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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Jul 06. 2023

국제미아 되던 날

영어가 뭐길래...

캐나다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을 때는 홈스테이(homestay)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우리 집이 아니라 매일 돈을 지불해야 허락되는 곳이지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이미 얼굴을 튼 주인내외 말고는 낯선 이를 만날 일도 없으니 무서운 영어를 해야 할 일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담보로 안정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오긴 왔지만 정해져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뭘 할 수 조차도 없는 따분함이 무작정 시간만 보내고 있는 우리의 심란한 마음을 더욱더 부추길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창밖을 바라본다.

봄이라 부르기도 무색할 정도로 아직까지 뒷마당에 그대로 쌓여있는 눈이 밖의 날씨가 어느 정도인지를 예상케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곳의 바깥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지만 나가서 직접 부딪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니까 작은 용기를 내서라도 우리를 험난한 세상밖으로 내몰아 보기로 한다.


차가 두 발인 곳이라지만 아직은 없으니 우리를 데려다줄 이동수단이 전혀 없다.

다행히 버스 매일 스케줄 대로 온다고 하니 정확한 시간과 버스요금을 알아보고 실수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한 다음 시간에 맞춰 나가 기다리고 있으면 될 듯하다.


꽤 추운 날씨라 그에 맞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도우미 없이 온전히 우리끼리만 밖으로 나간다.


겨우 도착한 버스 정류장엔 추위 탓인지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적막강산(寂寞江山)이고 우리 말고는 그 어떤 이도 없다.

과연 여기가 버스 정류장이 맞는지 버스가 오기는 하는 건지 물어볼 곳도 사람도 없다.

게다가 오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모처럼 만에 큰맘 먹고 나와 본 것인데 1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는 버스를 애타게 기다리다 몸이 꽁꽁 얼은 채로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좌절의 쓴맛만 보고 결국은 민박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도 버스가 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을 해 주지 못하는 걸 보니 주인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한국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면 관련 부서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신문은 1면 기사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

저녁 뉴스엔 특종 잡은 방송 3사 들의 앵커들이 나와 

"오늘 ㅇㅇ 지역에 도착시간보다 1시간이 넘도록 버스가 도착하지 않아 추운 영하의 날씨에 기다리던 시민들이 발만 동동 구르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면서 난리가 날 텐데 


역시 넓은 땅 덩어리만큼 여유롭고 너그러운 캐나다인들은 그런 일쯤엔 아무런 불평 없이 조용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모양이다.

직접 당한 가엾은 우리 가족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해 아는 이도 언급하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현장에 있었으니 사실 증명이라도 해달라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방송사나 신문사도 당연히 없다.


나름 두려움을 이겨보겠다고 맘먹고 시도해 본 그날의 외출은 매서운 추위에 떨기만 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의미도 얻지 못한 채 맥없이 끝나 버렸다.


첫 시도의 좌절로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억울하기도 하고 한번 해 봤으니 두 번은 못할까 싶은 오기(傲氣)가 생긴다.

살짝 걸린 발동에 엑셀까지 밟으면서 속도를 더해 다음날 다시 한번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본다.


어제의 일은 이미 우리만 아는 비밀로 묻혀 버렸고 알 수 없는 고요가 정류장에 머문다.

괜한 객기(客氣)를 부린 건 아닐까? 오늘도 안 오면 어쩌지?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 걱정이 된다.


손이 시려오기 시작한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바람을 조금이라도 덜 받을까 싶어 잔뜩 웅크린 채로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멀리서 버스가 보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오늘은 성실할 정도로 제시간에 도착해 무사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침착하게 요금 통에 돈을 넣고 빈자리에 앉고 나니 버스가 움직인다.

캐나다에서 이용해 보는 첫 대중교통이다.

드디어 ~출발!~


우여곡절(?) 끝에 탄 버스 안에서는 우리와는 다른 낯선 얼굴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멀미 나듯 들려오고 비어 있던 내 옆자리는 백인 소녀아이가 채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혹시 말이라도 시킬까 식은땀이 흐른다.


"같은 마음인거지?" 남편도 아들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처음이 아닌 양 무심한 듯 조용히 앞만 응시하고 있다.

가려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남편이 이끄는 대로 목적지가 다 와서 이제는 내려야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벨을 누르면서 내린다는 무언의 사인을 주고 그것을 눈치챈 영리한 운전기사는 정류장에 도착하자 버스를 세운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남편과 아이가 먼저 내리고 내 차례가 되어 내리려는 찰나, 이를 어째~ 서서히 문이 닫힌다. 

문을 살짝 손으로 밀기만 하면 되는데 방법을 몰랐던 나는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고 그대로 문이 닫혀버린 버스는 홀로 남은 나를 싣고 곧바로 떠나버린다.


둘러보니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내렸고 버스엔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갇혀 버렸다!

한국도 아니고 캐나다에서 그것도 버스 안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다니! 왜? 왜? 왜?

대략 난감(大略難堪)이다.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혹시라도 어리바리하고 나이 들어 효용가치(效用價値) 1도 없는 아줌마지만 멍텅쿠리배에 팔아넘길 요량으로 일부러 빨리 문을 닫아 버린 건 아닌지... 

제발 저 냉정한 사내는 운전기사를 사칭한 인신매매범은 아니어야 할 텐데...

별 쓸데없는 상상까지 한다.

이런 속 타는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버스는 무작정 앞으로만 간다.


당장 버스를 세워달라고 하고 싶지만 영어로 "문 열어 주세요 또는 버스 좀 세워 주세요"그 쉬운 말들 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가 단어들을 생각하느라 열일 중이지만 아무리 레이더(radar)를 돌려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당황하지 말고 진정하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문 door 열다 open 이니까

"Open the door"라고 하면 된다.


머리로는 조각 맞춤을 다 해놨는데 입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강강술래 하듯 안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으니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버스는 그대로 앞을 향해 직진 go.


운전기사는 내가 이 버스에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살짝만이라도 돌아 봐 주면 좋겠는데 계속 앞만 보고 있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제발 뒤 좀 봐주시면 안 돼요? 한 번만요~!"

들리지도 않는 맘속으로만 외쳐본다.


내가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하려면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전 정류장에서부터 지금 버스가 가고 있는 곳의 노선을 머리로 암기해서라도 기억해 둬야 할 것 같다.  

여기서라도 내리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가면 힘드니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갈 길을 머릿속에 그려놓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멈춤을 모르고 달리고 있는 버스 때문에 가족과는 점점 멀어져 가고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어디에 내리게 될지도 몰라 초조하고 조급해지기만 하는데 어느새 용량에 과부하(過負荷)가 걸렸는지 메모리는 이미 꽉 차서 더 이상 외울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고 머릿속은 배터리마저 방전된 상태다.

 

가슴이 쿵덕쿵덕 쿵쿵 큰소리로 돌 방아질을 해 대지만 이제 더는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

 

입에서 자리를 못 찾고 떠돌던 단어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밖으로 툭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행여 못 들을까 문까지 탕탕 두드리며 "오픈 더 도어!" 

그 와중에 예의까지 차릴 여력은 없었나 보다.

"~주세요(please)"는 진즉이 온데간데도 없고 "문 열어!" 명령하듯 한 문장만 짧고 간단하게 쏟아낸다.

 

간절함이 결국 두려움을 앞서는 순간이다

 

그제야  기사가 운전석 위에 있는 백미러로 슬쩍 보더니 묵직한 중저음으로 말을 건넨다.


This bus is not going to stop any more 

That was the last bus stop... 


헉!~~~

영어가 안 나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그 말은 또렷하게 들린다.

희한하게도...


이 버스는 더 이상 서지 않아요 

거기가 종점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딱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도리어 버스가 안 선다고 하니 더 난감해져 버렸다.


핸드폰이 없어 가족과 연락도 안되고 

주인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돈도 없고 여기서 전화 거는 법 또한 배운 적이 전무(全無)하다.

나는 이제 완전한 국제미아가 되어 버렸다.


얼굴이 벌게져 다급해진 나는 손바닥으로 버스문을 둔탁하게 두드리며 다시 한번 절규하듯 목놓아 외친다 

"오픈 더 도어!" "오픈 더 도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마음 착한(?) 기사 아저씨가 중간쯤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는 문을 열어 준다


평소엔 길을 잘 못 찾아가는 길치인데 이 상황에서 그런 응석(應碩)은 용서가 안된다.

안테나를 풀가동해 버스가 왔던 길을 더듬어가며 죽기 살기로 머리의 전파가 송수신(送受信) 해 주는 대로 걷고 또 걷는다.


혹시라도 못 만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한가득 안고 터덜 터덜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서 어렴풋이 익숙한 두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

찾았다!~~~


가족을 찾아 국제미아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한 탓인지 머릿속으로 갑자기 필름이 돌아가듯 내가 그들에게로 가는 길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친다.

 

느닷없이 실체도 없는 허상의 감독님이 짠~하고 등장해서는

 

모두 스탠바이(standby)

 

~ 레디(ready) ~ 

하고는 손을 번쩍 올리고 엄지와 중지의 손가락에 핑거스냅으로 딱 소리를 내면서 ~"큐(cue)"~ 사인 명령을 내린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스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오래전 KBS 예능 프로그램인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잔잔하게 흘러나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훔치게 하던 바로 그 삽입곡(BGM) 셀린디옹(Céline Dion)의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의 음악을 분위기 있게 쫘악 깔아준다.


이때 길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던 어미 양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홀로 이겨내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달려가 무사히 안긴다.


다시 감독이 나와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음악 페이드 아웃~~~ 을 나지막이 지시하면


~"(cut)"~ 을 외친다.


여기서 국제미아가 되었다 고생 끝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따뜻한 가족에게로 돌아간 탕자의 이야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영화는 막을 내린.





혼자 걸어가는 동안 혹여라도 남편과 아이가 나를 걱정하면서 찾아 걸어와 주지 않을까 은근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끝까지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화도 나고 서운한 마음에 투덜대니 길이 엇갈릴 수가 있으니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유 있는 변명이 틀린 말은 아니니 그 마음을 접기로 한다.


역시 세상 밖은 만만치가 않다 아니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무방비(無防備) 상태에서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웬만하면 두려워서 일부러라도 피하고 싶었던 영어와 정면으로 마주해 버렸


첫 만남이 아름답지는 못했다.

공포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동시에 선사했으니까...


학교에서 영어공부 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 간단한 말도 못 해서 노숙자(homeless)가 될 뻔한 순간까지도 입을 못 떼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끌려가니 살벌하게 무서웠고 그로 인해 평생에 남을 웃지 못할 아찔한 기억을 남기다니 부끄럽고 어이도 없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버스에 갇혀 국제미아가 될 줄이야!

영어가 뭐길래...


이제 이곳에서의 새로운 꿈을 좇느라 다 비우고 왔던 우리 삶의 공백은 지금부터 다시 하나하나 메꿔가야 할 것이다.

놀랍고 끔찍했던 그날의 일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강열한 기억으로 남게 될 영어가 그중에 제일 먼저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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