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편에서 모순(矛盾)에 대해 얘기했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잡일 하는 게 싫어서 이직하려고 하는데 이직하려고 이력서 쓰려면 엄청 일 많이 하고 잘 하는 걸로 써야 한다는 모순. 이직하기 위해 지금 회사에서 일 많이 해야 한다는 모순. 이거 참 괴롭습니다.
그리고, ‘모순의 타협점’에 대해서도 얘기했었습니다. ‘창으로 찌르면 방패가 거의 3/4 정도 관통되는데 어쨌든 완전히 뚫리지는 않았으니 막기는 막았다’는 타협안. 창과 방패가 서로 잘 협상(?)한 거죠.
프로이직러. 보따리장사. 회사원 세계의 저니맨.
결국 이직러도 ‘회사원’이고, 스포츠선수가 그러하듯 자기 종목을 잘 해야 인정받습니다. 이직 안 하고 한 회사에 정년퇴직까지 남든 / 일단 이직 시작하고 계속 저니맨으로 옮겨 다니든 간에, 기본적인 실력이 안 되면 버틸 수 없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그 실력을 120% 이상 발휘해야 하구요.
특히, [이직 성공한 직후]에는 더더욱 실력 발휘를 해야 합니다. 이직한 회사에서 인정받아 더 높은 수준의 일을 처리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야 하고, 그걸 발판으로 이 회사에서 오래 갈 것인지 / 아니면 또 다른 이직을 시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낯선 직장에 들어와 사람들 이름 외우기도 힘든데 ‘맡은 일을 넘어 다른 사람의 일까지 자기 일처럼 생각하라’고 하면 당연히 어렵죠. 아주 그냥 이 갈릴 만큼 어렵습니다.
그렇긴 한데…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습니다. 뭐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 다 되는 건 아니고 그런 정신승리를 할 이유도 없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 마음먹은 바에 따라 좀 바뀔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일을 내 것처럼]. 이 마인드 셋팅에 대해 좀 써 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을 기준으로.
(1) 직장인의 하루는 매우 길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자주 언급하는 건데, 우리 인생은 ‘세상에서 가장 길고 지루한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인생 그 자체보다 플레이 시간이 긴 게임은 없죠. 아주 그냥 실시간 리얼타임 노가다 RPG입니다.
우리는 이 기나긴 인생 RPG에서 각각의 목표를 설정해 레벨업(!)을 합니다. 헬스장 등록하면 매주 규칙적인 루틴으로 운동하면서 근육량을 키워 몸짱레벨을 올리고, 시험준비 할 때에도 매주 규칙적으로 암기하면서 정보량을 늘려 지식레벨을 올립니다. 가끔 연애 실패하면서 솔로레벨(?)을 올리기도 하구요;;
지겹고 답답한 걸로 따지면 ‘군발이 RPG’가 최고 난이도이긴 합니다. 아주 그냥 25개월 지겨워 죽습니다(저는 26개월에서 3주 줄어들어서 25개월 1주일 했습니다).
그런데, ‘총 플레이 시간’으로 따지면 직장생활이 가장 깁니다. 프로이직러든 한직장 말뚝맨이든 간에, 인간의 한평생 중 20~30년 가량을 평일 매일 9시간 이상 (점심시간 포함) 회사에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직장생활보다 더 긴 역할놀이는 없습니다.
(자는 동안 시체놀이 하고 꿈꾸는 게 있긴 하지만… 일단 이건 제외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나긴 하루 직장생활 중, “사무직 기준”으로 진짜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다들 솔직하게 말합시다. 의외로 ‘진짜 일만 하는 시간’은 8시간 꽉 채우지 않습니다. 핵심 업무를 3~4시간 집중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여유가 있습니다.
물론, 신입 때에는 8시간 내내 일만 배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아끔 업무량이 폭주할 때에는 더더욱 바쁠 수도 있습니다. 하루종일 보고서 쓰고 기획서 썼는데도 시간이 부족해 야근까지 하고 주말출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시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더라도, 그 와중에 ‘숙련도’라는 게 있습니다. RPG 게임에서 레벨업의 주요 요소인 경험치와 숙련도, 그게 조금씩 쌓입니다.
제조공장 운영하는 회사에서 자주 나오는 얘기인데, 사람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 숙련도가 1년에 5%씩 쌓이고 그만큼 일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육체노동 기준으로 숙련도 계산했을 때 그렇게 나오는데, 사무직이면 더더욱 줄어들겠죠. 제 체감상 1년에 10~15%는 단축되는 것 같습니다.
즉,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하루 8시간 화장실 갈 틈도 없이 계속 일하는 날은 줄어들고, 하루 중 여유시간이 생긴다”라는 상황이 됩니다.
대부분의 프로이직러들은 이렇게 여유시간이 생길 때쯤 첫 이직을 시도합니다. 이직시장에서 가장 hot한 ‘대리 급’이 되겠죠. 조금 빠르면 주임 급에서 이직할 수도 있구요.
이렇게 첫 이직을 시도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과장 진급을 노리고, 또 과장 타이틀 단 후 새로운 직장 찾아보는 과정에서. 가끔은 바쁠 수 있습니다. 당장 새로 맡은 일을 파악하고 그 일에 적응하느라 며칠씩 정신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분명 여유시간이 생깁니다. 현장 생산직도 마찬가지고, 사무직이면 더더욱 여유시간이 생깁니다.
길고 지루한 하루하루, 거기서 조금씩 늘어나는 여유시간. 이 여유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할 순간이 옵니다.
일단 여기까지 동의하셨다면, 그 여유시간에 ‘남의 일을 자기 것처럼 생각해서 처리하는 게 좋은 이유’로 넘어가 보죠.
(2) 남의 일 알아보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법무 직군입니다. 건설회사와 유선방송사를 거쳤고, 지금은 건설법무로 직장생활 정년까지 채우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이렇게 가끔 회사일을 가장한 개인 글도 쓰고 있구요^^;;
소제목에 “남의 일을 알아본다”고 했는데요. 이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써 보면,
첫째, 같은 부서 내 다른 직원의 일을 알아보는 것.
둘째. 같은 회사의 다른 부서 내지 업종 전체의 일을 알아보는 것.
셋째. 다른 업종 또는 다른 회사의 일을 알아보는 것.
넷째. 남의 일 따위는 아몰랑 하고 그냥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하는 것.
정도가 될 것 같네요.
개인적인 취미활동은 굳이 언급 안 해도 알 것입니다. 회사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저것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짬 좀 되는 직장인들 중에서는 주식투자 병행하시는 분도 있고, 가끔 핸드폰 게임하는 분도 있으며, 틈틈이 웹소설 읽으시는 분도 있습니다. 간혹 웹소설 쓰는 사람도 있구요(굳이 저 자신이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개인적인 취미활동 준비를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할 수 있죠. 근무시간에 골프/낚시 알아보고 좋은 와인 알아보고 웹소설 관련 저작권 알아보고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쉬는 시간도 있어야죠.
중요한 건, “딱 맡은 일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개인적인 취미에 몰빵하는 건 피하자”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직장생활은 ‘인생에서 가장 길고 지루한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사냥터에서 몹 잡아 레벨업 하는데 1레벨 올리는 데에 몇 년 걸립니다. 아주 그냥 지겨워 죽습니다.
이 지루한 레벨업 중간에 잠시 쪼렙학살 놀이(?) 할 수 있습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할 때 적 진영 쪼렙마을 찾아가서 몇 시간이고 죽치면서 쪼렙 죽이고 노는 것처럼 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레벨업 하러 돌아와야 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로 레벨업한다’는 걸 실행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처리하는 일. 그게 자신의 ‘경험치’가 됩니다. 숙련도가 높아지고 업무능력이 쌓이면서 언젠가 ‘승진이라는 레벨업’으로 나타납니다.
이 승진 레벨업은 꼭 한 회사 내에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이력서 한 줄 추가]를 통해 다른 회사로 이직 성공하면서 승진 레벨업을 할 수도 있죠.
이력서에 한 줄 추가. 이거 의외로 무섭습니다. 대리 급에서 잡일만 처리한 것 같은데 갑자기 ‘M&A 수행 경력’이 들어가거나, ‘공정위 조사 대응’이 들어가거나, ‘기업 형사사건 대응’이 들어가면 의외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안 시켜 주면? 회사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 같은 M&A 건이 있는데 과장 차장 급만 투입하고 대리 급은 빼면?
그럴 때 ‘남의 일 관심 갖기’를 시전하면 좋습니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자료만 봐도 되고, 그 일 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봐도 되며, 인터넷 자료를 뒤져도 되지만, 일단 관심 갖고 찾아보면 조금씩 알게 됩니다.
제 이력서에 여러 가지 업무이력이 있지만, 그 중 몇 개는 제가 주관한 게 아니고 서브(sub)로 수행한 일들도 있습니다. 공정위 하도급과 현장조사 대응 같은 게 대표적인데요. 당시 저는 대리 급이어서 직접 대응을 담당하지 못했고 제 선임인 차장님이 수행하셨는데, 일단 저도 이력서에 그거 올려 놓습니다. 당연히 누가 물어보면 다 설명할 수 있구요.
정부 차원에서 대기업 그룹 전체가 털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주관해서 대응했다고 하면 그건 이미 상무~부사장 레벨 이력서가 됩니다. 대리~과장 급에서는 모두 서브(sub) 업무 수행입니다.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졌는지, 사후적으로 이걸 정리해 봤는지 아닌지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질 뿐입니다.
프로이직러가 남의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까지 처리하려 하는 건, 결코 마음이 혜자스럽다거나 착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일을 익히고 언젠가 ‘자기 이력서에 한 줄 기재’하려고 알아보는 것이지, 절대 딴 사람에게 혜택 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즉, 프로이직러가 남의 일 해 주는 건 ‘몹 경험치 스틸(Steal)’입니다. 아재게임 리니지에서 딴 사람이 거의 다 잡아 놓은 몹을 막타쳐서 경험치 가져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철저히 프로이직러 본인을 위한 행동입니다.
(물론 리니지에서는 저런 식으로 막타 훔치다가 끔살당합니다만… 현실에서는 경험 공유한다고 해서 누가 죽이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지금 하는 일이 잡일 같다면. 혹은,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현재 하는 일만으로는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면.
남의 일을 넘보십시오. 직접 물어 보든 공유된 자료를 보든 인터넷을 찾든 간에, 남이 하고 있는 일까지 다 파악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자기가 주관해서 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보십시오.
그게 [이력서 한 줄 추가]로 이어지고, [면접에서의 말빨]로 이어집니다.
물론 귀찮죠. 많이 귀찮습니다. 당장 자기한테 주어진 일만 다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고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가는 것 자체가 귀찮아 죽겠는데 남의 일까지 살펴보라니, 아주 그냥 귀찮아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직러’라면 해야 합니다. 본인 레벨업을 위해 조금씩이라도 해야 합니다.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일을 훔쳐봐야 합니다.
웹툰 ‘가우스전자’의 사장. 그는 원래 산업스파이였습니다. 가우스전자의 영업비밀을 빼내기 위해 다른 회사에서 잠입시킨 스파이였고, 그래서 신임을 얻기 위해 뭐든 시키는 일은 다 잘 하고 모든 부서 사람들과 원만히 지냈으며 회사 일에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장이 되어 버렸죠…
뭐, 웹툰만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히 취미생활 하고 적당히 휴식하고 적당히 딴 짓 하기도 해야죠. 모두가 사장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해 결국은 ‘일잘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프로이직러, 충성맨, 산업스파이 모두 ‘일잘러’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 목표에 도전할 자격이 생깁니다.
일이 없으면, 일이 너무 잡다해 보이면. 다른 사람 일 넘보도록 합시다. 누구 도와 주는 게 아니라 본인 경험치와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