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애상
나의 첫 부임지에 가려면 내가 살던 시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군소재지의 버스터미널에 온다.
그다음 시골의 버스를 타고 다시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 30여분을 덜컹이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하루에 4번 운행되는 버스를 놓치면 최소한 2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손목시계는 필수 품목이었다.
버스를 타면 최대한 앞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뒷자리에 앉았다가는 궁둥이에 금이 가거나 와장창 깨질지도 모른다.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실제 소달구지도 같이 다니던 길이었다.
가끔 소달구지가 맞은편에서 오면 버스는 최대한 몸을 접어 길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어야 소달구지가 지나갈 수 있었다.
덜컹댐이 최고조를 찍을 때는 머리가 버스 천장에 닿았다.
진짜 MSG 한 방울도 치지 않은 진실이었다.
좌석의 손잡이를 너무나 꽉 잡아서 내리면 팔이 아프고 손은 빨갛게 달아 있기 일쑤였다.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어도 30분 동안 덜컹대는 버스를 타고 오다 보면 배가 쑥 꺼진다.
안 그래도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 안색이 창백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투명하게 파리해서 같이 탄 선생님이 걱정을 하며 부축을 해 줬다.
멀미로 시작하는 월요일이 상쾌할 리가 없다.
그래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아직 친구들은 대학생인데 2년제였던 교대를 졸업하고 선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니 모든 것이 어설펐다.
선생이라는 아름이 주는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부모를 상대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루아침에 애에서 어른 흉내를 내야 하는 자신이 낯설고 버거웠다.
아직 청바지 티셔츠가 어울리는 내가 정장 투피스의 불편함에 심신을 가두고 제도의 굴레로 들어갔다.
소달구지 덜컹대는 시골길을 타고 출근하면서 매번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기분은 급다운되고 가슴은 맷돌을 단 것처럼 지하를 뚫었다.
월요일 아침이 밝으면 나는 또 버스를 타고 멀미를 하며 산 넘고 물 건너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상의 시계를 모두 멈추게 하고 싶었다.
막상 출근하고 일주일이 시작되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월요일 아침이 두려웠고 맞이하고 싶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이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한다는 모든 직장인의 고뇌이리라 애써 위로해 본다.
지금도 눈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 길.
구불구불 뱀처럼 누워있는 비포장길.
장날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사람들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던 버스 안.
장에 가서 팔 농작물이 사람 수보다 더 많아지면 통로에 퍼질러 앉아 가시던 아낙네와 할머니의 고단함도 함께 싣고 버스는 덜컹이며 달렸다.
학부모님이라도 타고 계시면 버스 안은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아이고, 선상님. 안녕하세요. 우리 개똥이 공부 잘하나요?"
"아~네. 개똥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개똥이가 요즘 공부 잘하고 있어요. "
구십 도로 인사하시는 학부모님이 고맙지만 민망해서 초임 선생의 얼굴은 홍당무가 된다.
자리에 앉았더라도 조금이라도 흰머리가 있으신 분이면 1초 만에 발딱 일어난다.
혹여라도 내가 선생인 줄 아는 분이 계시면 예의 없음을 수군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수군거림이 없더라도 그 시절에는 경로우대사상이 뿌리 박혀서 새파란 내가 자리에 앉아 간다는 것은 나부터도 용납되지 않았다.
중고등학생이 한 차 타고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엉덩이는 의자와 맞닿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하고 멀미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손잡이에 의지하며 개업 가게 앞에 나부끼는 풍선 인간이 되어야 했다.
학교에 도착했지만 미처 따라 내리지 못한 마음 버스에 태워 멀리멀리 가 버리던 초임 교사의 출근길.
매주 월요일 아침 출근길과 토요일-그 당시는 주 6일을 오지게 근무했다-오전 근무가 끝나면 어김없이 버스를 탔다. 학교에 출근하기 싫은 나를 강제로 태워서 나를 실어 나르던 탈탈거리는 시골 버스는 뺑뺑 돌아가며 산밖에 없던 근무지에서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사계절이 뚜렷하기에 계절에 따라 나의 출근길도 각각 다른 모습으로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차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계절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초임 교사의 애환을 위로해 주었다.
봄이면 냉이와 쑥을 캐는 아낙들이 논두렁에 삼삼오오 앉아서 바구니를 채우는 모습.
손은 열심히 호미를 따라갔지만 입은 끊임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연신 웃음 짓는 얼굴에 나도 같이 헤벌쭉 웃었다.
여름이면 새벽부터 논에 김을 매는 마을 사람들은 벌써 한바탕 아침 일을 마무리하며 논두렁에서 새참을 먹고 있다. 해가 중천에 떠 있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이렇게 늦게 출근하는 내가 죄송하기도 했다.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에 마음이 풍성해지지만 가슴 한편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자주 눈시울이 뜨거웠다.
겨울이면 발가 벗긴 채 본래의 소리로 우는 나무처럼 내 마음에도 삭풍이 휘몰아치며 뜨거운 청춘의 피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는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비록 남루하지만 젊음이 있었고, 비루하지만 꿈이 있었기에 찬바람 부는 마음을 간헐적으로 데워주는 온열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에 대한 부모님의 무한신뢰와 애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