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리니까 사람이다

by 신아연


어제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이라 종일 비가 왔을까요. 참 줄기차게 왔지요.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친구를 만나 비처럼 줄기차게, 장장 7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항상 말이 고픈 사람이라 올 풀린 스타킹처럼 어제도 '말 올'이 풀려 쉼 없이 대화했지요.


말이 고프다고 아무하고나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줏어먹지는 않듯이. 금식하면 배가 고프지만 금식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저는 기도 차원에서 묵언을 합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을 알아가게 됩니다. 저는 제 자신을 많이 알고 있는 편입니다. 이대로 신 앞에 섰을 때 발가벗겨질 모습으로의 제 자신을. 더 이상 가면이 통하지 않고 매끄러운 예의 따위는 물론이고 우울증으로도 도피할 수 없는.


저는 제가 왜 우울증에는 걸리지 않는지를 압니다. 우울증은 현실도피적 증세니까요. 가령 10년 전, 내가 이혼을 했고, 몸 누일 곳이 없고, 밥을 굶을 처지로 전락했고, 나 따위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면 우울증으로 빠졌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울증은 자기 보호적 기능을 합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는 막이니까요. 물론 무의식 차원의 일이지요.


저는 언제나 현실을 똑바로 마주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기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갑니다. 고여있지 않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거지요. 제가 가진 유일한 용기이자 덕입니다.


어제 만난 친구는 저의 대학친구입니다. 저를 참 존중합니다. 날마다 글을 쓰는 저의 성실성을 칭찬하고 저를 기본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저의 유치함과 '쪽팔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지요. 저는 이따금 쪽팔려서 어쩔 줄 몰라할 때가 있는데 어제가 그런 날이었고, 친구로부터 "쪽팔리니까 사람이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공감력이 있는 편입니다. 특히 쪽팔림과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할 사람들로부터 내처지는 것에 대해. 이 두 가지는 강렬한 관계의 감정이지요. 우리 모두는 취약한 존재입니다.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랑과 온기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소중히 다뤄지고 섬세히 보살핌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기초적 필요 정서가 자주 좌절될 때 저는 쪽팔림을 느낍니다. 수치심을 느낍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감정에 내몰리는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다루기 힘들어하는 감정이니까요.


남이 인정하든 말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나를 지지하는 타인이라는 거울이 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공허한 소리입니다. 거울이 없이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거울 같은 존재인 거지요. 제 자신을 좋아 보이게 비춰주는.


우리는 삶과 죽음, 관계, 실존적 한계, 늙어감, 인간 의식 및 신과 영혼 그리고 안락사까지 인간 존재에 대한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무엇하나 단순하게 정의하고, 단편적으로 결론 낼 수 없는 주제들이었기에 7시간 동안 물음표만 한 광주리 담아 안았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좀 더 사랑할 수 없을까. '삶, 사랑, 살아감'이 닮은 형태의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을까.'라는 골똘한 상념에 빠진 채 귀갓길 버스에 올랐는데, 보여야 할 교통카드가 안 보이는 겁니다.


당황도 잠시, "기사님, 죄송합니다. 저를 다음 정거장에 내려 주세요. 제가 버스 요금이 없습니다. 가진 돈도 5만원 짜리고요." "무작정 내려서 어쩌시려고요? 걸어가시게요?" "그럼 어쩝니까. 무임승차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려서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서 돈을 바꿔 다음 버스를 탈게요." "다음에 타실 때 카드를 두 번 찍으시고 오늘은 그냥 태워드릴게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짧은 순간, 그렇게 따스한 대화가 오갔습니다. 버스 기사의 친절한 배려에 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차오를 때까지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스위스 신아연33.jpg
20220929091713_1801819_1200_1500.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생존에서 의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