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드라이브
살갗에 느껴지는 찬 기운이 어느새 가을을 가리킨다.
무심코 뒷마당에 여기저기 떨어져 흩어진 사과나무 이파리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다가 식탁 위에 제법 안정적으로 앉아있는 탁상 달력으로 눈길이 간다.
일요일 말고도 그 옆에 빨간 숫자가 연이어 보인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월요일이 공휴일이라 주말 포함해서 3일을 쉬니까 이번주는 연휴(long weekend)가 되는 셈이다.
여행을 갈 만큼 긴 시간은 아닌데도 휴일이 시작되기 전날의 금요일은 괜히 설레고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불금을 즐길 것도 아니면서 뭔가 특별한 계획이 없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다음 주는 5일이 아닌 4일만 일해도 되니까 연휴가 지나도 끝이 아니라 다음 한주까지 당겨 보상받는 그 느낌이 좋아서가 아닐지?
보통의 휴일에 덤으로 하루가 더 주어지다 보니 왠지 시간이 더디게 간다는 잠깐의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보다는 정작 크리스마스이브에 열광하고 보내기 아쉬우니 차라리 밤을 새우며 즐기기도 하는 그 마음처럼 연휴보다는 연휴 이브인 금요일 저녁이라서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걸 수도 있다.
전자레인지에 팝콘을 돌려 먹으며 늦도록 영화를 보고 내일 아침 해가 방 유리창을 두드릴 때까지 게으름 피우며 늦잠을 자도 좋을 것 같고 옛날 음악을 들으며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책을 읽는 여유를 부려 봐도 좋고 아이들이 귀찮게 하거나 잘못을 해도 다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런 낭만적인 생각들과는 달리 현실은 결국 또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보내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다.
기껏 간다는 곳이 슈퍼이고 방공호에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카트에 먹거리와 생필품을 잔뜩 싣고 돌아오는 게 그저 그런 휴일의 일상 일 수도 있다.
집밥이 지겨워 쉬는 날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저들도 즐겨야지 월요일엔 문을 연 식당이 없다.
갈 곳 없는 우리는 가끔 식당 찾아 삼만리를 떠난다.
어느 날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기껏 오픈했다고 해서 열심히 그곳만을 향해 달려갔는데 그 사이 굳게 닫혀있는 문이 허망하게 우리를 반기기도 한다.
아무 죄도 없는 식당 주인을 비난하면서 우리 굶어야 하는 거야? 집에 가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 되나? 한 끼라도 부엌에서 벗어나 남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싶어 온 건대...
다른 날 쉬지 왜 하필 오늘... 너무하네 증말~!
체념하고 돌아가려는 우리를 보고 건너편 몰에서 여기요 여기~! 반짝반짝 오픈 사인이 깜박이며 멀리서 접선하듯 신호를 보내온다.
가 본 적 없는 곳이라 잔뜩 의심을 안고 들어선 널따란 가게 안은 텅 빈자리들만 누가 자신의 주인이 될까? 기다리고 있고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뿐인 그곳 베트남 국숫집에서는 마감준비를 하는 주인 부부 둘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늦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원래 음식점은 손님이 북적이는 곳을 가라고 했는데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음식을 먹어도 되는 건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찌꺼기만 남은 거 아닐까? 과연 맛이 있기는 한 걸까? 갖가지 의문을 품은 채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좀 전에 음식점 찾아다니며 투덜대던 때는 벌써 다 잊은 건가?
음식을 내주겠다는데 맛까지 기대하다니 너란 사람...
오래되어 다 쓰러져가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판잣집에서 자신들의 몸 하나 건수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나이 많은 노부부가 만들어 내는 음식이 어쩌면 미슐랭 5 스타가 화려하고 예쁘게 꾸며놓은 그 어떤 것 것보다 더 맛이 있을 수가 있으니 약간의 기대를 더해 배고픔에 허기진 우리는 일단 주문을 한다.
"고수는 빼주세요" 했더니 "우리 집은 원래 고수 안 넣어요" 혼내는 듯 빽빽거리는 목청으로 주인아줌마가 말한다.
아~ 네~!
뻘쭘해진 우리는 말 잘 듣는 얌전한 아이들처럼 조용히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린다.
드디어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국수가 나온다.
남편이 라임즙을 짜 주고 고춧가루와는 다른 맛이지만 스리라차 소스를 뿌려 한국인의 매콤한 입맛에 비스무리하게 맞춘 다음 휘휘 저어 기미상궁이 음식맛을 보듯 국물 한 수저 떠서 천천히 맛을 음미해 본다.
국수는 국물이 좋아야 하는데... 음~~ 생각보다 맛이 꽤 괜찮다.
의심의 긴장이 풀어지니 남편도 나도 후루룩 후루룩 잘 먹는다.
우리를 다 마다했지만 유일하게 반겨준 그곳에서 한식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뜨거운 국물이 있는 베트남식으로 땀 뻘뻘 흘리며 겨우 한 그릇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이 보통의 하루와 다르지 않은 채로 휴일이 끝나버리곤 한다.
연휴에 집에만 있기는 서운해서 오랜만에 남편과 가을맞이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어차피 한 달에 한 번씩 반복되니까 "다음에 하면 되지"로 자꾸 미루다 보니 밖으로 나가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모처럼 만에 큰맘 먹고 움직여 볼까?
그런데 또 막상 나가려고 하니 마땅히 갈 데도 없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다녀봐야 어디가 좋은 지 잘 알 텐데 오랜만에 하려니 막막하다.
아들이 있을 땐 그래도 핑계김에 자주 나갔었는데 역시 셋이 더 익숙해서인가?
둘만 남으니 더 잘 안나가게 되는 듯하다.
어디 가지?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묻는다.
오늘은 반드시 나가보리라 마음먹고 아침 겸 점심 대충 먹고 남편 대신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길을 나서본다.
우리의 오랜만의 외출을 훼방 놓고 싶은 지 투적투적 가을비가 내린다.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했으니 물러날 수 없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함께 조금 달리다 보니 언제 개였는지 빗물로 깨끗이 씻어낸 듯한 파아란색 하늘이 펼쳐지고 이미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너른 들판에는 해이(hay) 더미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드 넓은 초원 위에는 소나 말들이 살랑살랑 꼬리를 저어가며 저들만의 대화로 수다를 떨고 가끔씩 땅에 머리를 박고 뭔가를 찾아가며 만찬을 즐기는 듯하다.
가을은 나뭇잎만 물들이는 게 아니었나?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가지가지 색을 자랑하는 차량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쓩~쓩~ 비껴간다.
같은 마음으로 집을 나서 이곳에 왔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가족과 함께 간식을 챙겨 먹고 있고 산과 호수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제 막 도착한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으니 요 시기에 보여주는 낙엽 지는 쓸쓸한 경관을 담고 싶어 남편과 둘이 셀카봉도 없이 열심히 찍고 있는데 RV를 타고 와 우리 옆에 차를 댄 아줌마가 우릴 찍어주겠다고 친절을 베푼다.
사진에 조회가 깊은지 나름 요리조리 핸드폰을 돌려가며 전문가 포스를 내며 찍어댄다.
예상과는 달리 바람에 날린 머리가 얼굴을 가려 어색한 사진들만 남는다.
전문가는 아니었던 걸로...
넓디넓은 호수를 보면서 불현듯 옛날 대학시절 엠티의 성지라고 불뤼 던 대성리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추억들은 언제 어디서나 제멋대로 툭툭 튀어나온다.
옥장판을 깔아놓은 듯한 물 색깔이 너무 이뻐 또 한 번 찰칵찰칵...
하이웨이를 끼고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으스름 달빛에 비치는 커다란 산이 마치 거인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보여 무섭기까지 하다.
가을을 만끽해 보고자 일부러 멀리 나가본 건데 눈에 담고 싶었던 오색 단풍은 별로 없었다.
아직 이곳엔 가을이 오지 않은 듯 붉고 노란 잎새보다는 사시사철 독야청청(獨也靑靑) 푸른 나무들만 무성하다.
돌아오면서 보니 익숙해서 깨닫지 못한 우리 동네에 서있던 나무들의 색깔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변해 있었고 가을은 우리가 일부러 멀리까지 보러 갔던 그곳이 아니라 이곳 바로 우리 옆에 더 가까이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