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바람 사이, 나의 계절> 시리즈 2 (6)
가을비가 주룩주룩 창밖을 적신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는
오래된 친구의 속삭임처럼 정겹고 따스하다.
아직 붉은빛도, 노란빛도, 갈색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단풍잎들이
이른 비에 떨며 투두둑 떨어져 나뒹군다.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럽고, 또 애틋하다.
계절의 옷을 입기도 전에 떠나버리는 잎사귀들처럼,
우리의 삶도 때로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맞이하곤 한다.
빗방울에 젖은 길가의 나무와 잔디는
한층 더 짙은 초록빛을 드러낸다.
쌀쌀한 공기 사이로 스며드는 자연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든 감성을 조용히 깨운다.
이맘때의 공기는 싱그럽고 담백하다.
마치 오래된 시 한 구절처럼, 가슴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때로는 잔잔한 음악처럼,
때로는 북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세상은 잠시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되는 그 고요함이,
삶의 무게를 잊게 해주는 가장 깊은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이국땅에서의 삶은
결코 낭만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예전처럼 가을비가 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도 현실의 무게가 한층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뒤뜰에 널어둔 붉은 고추가 비에 젖지 않게 덮어야 하고,
된장을 담그기 위해 준비한 메주가 비에 닿지 않게 챙겨야 한다.
이제 가을비는 감성의 풍경이 아니라, 생활의 풍경이 되었다.
문득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우산을 들고 고궁 뒷담길을 걷던 날,
가을비 내리던 대학로 카페 창가에서 시를 읽던 나.
그 시절의 감성은 이제 조금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낭만보다 현실이 앞서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
그것이 어른으로 산다는 일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가을비가 내리면
감기 걸릴까 걱정이 먼저 든다.
환절기의 큰 일교차는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이 가장 필요한 시간이 된다.
낭만보다 따뜻함이 더 절실한 계절,
그것이 지금의 가을이다.
오늘 저녁, 나는 하루 종일 수고한 남편을 위해
향긋한 부추전을 부치고, 구수한 청국장을 끓인다.
오메가3가 풍부한 고등어를 노릇하게 구워내고,
후식으로는 몸을 데워줄 생강차 한 잔을 준비한다.
가을비 속에서도 우리 식탁은 따뜻하고 단단하다.
빗소리가 멎어갈 무렵, 창가에 앉아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 순간, 문득 깨닫는다.
이국의 낯선 하늘 아래에서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소박하고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