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그 쓸쓸함에 대하여

by 스몰토크

맘껏 젊음을 과시라도 하는 듯, 한없는 거만함으로 태양을 향해 고개를 뻣뻣이 세우던 한여름의 노오란 해바라기도 시들시들 꽃잎을 접고, 얇은 가지에 빠알간 열매 조금이라도 더 자랄까 늦도록 품고 있던 사과나무는 등골이 휘어진 채로 축 늘어져 있다.


다 키워놓은 이쁜 새끼들 우리의 손을 빌어 상처 하나 없이 떠나보내고 나니, 그제야 안도했는지 살짝 고개 드는 듯하다 허망한 삶의 끝을 아는지 이내 다시 웅크린다.


어차피 우리들 입속으로 들어가면 제 목숨 걸고 지켜낸 보람도 없을 텐데, 무엇을 위해 그리 힘들게 버티고 있었는지... 본능의 의무 다하고 나니 맥이 풀려 잔바람에도 휘청이고, 똑바로 서 있던 힘 내려놓은 듯 흔들흔들, 이제는 꼬부라든 이파리만 힘없이 툭툭 떨군다.


밖으로 나가보니, 오고 가는 길목에도 어느새 너도 나도 추석빔으로 새 옷 한 벌씩 얻어 입었나 보다.

여기저기 때때옷 입은 잎사귀들이 넘실댄다.

풍성한 수확을 위해 지난여름 땀 흘리며 일하느라 지친 가지엔, 초록초록 푸르름을 뿜어내던 나뭇잎들이 온몸의 습기를 다해 물기 없이 쏴악 말라버린 채, 노고에 감사한다 전해준 색동옷으로 모두 갈아입었다.


자연이 건네주는 임무 덥석 받아 안고는, 한 계절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은 선물 옷까지 받아 챙겼으니, 말없이 다가오는 겨울을 위해 삶의 자리 양보하고 이제 차츰차츰 떠날 채비를 한다.

눈 내리듯 떨어져 휘날리다 나의 발아래 무사히 안착한 잎새들 발로 툭툭 차면서 걸으니, 리듬을 타듯 바사삭~ 바삭~ 소곤대며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음악처럼 들려온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어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아직 남은 을 이어가고 있던 잎새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버틸 힘조차 없이 기력 다한 아이들은 살랑이는 바람에도 후드득, 허망하게 땅 위로 다이빙하듯 뛰어내려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바람 따라 떠밀리듯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처연히 떠나간다.


남들 다 떠난 자리 무슨 미련 때문인지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있던 아이들은 왔다가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건가 아니면 새끼들 다 떠나보낸 무력감에 한 겨울 눈 속에 먹이도 없이 쓸쓸히 겨울잠 자게 될 나무어미가 가엾어서인가.

겨우내 내린 눈과 섞여 기나긴 숙성의 과정을 견뎌내고, 효도라는 조미료까지 더해 맛있는 나뭇잎 영양 비빔밥을 정성껏 만들어 걸쭉한 거름으로 바친다.

자식의 그 마음을 헤아려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니, 없던 기운 솟아 발아래 떨어진 살점들 하나하나 모아 널따란 방석으로 만들어 깔아 주니, 걸음걸음마다 폭신폭신하다.


아이들이 애써 만들어준 요리 덕에 온몸의 각 기관마다에 영양분을 가득 채운 어미나무는 슬슬 월동준비를 시작해 본다.

정결한 몸을 위해 색동옷 마저 다 벗어던지고,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 부끄럽다 마다않고, 이듬해 또 다른 어린 새싹들 피워내기 위한 진한 모성(母性)으로 극기 훈련을 하듯, 한겨울 폭설을 견뎌낸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꿀벌들의 향연(饗宴)이 펼쳐지면 그때 다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자랑스러운 열매로 새 생명 탄생의 기쁨 신화를 다시 한번 이뤄낼 테지.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에 여름 내내 흘린 땀 씻어내듯 깨끗하게 샤워 마치고, 있는 힘 다해 버티던 잎마저 다 털어내고 나면, 부러질 듯 앙상해진 정강이가 안쓰러워 보인다.

가을 숲길 우뚝 서있는 전나무들의 푸르름은 여전한데, 여름 한철 등에서 흘러내리던 땀마저 쏴악 말려버리는 따가운 햇살의 기운마저 사라지고 나면,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더더욱 야속할 터이다.


존재의 시간이 너무나 짧은 가을이 깊어간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첫눈이라도 와버리면, 언제 왔다가 갔는지도 모를 잊혀진 계절이 되겠지.

봄은 겨우내 잠자던 땅에 파릇파릇,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안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지만, 가을은 다 떨구어내고 무작정 떠나가는 느낌으로 괜히 쓸쓸해진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까르르 웃던 사춘기 어린 시절과는 달리,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알 수 없는 상념(想念) 들로 울적 해기지 일쑤고, 왠지 모를 회한(悔恨)으로 처량함외로움마저 자리 잡는다.


화려함을 뽐내던 꽃잎도 피었다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지고, 한껏 푸르렀던 싱싱한 잎들도 누추한 행색으로 하나 둘 떨어지듯이, 살아보니 우리 삶도 다를 것이 없다.

늘 푸를 것 같던 젊음도 빛이 다하니 수분이 빠져 쭈글거리고, 검은 머리가 하얀색으로 점차 옷을 갈아입는다.

달라져가는 외모와 함께 덤으로 내면 또한 성숙해지면서 에 대해 좀 더 깊게 사색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무상(人生無常) 삶의 회의(懷疑)를 친구들과 장난처럼 외치던 철없던 젊은 날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말을 되새기게 될 날이 오게 될지도, 그리고 그때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는 것도 차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크게 나를 짓누르는 듯하다.


열심히 만들어낸 나뭇잎들을 거름 삼아 에너지를 얻고, 다음 해 새로운 열매를 맺어내는 일을 무한 반복하는 나무들처럼, 깊어가는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도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자양분 삼아 또 다른 해를 살아낼 준비를 해야 할 테다.

나무가 나이테를 통해 세월의 흔적을 남기듯이, 우리는 쭈글 거리는 얼굴의 주름으로 살아온 시간이 보일 것이다.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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