보며 수정하는 등 예술가의 고통은 산모의 고통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안무를 잘 짜고 지도를 잘한다고 뽑혀서 군내 체육대회를 하는 오프닝 행사를 총괄하기도 했다.

인근의 학교 4개의 5, 6학년 여학생이 동원되었고 600여 명의 학생에게 무용을 가르친 것이다.

군체육대회 당일에는 종합공설운동장의 조회대에서 전두 지휘하였고, 몇 달 동안 고생한 피땀의 결과물을 선보여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때의 벅찬 가슴떨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동안의 고난이 한순간에 영광의 꽃다발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그래봤자 감사패 하나 받는 것으로 퉁쳤지만 초임교사의 당찬 열의가 맺은 조그만 결실이기에 나에게는 평생의 추억이고 자랑이다.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안무를 짰고 지도했는지 나 자신이 놀랍다.

지금 하라고 하면 석 달 열흘이 걸려도 안무 하나 못 짤 것이고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을 버틸 체력도 없다.


이렇게 해서 '마스게임'의 기본이 완성되면 무한 반복하는 맹렬한 연습이 기다리고 있다.

교육과정 파행 운영의 일등 공신인 운동회 시즌이 되면 예체능 시간은 무조건 운동장에서 뙤약볕 아래 연습을 했다.

우천 시에는 교실에서 책상을 밀치고 우당탕탕 부딪히며 순서를 외우는 것에 집중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전체 '매스게임'은 반드시 연습했으니 아이들과 나도 까만 콩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장도 안 하고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용감한 쌩얼이 백설이에서 흑설이로 바뀌는 가을은 피하고 싶은 고통의 계절이었다. 까맣게 탄 얼굴로 인해 청춘사업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래도 겨울 한 번 지나면 다시 백설이로 돌아오는 싱싱한 들풀이었기에 버틴 세월이다.

해마다 운동회를 하는 가을이 오면 고난으로 점철되었지만 영광으로 기억되는 젊은 날의 내가 떠오른다.


'애썼다'

'애썼다'

셀프 쓰담쓰담.



운동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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