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면체 사랑

민구와 학규와 일도

by 일도

제4면체 산수몽


‘몽(蒙)’은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계몽이다.

학생은 눈을 감고 있고, 선생은 그 눈을 뜨게 한다.




서울 한구석, ‘한국전자서비스센터’라는 번지르르한 이름 아래 숨은 허름한 사무실. 민구의 하루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커피 자국이 누렇게 번진 흰 플라스틱 테이블, 군데군데 갈라진 낡은 책상이 사무실의 전부였다.

그는 매일같이, 이곳으로 출근했다.


국가기술자격시험을 통과해 기사급 자격증을 손에 쥐었지만, 그리 높은 등급은 아니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선배 기사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너만 똑똑하면 여기서 돈 꽤 벌 수 있어.”


그 말에 자극받은 민구는 계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키는 조금 작지만 자신감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민구.그는 언제나 빳빳하게 다린 셔츠와 윤기 흐르는 구두를 신고 다녔다. 날카로운 눈매와 오뚝한 코 덕분에 전자제품 수리기사보다는 영업사원으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민구는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 덕분에 고객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고, 괜찮은 실적을 올렸다.

고객이 돈을 지불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민구. 그가 받은 돈은 사장과 반반씩 나눠 가졌고 일정 부분의 수입은 보고하지 않고 몽땅 자기 주머니로 들어갔다.

민구는 금세 다른 기사들을 뛰어넘는 수입을 자랑하는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민구를 불렀다.


“강 기사, 내일부터 신입들 좀 교육해 줘. 현장도 같이 다니고.”


민구가 맡게 된 신입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는 일도로, 민구와 동갑내기였고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마른 체격에 순박한 인상을 풍기는 일도는 아직 현장이 낯선 듯했지만, 예의 바르고 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의 울림 있는 목소리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신입은 학규로, 강원도 홍천의 작은 읍에서 올라온 청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이모 집에서 지내며 학원에 다녔다고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약간 절었지만, 당당한 태도가 인상적이고 짙고 검은 눈썹은 고집이 세 보였다. 그는 자주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우리 이모부, 청와대 경호원이야.”


그 말은 허세로 들리지 않았고, 학규는 단단한 속내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민구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며칠 후, 학규가 민구에게 제안했다.


“내가 일도보다 세 살 많지만, 친구 하자고 했어. 민구, 너도 우리랑 친구 하지 않을래?”


말투는 거칠었지만, 진심이 담긴 태도에 민구는 웃으며 답했다.


“그래, 고마워. 나이는 상관없지. 친구 좋지.”


일도는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다. 현장에 나갈 때마다 민구는그에게 고객 응대 방법부터 수리비 더 받는 요령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현장에서 번 돈, 회사에 다 보고하지 않아도 돼. 사장님도 다 알고 계시니까. 예를 들어 TV나 냉장고 입고되면 그 수리비로 사장과 나누면 되고, 현장의 수입은 네가 요령껏 해.”



민구는 조심스럽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일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따랐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꼈다.

고객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일도는 말을 보태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민구는 팔꿈치로 조용히 그를 막고, 눈빛 하나로


‘가만히 있으라’ 고 신호했다.

그런 순간이 반복될수록, 민구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화가 치미러 민구에게 몇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국에는 공식 전자 서비스센터가 거의 없던 시절, 수많은 사설 센터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민구는 다른 센터로 스카우트될 때마다 학규와 일도를 데리고 다녔는데 누군가 민구를 데려가면, 둘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학규는 그저 덤이 아니었고, 일도는 단순한 조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구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계산기를 두드렸다.


세 사람은 전혀 달랐는데 민구는 말없이 상황을 통제했고, 일도는 어리숙했지만 금세 익혔으나 사람은 이용하질 않았다. 학규는 느렸지만, 믿음직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우정과 실용, 기회와 의리 사이에서

얇은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의 물은 언제든 깊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도는 종종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민구는 잘해주는 같지만 속을 알 수 없었고 , 학규의 눈빛은 너무 우직했고 고집스러웠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 강에 발을 헛디딜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들었다.


어느 날 해가 기울 무렵, 셋은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현장 일을 끝낸 뒤, 근처 시골 마을에서 만나 막걸리 몇 잔을 걸쳤고,알딸딸해진 기분에 학규가 먼저 유행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날—”


학규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민구와 일도도 따라 부르며 웃었다. 낙엽이 내려앉은 한적한 시골길에 취기 어린 노랫소리가 퍼졌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이르자, 젊은 청년들 서넛이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쏘아붙였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이야, 시끄럽게. 동네 떠나가겠네.”


학규는 홱 돌아섰다. 눈에 불이 번쩍 켜지며,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라고? 니들이 누군데 반말이야, 어?”


청년들의 수가 두 배는 넘었다. 일도와 민구가 말릴 틈도 없이 학규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삿대질이 오가더니 결국 한 청년이 주먹을 들었다. 둘,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학규는 중심을 잃고 몇 대를 맞았다.


“야, 학규야!”

민구가 바로 눈치를 챘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일이 커지면 골치였다. 그는 재빨리 일도에게 눈짓을 보냈고, 둘이 힘을 합쳐 학규를 붙잡았다.

민구는 청년들에게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


“우리가 실수했어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싸움을 가까스로 말리고 셋은 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작은 파출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학규는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상을 치며 외쳤다.


“내가 맞았어요! 이거 폭행이에요! 당장 잡아줘요, 당장!”


순경은 묻기만 할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반응은 더뎠고, 학규는 이성을 잃은 얼굴로 전화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모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가 끝난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파출소 전화벨이 울렸다.


순경은 수화기를 들고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았다. 말끝이 부드러워지고, 손은 땀에 젖은 듯 책상을 문질렀다. 누가 봐도 겁을 먹은 태도였다.


전화를 끊은 순경은 헛기침을 하더니 박카스 한 병씩 따 주었다.


“그, 오늘 일은 저희가 잘 처리해서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꼭이요.”


그날 밤, 셋은 말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학규는 여전히 씩씩댔고, 일도는 담배만 피웠다. 민구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하나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이모부… 저 사람, 보통이 아니구나.’


그날 이후, 셋의 우정은 더 깊어졌고 민구는

이모부와 학규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민구는 가끔 일도의 세탁소 집에도 놀러 왔다. 학규도 함께였고, 세 사람은 좁은 다락방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룻밤 묵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일도의 어머니는 말없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셨다.

그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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