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 그시절
[어느작은산골소녀의 사랑이야기]
노래를 듣는 순간, 아련해졌다.
아름답고 넉넉한 시골 풍경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고, 순수하고 풋풋한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이내 눈 앞에 펼쳐졌다. 잔잔한 멜로디에 어쩐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막연한 그리움이고 막연한 애틋함이다. 어느새 기억은 내 어린시절을 뒤적이고 있다.
넓은 논두렁 사이를 뛰어놀며 달콤한 수박서리를 하던 그 시절, 놀이터나 특별한 놀거리가 없었지만 나무타고 앵두 따 먹으면서도 하루는 심심치 않게 잘도 흘러갔다. 밤이 되면 랜턴 빛을 의지하며 낮게 깔린 어두움과 짙게 깔린 두려움에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으면서 도착했던 푸세식 화장실. 연년생인 동생 없이는 절대로 갈 수 없었던 캄캄한 밤의 화장실 앞에서 서로를 기다려주었던 그 시절의 어린 나를 부지런히 좇게 한다.
시골의 여름은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햇볕에 바짝 마른 흙길,
그 옆으로는 싱아가 지천에 자라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었고,
한 번 꺾으면 새초롬한 풀향이 손끝에 남았다.
어린 나는 그 풍경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당연하게, 늘 거기 있을 거라 믿었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그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작가는 유년의 시골을 세밀하게 그린다.
부엌 앞 장독대, 낮은 돌담 너머 보이는 들판,
한낮의 햇빛이 반짝이던 개울물까지.
그 장면들은 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여름의 냄새를 깨웠다.
싱아는 그저 들풀이다.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름조차 잊힌 채 사라졌다.
하지만 작가의 문장에서 싱아는
유년 시절의 상징이 된다.
넘쳐나던 자연,
그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라던 어린 날의 나,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 많던 싱아가 사라진 것처럼,
그 시절의 순수함도 세월 속에 조금씩 희미해졌다.
책장을 덮고 나니,
나도 모르게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을 찾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있던 살구나무,
여름이면 달콤하게 익던 복숭아,
밤이면 반짝이던 별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아마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싱아’를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오래된 골목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름방학 끝날 무렵의 저녁놀일 것이다.
그것들은 사라졌지만, 사라졌기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나에게
‘사라짐’이 꼭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의 풍경과 감정을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것.
싱아처럼 평범했지만,
내 삶을 지탱해 준 순간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