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취
1980년대, 시골 학교에는 사택이 있었지만 대문도 담도 없이 일렬로 나란히 지은 허름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내가 부임한 학교의 사택은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거주하지 않고 비어 있어서 폐허 수준이 되어 있었다.
나보다 한참 위인 선배들은 사택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야밤에 동네 총각의 급습에 속절없이 당하고는 할 수 없이 결혼까지 한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때는 순결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겁탈을 당하면 할 수 없이 결혼을 해야 되는 줄 알았던 슬프고 속상한 시절이었다.
그 학교에는 2년 전에 발령받은 같은 대학교의 선배님이 계셨다.
여선생이라고는 그 선배와 나, 이렇게 둘밖에 없었다.
선배가 발령받았던 2년 전에도 사택의 상태는 지금과 비슷하였기에 자취할 방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시골에는 빈 방이 있을 리가 없고 간혹 비어 있더라도 가을걷이를 하면 곡식과 각종 잡다한 물건을 놓아야 했다. 게다가 학교 선생이 자취를 하면 아무래도 불편하니 선뜻 방을 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배의 집은 나의 본가 보다 더 멀어서 자취를 하지 않으면 출근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선배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는 선배가 맡은 반의 아버지께서 힘들게 방을 내어 주셨다.
그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3면이 소 마구간이었다.
그리고 군불을 때는 방이었다.
그런데 학부모께서 감사하게도 연탄보일러를 설치해 주시고 방을 내어 주신 것이다.
내가 발령을 받자 교감 선생님은 내가 묵을 방 걱정을 하셨다.
그때 선배가 함께 살자고 말해 줬다.
"아, 여선생들끼리 자취하면 마음이 안 맞아 3개월도 못 가고 싸워서 따로 갈라섭니다."
거기에다 꼭 한마디를 더 보태어서 나의 심기를 긁는다.
"한눈에 딱 봐도 까칠하게 생겼는데......"
아놔. 나를 언제 봤다고 까칠하네 마네 하는지 어리둥절했지만 알고 보니 그 교감 선생님이야말로 까칠 대마왕이었다. 세상사 자기의 잣대로 판단한다지만 까칠하고는 거리가 먼 나는 억울했다.
"아이고, 우리 아~(아이) 까칠 안 합니더."
손사래를 치는 우리 엄마를 보며 선배는 쿨하게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괜찮아요. 저랑 같이 살아요."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지 잘 몰랐다.
2년을 함께 살면서 선배의 고마움은 더욱더 절절해졌다.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나와는 반대로 한 끼라도 식사를 안 하면 쓰러진다는 선배 덕분에 삐쩍 마른 얼굴이 보름달이 되었다.
주말마다 본가에 갔다 올 때마다 각종 식재료를 갖고 와서 그냥 반찬 정도가 아니라 근사한 요리를 뚝딱 차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잡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지만 나는 절대로 만들지 못하는 잡채를 선배는 아주 쉽게 그리고 자주 밥상에 올렸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붙어 지냈지만 우리는 교감선생님의 예언과 달리 단 한 번도 싫은 소리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직할시에 있는 선배를 찾아서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함께 밥도 먹고 놀았다.
"아휴~두 분은 일주일 내내 붙어 있었으면서 주말에도 또 만나요?"
선배의 친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친구분이 신기한 듯 건넨 말이다.
언니가 없는 나는 선배를 친언니처럼 의지했고, 동생이 없는 선배는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다.
선배와 동거한 지 1년이 되어 가던 어느 겨울날 아침에 날조한 연탄아궁이에서 나온 연탄가스가 부실한 방문을 타고 들어왔다.
아침에 잠을 깬 우리는 바로 방바닥으로 내려 꽂혔고 심한 현기증과 메슥거림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닫이 문을 밀어 마당에 내동댕이쳐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방문만 나오면 바로 마당인 구조이니 그 조악함을 짐작할 수 있는 방이었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김치 국물을 한 사발씩을 우리의 입에 밀어 넣었다.
곧이어 보건소에서 출동한 차를 타고 보건소에 가서 처치를 했다.
염라대왕을 만나기 일보 직전에 이승으로 떨어져서 정신을 차리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살아 있음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날 한꺼번에 두 명이 결근하는 비상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생사를 함께 넘나든 피를 나눈 자매가 되어 있었다.
선배는 2년 후에 집과 가까운 도시로 발령이 났다.
마지막 회식 때 때마침 공교롭게도 가벼운 눈병이 와서 눈알이 토끼눈에 되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선배와 헤어지는 것에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눈이 빨갛게 된 줄 알았다.
나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눈병이 아니더라도 분명 토끼눈 신세였을 것이기에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선배가 떠난 그 방에서 혼자 있기 싫었다.
혼자 생활하기는 너무 적막강산인 데다 연탄가스의 공포 때문에라도 방을 옮겨야 했다.
교사로서 왕 왕초보 딱지는 뗐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읍내에서 자취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버스로 30분 걸리는 통근거리에 있는 군소재지인 읍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깡촌에서의 첫 자취생활은 막을 내렸다.
선배와는 계속 연락하며 주말에 만나는 것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선배가 결혼을 하면서 그 즐거움도 막을 내렸다.
선배가 결혼과 함께 학교에 사표를 내고 낭군님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이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도, SNS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간혹 바람결에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까지 듣고는 소식이 뜸하다가 아예 연락이 끊겼다.
학교만 계속 근무했어도 어떻게라도 찾을 수 있는 건데......
그렇게 흘려보낸 세월이 벌써 40년이다.
텔레비전에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은사, 친구, 첫사랑 기타 등등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
유명인이 되었더라면 나도 저기에서 선배를 찾을 텐데. 이 얼굴에 탈렌트하기는 틀렸고, 이 노래 실력에 가수는 더욱더 어려우니 일개 초등학교 교사인 내가 무슨 수로 그 프로그램에 나간단 말인가.
딱 5년만 하고 사표를 내겠다고 되지도 않은 결심을 하던 내가 꿋꿋하게 이 나이까지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은 그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서툴고 낯설고 두려웠던 초임 시절의 구멍을 메워 주시고 먹여 주고 재워 준 선배의 은혜가 흔들리던 나를 붙잡아 주었다.
진짜 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소들에게 둘러 싸여서 소똥 냄새로 문도 제대로 못 열고, 한여름의 더위를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 펌프 물로 서로 등목을 하며 식혔다.
방과 바깥의 경계가 찬바람 숭숭 들어오는 창호지를 붙인 문이었기에 한겨울에는 방안에서도 물이 얼었고, 우리는 얼굴만 내놓았지만 입은 살아서 재잘거렸기에 결코 서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했던 그 시절, 그 방을 굳이 다시 찾고 싶은 이유는 선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들 뻔했던 첫 자취생활을 보랏빛 그리움으로 채색해 준 그 선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PS: 82년부터 84년까지 경북 S군 외*초등학교에 근무하셨던 선배님을 찾습니다.
혹시 브런치 작가님들 중 선배님이나 선배님과 비슷한 것 같은 분을 알고 계시면 연락 주시면 후사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