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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24, 프러포즈를 받다.

by 티타임 스토리

그와 나는 언제부터 사귄 건지 모르게 연인이 되어 있었다.


12월 ... 그의 석사 과정 1학기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에세이를 제출해야 해서 거의 도서관이나 그의 집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그의 집을 드나들며 옆집에 사는 웨일스 출신의 데이비드를 알게 되었다. 마주치면 간단히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한국인 번역 업무를 할 사람이 필요한데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마침 파트타임 일을 찾고 있던 나는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4시간씩 데이비드의 회사에서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무실은 세인트폴 대성당 근처 영국 특유의 클래식한 건물 안에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럭셔리함과 모던함이 공존했다. 미국계 마케팅 회사였는데, 한국의 모 기업에서 의뢰받아 마켓 리서치 리포트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페이도 시간당 20파운드(당시 환율 약 4만 원)로,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3~4배는 높았다.


매일 한국에서 보내주는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정리한 뒤, 마지막에 나의 의견이 담긴 코멘트를 달아 주면 되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작성한 문서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사용한 폰트와 사이즈 그리고 문서 양식을 템플릿으로 정해서 다른 직원들도 모두 그렇게 사용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이 내려왔다. 인정 받는 것 같아 뿌듯했다.


오전에는 어학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회사에서 알바를 한 후 그의 집에 가서 저녁을 함께 먹고 9시쯤 집에 돌아왔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어느 날 업무를 마치고 회사 사람 몇 명이 펍에서 술 한잔하자고 해서 조인하게 되었다. 그는 에세이를 마무리하고 발표 준비까지 해야 해서 정신없이 바빴기에, 그날은 그의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귀가하기로 얘기를 했다.


영국 직장인들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에 관한 것, 축구 이야기, 음식과 여행 이야기 등... 20대부터 50대 초반까지 격 없이(적어도 외국인인 내가 보기엔)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술 마시는 문화가 보기 좋았다. 나도 나중에 이런 회사에 정식으로 취업해서 그들처럼 여유 있고 유쾌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9시 조금 넘어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러서 돌아보니 내 룸메이트와 그녀의 영국인 남자친구였다. 둘 다 술이 많이 취해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오늘... 얘가 갈 데가 없어가지고, 우리 방에서 같이 자야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미안해."


"남자친구가 왜? 형이랑 산다고 하지 않았어?"


"응... 형이랑 대판 싸웠는데 들어오지 말라고 했대."


화가 났다. 같은 여성인 친구가 와도 불편할 마당에 룸메의 남자친구랑 셋이서 한 방에서 자야 한다니...


일단 둘이 먼저 들어가라고 한 후 그에게 전화를 해서 이 얘기를 전달하니, 당장 짐을 챙겨서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도 가기가 망설여졌다. 사귄 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생각해 보고 전화를 다시 하겠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짐 챙겨서 기다려."


"아니에요. 오빠 에세이도 마무리하고 발표 준비하려면 오늘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나 가면 방해만 되지."


"어차피 너 안 오면 나 오늘 아무것도 못해. 너 방에 남자가 자고 간다는데 괜찮을 수가 있겠어?"


난 그를 이길 수 없다..


"알겠어요...짐 챙겨서 갈 테니까 데리러 오지는 마세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방에 가서 외박할 짐을 챙겼다. 백팩에 수업 교재와 노트북, 잠옷으로 입을 면티와 바지, 양말, 속옷, 내일 입을 옷, 칫솔, 화장품을 넣으니 공간이 부족해졌다.


내가 짐을 싸건 말건 룸메이트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보드카와 과자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많이 취했는데... 저렇게 먹다가 방에다 토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얼스코트역에 도착하니 그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내 백팩을 가져다 메더니 "아이고, 왜 이렇게 무거워. 하루만 있을 게 아닌가 본데?"라며 웃었다.


내 표정에서 심란함이 보였던 걸까...


"나 오늘 밤새야 돼. 혹시나 쪽잠 자더라도 소파에서 잘 테니까 침대 혼자 편하게 써."


그의 배려심과 따뜻함은 얼어있는 나를 늘 녹게 만들었다.


"저 혼자 침대에서 자라고요? 아쉽네."


"엇... 너 임마 지금 꼬시는 거야? 나 오늘 무리 한번 해봐?“


근처의 테스코에 들러 초콜릿과 우유를 사서 집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책과 자료들이 널브러져 있는 식탁.

그는 바빠서 저녁도 안 먹었다며 우유 한 잔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맥주 마실래?"

"아뇨. 오늘 퇴근하고 술 많이 마셨어요."

"맞네... 피곤하겠다. 그럼 일단 씻을래?"

"네."


갈아입을 옷과 가지고 온 세면 용품들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낯설고 어색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는 어느새 책상에 앉아 에세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내 노트북을 꺼내어 소파에 앉은 후 이어폰을 꽂고 '프렌즈' 시리즈를 틀었다. 그가 에세이를 다 쓸 때까지 나도 함께 밤을 새워주려고 했는데, 회사 사람들과 마신 술 기운 때문인지 슬슬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그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침대에 가서 자. 너 언제부터 여기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었니."


"지금 몇 시예요?"


"한 시."


비몽사몽 그의 침대에 누웠다. 그도 내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었다.


"오빠 다 했어요?"


"아니...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나를 꼭 껴안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시 책상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난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 우리 사이의 마지막 경계가 사라졌다....


새벽 6시 30분.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났다. 그는 이미 샤워까지 마친 상태로 발표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도 씻고 나와 바쁜 그를 위해 크루아상과 커피, 그리고 오렌지를 아침으로 준비한 후 식탁으로 불렀다.


"와... 내 아침을 누군가 챙겨주는 건 처음이야. 너무 좋다."


"저도 다른 사람 아침 처음 챙겨줘요."


"근데 너 왜 나 안 쳐다보면서 얘기해? 화났어?"


"아니... 왜 화가 나. 그냥 오빠 얼굴 보기가 좀 부끄러워서..."


"어이구... 공부하려는 사람 자기가 꼬셔 놓고 이제와서 부끄럽대..."


서로의 온기 속에 잠시 세상을 잊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12월 22일...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를 해줘 그와 함께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다. 그는 처음 본 사람과도 편하게 대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돌아다니며 회사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번호도 교환하는 그를 보며, 해외 생활하기에 타고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대중교통도 없고,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사가 1월 2일까지는 쉬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은 그의 집에서 함께 있기로 했다.


사온 영화 DVD를 함께 보고, 요리를 하고, 음악을 함께 듣고, 그가 알려주는 와인을 마시는 소소한 일상이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12월 25일 이른 아침,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할렐루야! 네... 네? 진짜요? 여자친구?"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윙크를 한 번 하더니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다시 들어온 그가 아침 먹으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이미 잠도 깼고, 얘기도 궁금해서 얼른 씻고 나왔더니 그의 부모님이 엄청나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데, 담임 목사님께서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물어보라고 해서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맺어준 사람이니 절대 헤어지면 안된는 당부도 하셨다며 그가 웃었다.


"오빠는 왜 교회 안 다녀요?"


"나도 한국에서는 다녀. 영국에서는 감시자들이 없으니 안 가는 거고..."


"진짜 의외다. 교회 다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왜?"


"매일 술 마시지, 담배도 피우지..."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착하게 살면 되지."


"나는 교회 안 다니는데... 어떡해요?"


"음... 우리 부모님 아무것도 안 보는데 교회는 다녀야 하거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제부터 다닌다고 하면 될 거야."


교회... 내 주변에는 가식쟁이들만 죄다 교회 다녔었는데... 하지만 그를 보면 그의 부모님도 얼마나 선하신 분일지 짐작이 가면서 마음이 놓였다.


그날 저녁, 영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를 위해 집에 있지만 옷도 갖춰 입고, 요크셔 푸딩, 감자와 야채를 굽고 그레이비 소스도 준비했다. 이제는 와인도 너무 드라이하지만 않으면 제법 마실 수 있게 되어 건배를 하고 와인잔을 내려놓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아끌어 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하자."


내가 뭘 들은 거지? 반지는 언제 산거야? 만난 지 두 달도 안 되었고, 난 아직 24살(만으로 23), 그도 겨우 28살에 학생인데... 왜??


"우리 아버지 대학 교수고 엄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야. 나 장가보낼 준비도 다 해놓으셨고, 배우자 기도 올해부터 시작하고 있었는데 네가 나타난 거야."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와의 결혼이 부모님의 뜻이라는 건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지...


무엇보다 성급하거나 섣부른 결정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결혼이라는 엄청난 일을 '내일 영화 보자'라는 말처럼 쉽게 내뱉는다는 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이때 거절을 했다면 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영혼이 파괴되는 일들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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