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나온 여자의 각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남편을 볼 때마다 침대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슬로 모션으로 침대에 떨어지는 남자가 나오는 그 선전 속 침대처럼, 남편은 뭐랄까… 흔들리는 인간이 아니다. 나와는 달리 감정 기복이 미비하다. 잔잔하다 못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갈 때가 대부분이다.
결혼 전 그의 평온함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살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게 되는 것도 같은 부분이다. 공사 기간 내내 남편은 평정심, 나에게는 없는 그것이 유지 됐다. 어느 날은 배꼽 밑에 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빡침이 있다. 대부분 내 감정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유독 혼자만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인 모습이 겹치며 몹시 꼴 뵈 기가 싫다.
“사람이 어떻게 저래” 나만 애가 탔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안돼!”
공정별로 따로 맡긴다고 했을 때도 안돼,
바닥 에폭시를 한다고 했을 때도 안돼,
실내 벽 공사를 한다고 했을 때도 안돼,
외벽 치장타일을 붙인다고 했을 때도 안돼,
잔디를 직접 깐다고 했을 때도 안돼,
등등등 둘이서 하겠다는 이야기에 모르는 사람부터 지인들까지 모두가 합심해서 “안돼”를 외쳤다.
남편은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그 말들에 그냥 ‘괜찮다’ ‘하면 된다’ ‘해 보면 알겠지’ 이런 잔잔한 말만 하니 확신 없는 내 속은 더더욱이 보글보글 끓었다.
‘안돼’ 속에 빠진 나는 안 되는 것을 상상했다. 잠이 들면 재난영화 같은 꿈 속에서 헤매다 찌뿌둥하게 일어났다.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 들 속에서 벌써 지쳐있었다.
매일 통화하는 동생에게 내일부터 진짜 둘만의 공사가 시작된다는 말을 하는 도중, “괜찮겠어?”라는 말 한마디에 배틀 붙은 래퍼처럼 쏟아냈다.
“되면 어쩔 거냐?” 로 시작해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적잖이 짜증이 나 있던 차에 괜한 동생을 낚아 채 잡도리를 했다. 나한테 할 소리를 동생에게 퍼붓고 나니, 더욱이나 맘이 좋지 않았다. 쭈그렁 해진 기분으로 길지도 않은 손톱을 깎는 내게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이 한 마디 했다.
“돼, 미리 걱정 말어. 그리고 못 하면 좀 어때? 못 해도 돼. 그리고 너 조소과 나왔잖아”
“뭐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졸업한 지 20년이 다 돼 간다.” 참신하지도 않은 말을 폭신 폭신하게 하고 있다니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생각하며 마저 손톱을 깎았다.
작업하기 전 날에 손톱을 깎던 버릇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몸에 배어있었다.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르니, 노동의 기억도 아직 몸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손톱을 정리하고 나니 차분해졌다.
그래, 그 비싼 침대 광고 문구 같은 남편을 한 번 믿어 보자. 나도 한 번 믿어 보자.
미대 나온 여자 그거 한 번 해 보자. 거울 앞에서 껄껄껄 웃었다.
차분해진 김에 ‘왜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하는 걸까?’ 생각했다.
친구들은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 우리를 염려하는 마음일 테고, 현장 분들은 우리를 모르고 안 해 본 일을 무턱대고 할까 봐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일이 안 될 것 이라기보다는 염려의 말이다. 다시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미 건물은 서 있는데? 이대로 변기만 앉힌다면 그냥 작업실로 쓸 수 도 있는 상태인데?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 해버리고 봐봐라 되지 않았냐라고 늠름하게 말하고 싶었다.
체력장에서 오래 매달리기와 오래 달리기로 점수를 내던 내가 아니었던가?
작업도 논문도 엉덩이로 뭉개고 뭉개 끝내지 않았나?
그동안 치른 행사가 몇 개냐?
그동안의 꾸준함을 억지로 떠올리고 치사하며 하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화장실과 부엌을 나누고 변기와 세면대를 앉혔다. 벽에 타일을 붙이고, 청소를 하고, 소화기와 화재경보기를 달고 준공 허가 서류를 넣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몇 달 만에 제대로 쉬었다. 늦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쇼핑도 하고 저녁에는 쇼핑몰에서 맥주병이 꽂힌 마르게리따를 시켜 건배를 했다. 앞으로 둘이 할 일에 대해 건투를 빌었다. 일주일 후면 준공이 날 것이고, 본격적으로 실내 마무리를 할 것이다.
이제 그만 부질없는 생각은 지우고 현실의 나는 이곳에서 바닥에 에폭시를 칠하고, 벽을 붙여 나가는 시작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에폭시 도포 영상을 찾아봤다. 유튜브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자세히 설명하며 쓱 쓱 쉽게 발라 나가는 한 영상을 계속 돌려 봤다. 해봐야 알겠지만 머릿속으로는 벌써 열 번 이상은 칠한 듯했다. 바뀐 마음 덕분인지 침대 없이도 편히 누워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고왔다. 참 곱다.
마침 생리가 터졌다. 누그러든 마음이 훨씬 더 너그러워졌다. 그동안의 꿉꿉하고 찜찜한 기분을 호르몬 탓으로 돌리고 나니 한결 더 가벼웠다.
그렇게 된다와 안 된다의 대결은 된다로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