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마르에서 한 시간을 달려서 스크라스부르에 도착했다. ‘길’을 뜻하는 독일어 ‘스트라세(Straße)’와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Bourg)’를 더해 이름 붙여진 도시이다. ‘길의 도시’라는 뜻처럼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각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일어로는 스크라스부르크라고 하는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지역이다보니 세계인들이 일반적으로 스트라스부르크라고 명명한다고 한다. 사실 나도 스트라스부르크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프랑스어로 '스트라스부르'로 부르기로 했다. 쁘띠 프랑스로도 유명하다.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차지한 이후부터 프랑스 땅이었다가 독일 땅이기를 반복한 알자스-로렌 지역의 대표 도시이다.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주의 주도였으나, 2016년부터 시행된 프랑스 행정지방 제도개편에 따라 현재는 그랑테스트의 주도이다.
인구는 27만 명, 광역권 인구는 76만으로 프랑스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 유럽연합의 유럽의회와 유럽인권재판소, 유럽 평의회가 소재하여 유럽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쿠덴베르크가 세계최초의 독일어 성경책을 인쇄했는데 스트라스부르에서 살면서 활동을 했다. 그 때문에 구시가지에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으며 그 곳에 그의 동상이 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인쇄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의 인쇄소들이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은 스트라스부르가 1201년 자유 제국도시 지위를 획득한 이래 특정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_방패교회가 보인다.
스트라스부르는 칼빈이 1538년 9월부터 1541년 8월까지 목회하며 저술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칼빈은 이 기간에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마틴 부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의 첫 목회지인 성니콜라스 교회(방패교회)로 찾아갔다.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헌정된 초기 교회 부지에 1387년에서 1454년 사이에 지어졌다. 뾰족한 첨탑은 1585년에 세워졌다. 내부는 17세기에 리모델링되었다. 1905년에 건축된 외관과 장식은 스트라스부의 Temple Neuf 출신의 건축가 Émile Salomon의 작품이다. 프랑스 피난민 위그노들을 위한 최초의 개혁교회로 칼빈은 이곳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목회 활동을 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사역 중 이곳에서 목회한 것을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했다고 한다. 칼빈은 교회 헌금의 대부분을 이주민과 고아들을 위해 사용했다.
1563년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공개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개혁파 개신교도들을 환영하기 위해 1788년에서 1790년 사이에 “방패”라는 의미인 "부클리에(Bouclier)" 교회로 다시 세워졌다. 구교가 다수인 프랑스에서 지금도 개혁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1900년에서 1913년까지 이 교회의 목사였으며 오르간 연주를 하였다. 슈바이처는 1908년 4월 11일 교회의 목사로 일하면서 독일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테오도어 호이스와 엘리 크나프의 결혼식을 축하했다. 내부에는 15세기 벽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Andreas-Gottfried Silbermann이 1707년에 제작한 오르간은 1967년에 해체되었다.
성니콜라스 교회(방패교회) 안뜰에는 싱그러운 나무들이 멋스러웠다.
방패교회 정문
방패교회 안뜰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노트르담(Notre Dame)은 불어로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파리에도, 루앙의 대성당에도 노트르담이 붙는 이유이다.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은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트라스부르 옛 시가지의 중심에 있다. 1176년에 짓기 시작하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무렵이다.
지상에서 첩탑까지 높이 142m로 1439년에 완성하였는데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크다. 보주산맥에서 가져온 붉은 사암으로 지어 붉은 빛깔을 띤다. 보통 고딕 양식 성당들은 첨탑 2개가 대칭 구조를 이루는데 이곳은 첨탑이 하나뿐이다. 당시 경제적인 이유로 첨탑을 못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는 첨탑이 한 개만 있는 것이 유행이 되다 보니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성당 외벽엔 성당을 짓는 데 돈을 기부한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두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성가대석,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정탑(頂塔) 등은 로마네스크양식, 뾰족한 첨탑, 서쪽의 문들, 예배당 회중석 등은 고딕양식으로 건축하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안은 천고가 아주 높다. 13세기에 만든 '천사의 기둥'과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각각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오른쪽을 보면 높이 18m의 천문시계가 자리한다. 매일 12시 30분이 되면 종이 울리는데, 이때 장식들이 움직이며 어린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노인으로 그 모습을 바꾼다. 종이 울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시간대인 12시에서 12시 30분까지의 입장객에게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4시 이후에 갔기 때문에 무료로 입장했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내부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천문시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외관에 섬세한 장식과 조각들이 많았다. 시티투어 기차가 대성당을 거쳐 쿠텐베르크 광장으로 간다.
스트라스부르 시티투어 기차_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앞
쿠텐베르크 광장에 들어섰다. 일부 지배층과 귀족들만 독점하던 책과 문자를 일반 시민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리고 빛이 있었다(Et la lumirer fut)’라는 활자가 찍힌 종이를 들고 있는 구텐베르크의 동상이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다. 동상 하단에는 인쇄술에 관련된 부조가 사방으로 새겨져 있다.
광장주변에는 상점과 노점, 레스토랑이 있다. 쿠텐베르크 동상 옆에는 화려한 회전목마가 있다. 연말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성탄츄리와 기념품들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여서 스트라스부르를 "크리스마스의 도시"라고도 한다. 쿠텐베르크 광장을 떠나기 전에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림자처럼 따라 가 보자는 마음으로 우리의 그림자를 찍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