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에게 내려온 붉은 십자가
붉은 십자가
그녀의 손끝이 움켜쥔 것은 석준이 준 십자가 펜던트였다.
그 십자가는 단지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느꼈던 밤, 어둠 속 붉게 빛나던 그 십자가와… 닮아 있었다.
정희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다.
예고 없는 사고였다.
산업 현장에서의 추락 사고는 늘 그렇듯,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황망했다.
“정희야… 아버지… 아버지가…”
그 말을 전하던 둘째 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희는 그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세상이 정지된 것 같았고, 심장도 더는 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정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랜 간병 끝이었다.
위로 다섯 살, 일곱 살 터울의 언니들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공장에 취직해 집안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가족의 중심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장례를 마친 밤, 정희는 방 안에 누웠지만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정희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공허함에 휩싸였다.
텅 빈 북처럼 울리는 가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진 듯한 절망.
“왜 나만… 왜 이렇게까지…”
창문 틈으로 스며든 늦가을의 바람이 커튼을 스치고, 정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바람은 찬 기운을 실어 와 몸 깊숙이 스며들었고,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대로는 안 돼…
그녀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밤이었지만 동네 개천을 따라 걷는 길은 익숙했다.
텅 빈 도로, 누렇게 바랜 가로등이 간헐적으로 어둠을 뚫고 있었다.
그 속에서 멀리 어렴풋이 붉은빛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 저건 뭐지?
정희는 알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그 불빛을 향해 걸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교회 종탑 위에 세워진 네온사인 십자가라는 걸 알아차렸다.
붉은 십자가는 어둠 속에서도 유독 또렷했고, 어딘가 따뜻해 보였다.
정희는 조심스레 교회 현관문을 밀었다.
“삐익—”
문이 열렸다.
잠겨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교회 안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정희의 발걸음을 인도하듯 본당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의 시선도 없이, 조용히 맨 끝 장의자에 앉았다.
바닥은 냉기 어린 나무 향을 품고 있었고, 공기는 마치 오래된 종이처럼 말갛고 낯설었다.
정희는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하나님… 정말… 계시나요…?”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
억지로 눌러왔던 감정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콧물도 줄줄 흘렀다.
손등으로 문질러봐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정희는 숨죽이며 흐느꼈다.
“끄윽… 끄윽…”
애써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은 손 사이로 새는 신음은 더 애처로웠다.
그 순간, 정희는 느꼈다.
마치 교회 안을 감싸던 달빛이 붉은 네온 십자가와 섞이며 그녀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십자가의 붉은빛이 환영처럼 정희의 눈앞에 다가왔다.
더는 멀리 있는 불빛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 이마 앞까지 떠올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묵직하고, 가슴속 깊은 어딘가를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 정희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비로소 예수의 사랑이 저절로 정희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의 연약함과 공포와 두려움은 인간에게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