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개천가의 정희와 석준
늦가을, 개천가에서
둔덕 위의 정희
정희는 늦가을의 개천가를 걷고 있었다. 개천물은 잿빛으로 흐르고, 갈대는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따라 물빛은 더욱 흐릿하게 보였고, 수면 아래 무언가가 조용히 떠내려가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 속 십자가 펜던트를 꼭 쥐었다. 지난봄, 석준이 건네준 것으로, 반짝이지 않는 금속이었지만 손끝의 감촉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말 한마디가 남아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같이 걸어가고 싶어요.”
그러나 오늘은 정희의 마음이 상했다. 석준은 언니들 앞에서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은 말들이 이미 정해진 미래처럼 쏟아졌다.
학원에서도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아이들 앞에서 조심스럽지만 단정한 말투로 꾸짖음을 당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사랑은 있었지만, 그 사랑은 정희를 점점 작아지게 만들었다. 목소리보다 고개가 먼저 숙여졌다.
요즘 석준은 자주 다가왔고, 퇴근 무렵이면 항상 “잠깐, 얘기좀 해요”라고 말했다. 말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도 종종 서둘렀다.
함께 끓인 라면, 함께 드린 예배, 함께 부른 찬양. 조심스럽게가까워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조차 어느 순간 무게가 되었다.
그날 밤, 학원 주방에서 김이 오르던 라면 국물. 말은 없고, 증기만 가득했다. 자리를 뜨려는 순간, 석준이 정희를 안았다.
따뜻했지만 낯설었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숨이 깊어졌다. 심장은 느리게 뛰었고, 생각은 멈췄다.
“정희...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정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끝으로 몰려온 감정이 있었다.
“나도... 사랑해요.”
말은 나왔지만, 마음은 거기에 없었다. 짧은 입맞춤보다 길었던 것은 그 이후의 침묵이었다. 말보다 무거운 것들이 그 틈새로 스며들었다.
그는 원장이었고, 교회 오빠였으며, 이제는 결혼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정희는 그를 사랑했지만, 오늘은 숨이 막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녀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갈대밭 앞에 멈춰 선 정희. 물소리가 마음 가장자리로 스며들었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송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희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 손...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석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천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은 차가웠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 원장님. 전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따라가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정희... 아니, 송 선생. 정말 미안해요. 그냥... 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마음이 앞섰어요.”
그는 자신의 잠바를 벗어 정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천천히스며드는 체온. 말보다 조심스러운 손끝.
“앞으로는 같이 걸을게요. 당신보다 앞서지 않도록, 내 발걸음을 줄일게요.”
정희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잠시 침묵 후 고요한 숨결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말투부터 바꿔주세요. 가르치듯 말하면 숨 막혀요. 일할 땐 괜찮지만, 우린 지금 일하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무게 있게 닿은 듯했다.
“기다릴게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마음 다잡고, 내 옆으로 걸어올 때까지.”
정희는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입맞춤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또렷한 고요가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잠시 뒤, 정희가 말했다.
“이제야... 조금은 숨이 쉬어져요.”
정희는 살짝 석준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일어섰다.
“이제 가요.”
바람이 다시 불었다. 이번엔, 조금 덜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