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는, 이제는 오롯이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하나의 입구가 있었다. 지난번에 여자에게 들었던 입구와 비슷한 형태다. 입구 옆에 칸막이로 된 공간 안에서 한 남자가 건네는 음료를 마셔야만 안으로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구조.
두 사람 모두 음료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약이 급한 사람들처럼 연기를 실감 나게 잘해서일까. 별다른 의심 없이 음료를 건네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준호가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한 즉시 두 사람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음료를 밖으로 토해냈다.
"아이씨 뭐야!!"
칸막이 안에 있던 놈이 비상 버튼을 누르고 안쪽에 있던 숨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도망쳤다. 마형사가 급습했을 때 어떤 놈들이 삽시간에 그들을 덮쳤던 것도 바로 이 비상 버튼 때문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대기조가 있었다. 안에 들어간 준호와 수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형사를 덮친 상황처럼 놈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다. 설상가상으로 음료 안에 있던 마약이 미세하게 몸속에 스며들었는지,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안에 있던 조직원 놈들까지는 쉽게 쥐어패 주었지만. 문제는 곧 들이닥칠 또 다른 놈들이었다.
이나와 이한은 연기가 아닌 다른 방법을 이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5층 건물의 모텔이었다. 1층에는 다른 모텔들처럼 카운터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약을 하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남매는 일단 모텔에 방문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돈을 지불한 뒤 카드키를 받아 위로 올라갔다. 1층부터 4층까지 유심히 둘러봤지만 수상한 점은 없었다. 5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다른 모텔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5층은 복도에서 보기엔 다른 층처럼 문이 여러 개 있었지만, 사실 입구는 하나였다. 그 문을 열고 나면 조직의 다른 은신처처럼 작은 입구가 나온다.
5층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전, 말소리가 나서 지켜봤는데 남자 세 명이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찾았다. 저곳이 입구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마약을 했던 여성에게서 들었던 곳을 찾아야 했다. 칸막이로 막혀 있는 작은 공간 안에는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을 테니까. 그 통로와 이어지는 곳이 어딘지 찾으려 했다. 그 통로는 아주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건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일단 옥상이 유력했다. 그들은 옥상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수상한 지점을 찾아봤다.
"찾았어!"
이한이 속삭이듯 외쳤다.
"어디?"
이한이 가리킨 곳에 흐릿하게 라인이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손잡이도 없는데 이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던 이나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납작한 도구. 그 도구를 라인에 집어넣어 밀어냈더니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통로 안에 사다리가 있었다.
"내가 내려갈게."
이한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고 이나는 5층으로 가 대기했다. 사다리를 타고 가던 이한은 하마터면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놈들은 치밀했다. 사다리가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지점 바로 아래쪽에 칸막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점프를 뛰어 문을 밀고 안으로 진입했다.
통로를 생각보다 빨리 발견한 덕분에 목욕탕 팀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한은 들어가자마자 칸막이 안에 있던 놈들 쥐어팼지만, 이미 놈은 벽이 밀릴 때 비상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들 역시 비상버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놈에게서 비밀번호를 알아내 이나 혼자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 있던 세 놈을 혼자서 해치웠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규모가 더 큰 만큼 그들이 발견한 세 개의 은신처 중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도 많았다. 서른 명의 조직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세 번째 은신처 장소인 폐건물. 도착하자마자 망치로 칸막이 공간을 부숴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던 도혁은 늦게 온 놈들까지 모두 15명을 삽시간에 쓰러뜨렸다. 고요함이 흘렀다. 이후는 경찰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와 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바로 차에 올라탄 도혁은 남매가 찾아간 모텔로 거칠게 차를 몰았다. 그는 불안과 초조로 미칠 것 같았다. 만약 이나와 이한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상상을 하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모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경찰이 와 있었다.
조직원 몇 명이 경찰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한과 이나는 보이지 않았다. 불안의 물결이 도혁을 덮치고 있었다. 그는 경찰 몰래 조직원 중 한 명을 건물 뒤로 빼냈다. 놈의 팔을 완강히 꺾으며 이나와 이한을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말하지 않으면 팔을 부러뜨리겠다고 무섭게 협박했다. 조직원은 장소를 불지 않을 수 없었다. 도혁의 표정과 힘과 음성으로 보아 틀림없이 팔을 부러뜨리고도 남을 기세였으므로.
그 시간,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한이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그곳은 예전에는 공장이었던 걸로 보인다. 바로 옆에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나가 쓰러져 있다. 손과 발은 묶인 채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입술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 흘러내린 피가 입술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다행히도 이나는 멀쩡해 보였다. 좀 전에 모텔에서의 상황이 떠오른다. 둘이서 서른 명을 상대하기란 버거웠던 걸까. 정신없이 싸우는 도중에 조직원 중 한 명이 이나가 잠시 방심한 틈을 노려 마취주사를 찔렀고, 쓰러지는 이나를 보고 놀란 이한의 뒤통수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희미하게 조직원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분은 저들을 왜 살려두라고 하는 거야?"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그분의 머릿속을 어찌 알겠냐."
"뭘 어떻게 하려고 조직원을 전부 소집한 거야."
그분?
얼핏 봐도 수십 명에 가까운, 아니, 100명에 가까운 조직원들을 보고 이한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손에는 연장들이 들려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단 말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부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부서지며 자동차가 한 대 들어섰다. 도혁이 차에서 내렸다. 화가 많이 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이한과 이나를 발견한 그는 포효했다. 짐승처럼. 하필 이한과 이나가 쓰러져 있던 위치의 주변은 붉은 피로 흥건해 있었기에 죽은 걸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혼자서 100명에 달하는 조직원들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굉음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 이나는, 피로 물든 이한의 얼굴을 보며 죽은 건가 싶었다. 이내 이한이 끈적한 피를 닦아낼 수 없어 힘겹게 눈을 뜬다.
"강이한. 너 괜찮아?"
"몰라 씨. 우린 망했어. 놈들 숫자가 겁나 많아."
"삼촌 왔잖아."
"바보야. 삼촌이 아무리 괴물이어도 혼자서 100명을 어떻게 상대하냐?"
"왜 혼자야? 우리가 있잖아."
"우린 손과 발이 묶여 있.."
어느새 뒤로 묶여 있던 손을 다 풀어헤친 이나는, 이한의 손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출발하기 전에 신발 속에 작은 접이식 칼을 끼워 넣었다.
"이 누나는 파워 J 아니겠니?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준비는 철저히 해야지?"
이한은 풀린 손으로 엄지 척을 내밀곤 묶인 발을 마저 풀고 일어섰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도혁에 이어서 갑자기 일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뒤에 있던 조직원들은 얼빠진 사람들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 상황을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고 차가 또 한 대 들어섰다. 수현과 준호가 내렸다. "아직 늦지 않았지?" 라면서. 마치 그 상황은 도미노처럼 착착 이루어졌다.
싸우면서도 이나와 이한이 괜찮은 걸 확인한 도혁의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괴물의 형상에서 삼촌의 형상으로 잠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싸움에 집중했다. 도혁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던 놈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놈들이 이나와 이한, 수현과 준호를 향해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 겨우 다섯이서 100명에 가까운 조직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CCTV로 지켜보던 '그분'은 생각했다.
저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왜 이따위 세상에서 히어로를 자처하는가.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한순간이라도 방심하거나 실수를 한다면 가족 중 누군가가 위험해진다는 걸 아니까. 온 힘을 다해,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일만이 서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조직원들의 반 정도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즈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끝까지 싸웠다.
사이렌 소리를 듣고 몰래 빠져나간 조직원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그 모습은 마치 야생동물의 전쟁 같았다.
곧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총소리와 함께 싸움이 중단됐다. 늘 이기는 가족의 몰골이 이번엔 아주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였다. 얻어터지기도 하고 칼에 베이기도 했으나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부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찬란한 승리 아닌가.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
모두 무사한지 가족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이나의 귓속에 할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늘 했던 말씀이다. 그녀는 지금 그 말의 의미를 생생히 실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싸움의 기술이나 괴력, 스피드, 우월한 감각, 단단한 근육이 아니라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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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는 가족> 연재 마지막화였습니다.
이제 세부적인 스토리와 대사, 묘사 등을 추가하며 조금 더 완성하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