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들처럼 달려보았어
'오늘은 어디로 달려볼까'
새벽에 일어나 끄적끄적 만년필을 들고
기도문과 긍정확언 책을 필사하는
조용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의 분주한 아침이 시작된다.
아이 도시락 싸며 아침 차려주기.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은 7시 55분 전후.
그때가 나의 달리기 시간이다.
어디서 달릴지 행복한 고민은 이미 필사하는 중간에 끝났다.
아이를 데려다 줄 때는 학교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서 시작해서
큰길 맞은편에 있는 공원묘지를 달리기도 하고,
주말에 길게 달릴 수 있을 때는 해협을 따라 나 있는 수변 길을 달리기도 하고,
큰 호수와 그 주변의 초원에 있는 흙길을 따라 달리기도 한다.
어디를 달리든, 달리면서 무념무상으로
근육의 움직임과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처음 공원묘지를 걸었을 때 기억이 난다.
공동묘지가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 좋은 모습일 수 있구나.
한여름 초록초록할 때는 그냥 나무 많은 공원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12월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거리는 나무들,
그 위에 눈까지 쌓인 모습을 볼 때면
'내 눈이 호강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맑은 날, 강 같은 바다를 보며 달리면 물 위로 펼쳐진 윤슬이
내 마음까지 반짝이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곳은 큰 호수가 있는 들판이다.
한쪽에는 양들이, 다른 한쪽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들이 있다면,
스위스 부럽지 않은 풍경인데 그게 좀 아쉽다.
근데 그게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좋을 것이다.
가파른 언덕이 거의 없는 평평한 나라라는 것이.
이런 풍경을 보며 달리는 호사도 이제 며칠 안 남았다.
마지막까지 즐겨야지.
덴마크에 올 때,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유럽에서 하프 마라톤 달리기.
그런데,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
마라톤 정보를 찾아보니
가까운 곳의 마라톤 대회는 이미 마감이었다.
역시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다웠네.
내가 그걸 깜빡했다.
그래서 나 혼자 하프마라톤을 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런데이가 있으니까!
런데이 9월 마라톤을 신청해 뒀다.
혼자 달리고, 그 기록을 박제해 두는 걸로
덴마크의 마라톤은 정리한다.
덴마크는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인 것 같다.
겨울의 차가운 비바람 속에서도, 어두운 아침과 저녁에도
밖에 나가면 어디든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 달리는 사람도 많지만,
저녁이나 주말에는 그룹으로 달리는 사람도 많은데
겨울에는 어둠을 뚫고 반사 조끼를 입고, 헤드램프를 착용한 채 여럿이 모여 달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여름과 달리 겨울에는 맑게 개인 날씨를 보기는 어려운데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심하게 쏟아지지는 않고, 기온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일 년 내내 이곳은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 사이에서 달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처럼 달려보았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마주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미소와 응원의 인사를 건네며.
여기서 달린 기억이 나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나다운 시간. 내가 달리기를 했던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