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동업
어느 날, 민구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두 사람을 다방으로 불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구와 학규는 이미 와 있었다.
여종업원이 웃으며 다가와 일도 앞에 잔을 놓으며 물었다.
“뭐 드릴까요?”
“커피요. 프림이랑 설탕, 두 스푼씩 넣어서요.”
여종업원은 익숙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민구는 얼굴이 상기돼 있었고, 학규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일도는 직감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일도, 이번에 우리끼리 서비스센터를 열어보자.
셋이서 부담하면 큰돈은 안 들어. 우리끼리 해볼 수 있어.”
일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민구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영업을 맡고, 수리는 셋이 나눠서 하면 돼.
부족하면 사람 쓰면 되고. 무엇보다 번 돈을 우리가 다 가져가는 거야.
운영비도 영업 수익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학규 이모부가 청와대에 계시잖아.
그분이 도와주실 수 있을 거야.”
일도는 그 말에 안심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불안이 남았다.
학규는 이미 결심한 듯 말했다.
“나도 하기로 했어. 이모부한테도 말했고, 걱정 말라고 하셨어.”
그날 밤, 일도는 다락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서비스센터 생각뿐이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새벽녘에야 눈을 감았다.
며칠 뒤, 아버지가 말없이 백색전화를 내밀며 말했다.
“가져가서 해봐라.”
엄마도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셨다.
술만 마시면 “나는 백색전화를 놓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그날만큼은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모한 길에 자식을 내몰면서도
말없이 등을 밀어준 어른의 방식이었다.
일도는 당연시하고 받아왔지만 그 속에는 부모의 속 깊은 사랑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사업은 초반부터 순조로웠다.
민구가 데려온 영업사원들은 유능했고, 기술자도 충분했다.
일도와 학규는 여전히 현장에 나갔지만, 마음가짐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내가 번 돈을 내가 가져간다.’
그 믿음 하나로, 피곤함도 견딜 수 있었다.
민구가 어떻게 그 족제비 같은 영업사원들을 다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과만큼은 확실했다.
어느 날은 선불금 들고 도망친 사원을 잡기 위해 함께 잠복까지 했고, 결국 돈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너무 잘 풀릴수록, 무너지는 속도도 빨랐다.
서울 전역에서 사설 서비스센터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더니
방송까지 타고, 영업사원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경리와 우리 셋뿐이었다.
경리마저도 월급을 포기하며 떠났다.
일도는 그제야 사태의 무게를 실감했다.
얼마 뒤, 을지로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참고인 자격이었지만, 그는 멍한 기분으로 경찰서에 들어섰다.
처음 밟는 경찰서의 낯선 공기가 일도의 숨을 조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형사의 담담한 목소리. 일도는 대답했다.
“하일도입니다.”
형사는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앳되고 순해 보였던 것이다.
“사장 맞으시죠?
이런 영업사원들에게 이용당한 건 알고 계셨습니까?”
일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몰랐어요.
그냥 전자제품 수리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와서, 회원 가입만 시키면 된다고 해서…
그게 불법인지도 몰랐어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말끝은 흐려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형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하지 마세요. 가셔도 됩니다.”
그날 이후 민구는 다시 수완을 발휘했다.
사태가 잠잠해지자 새 영업부를 꾸렸고,
결국 사업권은 권리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백색전화도 다시 일도의 손에 돌아왔고,
금전적 손해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야,
일도는 자신이 눈감은 채 걸었던
어리석은 하나의 몽(夢) 속에 있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