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의 집안 이야기
명희의 집안 이야기
명희의 집안은 충청도의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 논산 연무대 근처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해가 기울자 땅거미가 논산의 골목마다 숨결처럼 내려앉았다. 기와지붕 위로는 저녁 볕이 마지막 붉은 자락을 떨구고, 공기 속엔 멀리서 피어나는 밥 짓는 연기가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기와지붕엔 이끼가 내려앉아 있었고, 사계절마다 다른 색을 띠는 들판이 집을 감쌌다. 마당 끝, 은근한 한약 냄새가 배어 있는 방에선 할아버지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명희의 할아버지는 선비였다. 어릴 적 서당에서 『논어』와 『맹자』를 외우며 자랐고, 늙어서는 스스로 약재를 연구해 한약을 달여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흰 도포를 단정히 입고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은 고고했지만, 실상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 곁엔 전혀 다른 기질의 할머니가 있었다. 말도, 손놀림도, 눈빛 하나 허투루 두지 않는 억척스러운 여장부. 모르는 길을 나서면 거리낌 없이 농부의 소매를 붙들었고, 중절모 쓴 노인이나 지게 진 사람,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아낙까지 누구에게든 물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 기질은 명희의 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공부를 좋아하는 기질은 할아버지에게서, 현실을 꿰뚫는 냉철함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했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군에 입대했고, 어머니는 막 시집온 새댁으로 낯선 말씨와 살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할머니의 곁과 떡집 일이었다.
할머니는 입영 훈련소 앞 장터에서 떡을 팔았다. 새벽 어스름, 찹쌀을 불리고 솥에 불을 지폈다. 김이 피어오르는 부엌에서 갓 쪄낸 떡을 광주리에 담고, 장터로 나가면 가장 먼저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떡 사려! 갓 찐 찰떡이여!”
그 기세는 흥정하는 손님도 눌러버렸다. 말 한마디 없이 떡 한 조각을 건넸고, 결국 사람들은 지갑을 열었다. 그 틈에서 어머니는 떡 반죽을 하고, 시루에 김을 쐬고, 절구를 두드렸다.
“떡은 손맛이야. 물 조절 잘해야 하고 찰기도 맞춰야 해.”
할머니의 잔소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미숙했다. 물을 너무 넣어 질척이거나, 찜이 길어 딱딱하게 굳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혀를 차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건 장에 못 내놔. 다시 해!”
절구질로 굳은살이 박인 손, 뜨거운 김에 부어오른 손가락. 어머니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모두가 잠든 후에야 등을 눕혔다. 며느리는 가족이 아니라, ‘노동력’이었다.
아버지가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지쳐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떡을 자르던 손을 멈췄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 손을 들여다보았다.
붉고 갈라진 손등, 절구에 눌려 평평해진 손바닥. 그 손이 지나온 시간 앞에서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며느리를 종 부리듯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적. 숟가락이 밥그릇에 ‘딸깍’ 소리를 내며 놓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주먹을 쥔 손은 떨렸다.
“이 사람도 사람입니다. 가족입니다. 잠이라도 푹 자게 해 주세요. 떡 장사는… 이제 그만하시죠.”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럼, 네가 떡을 찔 테냐?”
묵직한 정적.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조용히 베개를 적셨다. 그것은 억울함이었을까, 아니면 처음 느껴본 위로였을까. 아버지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