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라 본격적으로 눈문 준비에 들어갔고, 나는 1월에 다섯개의 대학에 지원했는데 세곳에서 오퍼를 받게 되어 9월부터 어느 대학을 다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 석사 마치고 한국 돌아가게 되면 너 혼자 영국에 있어야 하는데 괜찮아?"
"어쩔 수 없잖아요... 장거리 연애해야지"
"난 안 괜찮은데? 어떻게 떨어져 살아. 난 진짜 너 안 보고 하루도 못 살아"
"나도 오빠 없이 혼자 살 거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긴 해요"
그가 영국에 있기 위해선 취업을 해야 하는데 당시 유학생이 졸업 후 워크 퍼밋을 받아 취업을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4월에 유산을 한 이후로 더욱 철저하게 피임을 시작했다.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된 생명으로 인해 나와 그의 인생을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가는 변화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어느 주말 하이드 파크까지 산책할 겸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기던 중이었는데, 앞에 동양인 무리들이 우리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중에 한 명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전 남자친구의 남동생이다. "어머, 런던 놀러 온 거야? "하는 찰나 전 남자 친구와 그의 부모님이 기념품 가게에서 나왔다.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 중 한 분은 당시 방송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유명인이라 내 옆에 서있던 그도 알아봤다.
전 남자친구는 본인가족과 이모네 가족들까지 유럽 여행을 오게 되었고, 첫 번째 국가가 영국이라고 했다.
그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하이드 파크를 향해 걸어가는데 그가 물었다.
"전 남친이 ㅇㅇㅇ 아들이었네? 왜 말 안 했어?"
"응? 그거를 말해줘야 되는 거예요?"
"저 사람들한테 왜 나 소개 안 시켰어?"
"... 좀 이상하잖아요... 어차피 팔짱 끼고 있어서 무슨 사이인지 알았을 텐데..."
"저 자식 얼마나 만났어?"
"음.. 2년 좀 넘게요..."
"어디서 만났어?"
"스키장"
"왜 헤어졌어?"
"오빠... 나 쟤랑 99년 초에 만나서 2001년 초에 헤어졌고, 지금 2004년이야. 그 사이 만난 적도 없고 나도 지금 당황스러운데..."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첫 남자친구야?"
"네"
"내가 두 번째 사귀는 거고?"
"네"
"저 자식이랑 다 처음 해본 거겠네?"
"뭘 처음?"
"다... 스킨십... 키스, 섹스... 다..."
"... 오빠는 나 이전에 4명 사귀어 봤다면서요. 내가 전여자 친구에 대해서 물어보면 오빠도 불편하지 않아요?"
"아.... 몰라. 갑자기 너무 짜증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냥 집에 가자. 기분이 아니야"
낯선 그의 모습에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말 없이 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눕혔다. 스커트 자락이 거칠게 끌려올랐고, 내 거부의 말과 몸짓은 무시당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의 분노와 혼란이 폭풍처럼 쏟아지는 동안, 나는 그저 눈을 감고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다 마친 그가 따뜻한 물수건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흔적이 묻은 나를 닦아 주었다.
충격으로 몸이 계속 떨렸다. 눈을 감고 마음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옆에 누워 나를 안았다.
"미친놈처럼 굴어서 미안해. 전 남자친구에 대해서 궁금했던 적 없었는데 막상 보게 되니 질투가 났어. 유명인 자식이니까 우리 집보다 잘 살 테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고... 위기감이 느껴진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너한테 화난 게 아니고 나한테 화났어. 놀랬어? 놀랬지... 미안해.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왜 그랬냐고 따지기도 두려웠다.
이 일이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알려주는 첫 번째 메시지였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