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는 주말 오후.
한 여성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아니, 아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수준이다. 20대로 보이는 그 여성은 크롭 끈 나시에 시스루 남방을 걸쳐 입고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시스루 남방은 거의 벗겨져서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이한과 이나는 맞은편에서
수상한 걸음으로 오는 이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했나?"
이한이 여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글쎄. 술 때문이 아닐 수도."
가까이 갈수록 이상했다. 단순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지? 여성의 옆으로 갑자기 한 남자가 불쑥 다가왔다. 괜찮냐고 물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일행이세요?"
이한의 물음에 그가 잠시 당황한 모습을 띠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네"라고 대답한다.
"저기요. 이쪽과 아는 사이 맞아요?"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눈에 초점이 없고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작다. 반면에 입고리는 살짝 올라가 있으며 헛웃음을 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좀비 같았다. 정신이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여자는 이 더운 대낮에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마약인가.'
이한은 생각했다. 옆에 있는 이나를 쳐다보지만 전혀 당황한 빛이 없다. 진즉에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치. 미리 눈치 좀 주지.
"일행이 맞으시다면, 지금 바로 이 여성분의 휴대폰으로 전화 좀 걸어주시겠습니까? 신원 확인이라 치고."
여전히 여성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슬그머니 손을 빼더니, 뭔데 참견이냐고 중얼거리며 줄행랑을 쳤다.
"업어."
"내가?"
"응. 니가."
날도 더운데. 이한은 구시렁 대며 여성을 업었다. 그대로 집까지 걸어갔다.
"누구야?"
집으로 들어가자 모두 놀라서 쳐다봤다. 혹시 이한의 여자친구인가 하고.
"마약 한 여자. 일단 정신부터 차리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집으로 데려왔어."
이나가 대신 대답했다.
여자는 이나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2층 계단에서 힘없이 내려가는데, 거실에서는 열심히 운동을 즐기고 있는 이나네가 보였다. 누구지? 여긴 어디지? 여자가 당황스러워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는지, 아까와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수현이 다가가 친절하게 말을 건네며 식탁 의자로 안내했다.
"물 좀 가져올게요. 잠깐 앉아 있어요."
이나와 이한이 여자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여자가 안심할 수 있게 오후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었다. 여자에게는 그때의 상황이 아주 어렴풋하고 희미한 기억일 뿐이었지만 미미하게라도 남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정말 친절한 분들이시네요."
여자가 연신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조금 진정이 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실은 제가 우울증이 있어요. 클럽에서 만난 남자애가 있는데, 우울증을 치료해 주겠다면서 저를 어디론가 데려가더라고요. 어떤 건물 지하였어요. 입장을 하려면 음료를 꼭 마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조건은 그것뿐이라면서. 들어가면 낙원이 펼쳐질 거니까 얼른 마시래요. 이곳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면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요. 부끄럽지만, 심신이 지쳐 있던 저는 그 말에 완전 혹했어요."
물 한 컵을 다 비운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음료를 마시고 안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어요. 희미하지만 엉망진창이라는 건 분명히 기억이 나요. 바닥에 누워 몸을 뱀처럼 꼬고 있는 사람들. 벽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는 사람들. 엉겨 붙어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얼른 그곳에서 나가야겠단 생각뿐이더라고요. 조금 지나니 다음 사람이 들어오길래 바닥을 기어 도망쳐 나왔다.
여자의 이야기를 다 들은 준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마약반 형사로 있는 친구였다. 그땐 몰랐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그저 마약반에 있는 친구에게 먼저 알리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준호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러더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를 이한과 이나가 말없이 뒤따라 갔다. 준호는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눈앞에는 한강이 있었다. 노을이 비친 한강은 온통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이나와 이한은 아버지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걸 지켜보며 뒤에서 같이 울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어떤 나이가 되더라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장례식장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긴장한 태도가 역력하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후에도 준호는 시종일관 어딘가가 불편해 보였다. 내내 침묵으로 있던 그는 그곳을 빠져나오며 딱 한 마디 했다.
"가자."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그러나 그의 가족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준호의 눈이 분노의 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으므로.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으리라.
여자가 말해준 곳은 이미 버리고 도망간 후였다.
준호의 친구인 마약반 마형사가 다른 형사들과 이곳을 급습했을 때. 어떻게 알고 왔는지 수십 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덮쳤다. 그 과정에서 마형사는 칼에 깊숙이 찔리며 목숨을 잃었다. 준호는 다른 형사들에게서 그들의 은신처가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라는 말을 들었다. 현재 파악 중이라면서. 여러 군데라니. 우리나라에 마약을 할 수 있는 장소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준호네 가족은 은신처 중 세 군데를 알아냈다. 지난번 이한이 해커인 친구를 통해 사채업자 조직의 규모를 알아냈듯이, 이번에도 그 친구에게 미리 부탁을 했었다. 마형사에게 연락한 직후에 바로.
"세 팀으로 나누어 간다. 나와 수현, 이한과 이나, 도혁 혼자. 놈들 숫자가 정확히 예측이 안 돼. 마형사를 덮친 것처럼 분명 숫자가 더 늘어날 거야. 다른 때보다 특히 조심해야 해. 위험하면 그 즉시 바로 빠져."
"네."
도혁, 이나, 이한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수현의 얼굴이 이상하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걱정의 빛으로 가득하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이 아니면 그놈들 분명 거처를 또 옮겨버려서 찾기가 계속 어려워질 거야. 지금이 기회야. 위험하면 바로 빠질 거고, 진입하기 전에는 경찰에도 꼭 연락할게. 아들 믿지?"
이한이 수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믿지 그럼. 다들 정말로 조심해야 해. 알았지?"
"응. 엄마도."
"알겠어."
애써 웃어 보이며 말하는 수현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세 팀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