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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Feb 01. 2024

하와이 가려다 기내에 감금된 사연

나 하이재킹 당한 거야?

열심히 일 한 후에 찾아오는 휴식은 그 어떤 디저트 보다도 달콤하다.

하지만 너무 달면 오히려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듯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함 뒤에 가끔은 예측하지 못한 어이없는 일이 숨어 있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에 10일 정도 휴가를 맞이하면서 우리 가족은 그동안의 보상을 받듯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여름에 더운 날을 피해 피서를 가듯 겨울엔 추운 날을 피해 피동을 가야 할 테다.

그런 이유로 따뜻한 곳을 찾다 보니 겨울에도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하와이가 낙찰되었다.


일에 치어 한동안 여행을 다니지 못한 터라 기대감이 잔뜩인 채로 부풀어 있다.

일정에 맞춰 깃발을 따라 피곤하게 쫓아다니는 여행은 사절이라 호텔부터 렌터카, 식당,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끼리 알아서 다 해야 하니 할 일이 태산인 듯하다.


각자 역할 분담을 해서 남편은 눈이 빠지게 인터넷을 보면서 예약할 건 미리 해 놓고 가 볼 곳은 프린트를 뽑아 정리를 하면서 나름 계획을 철저히 세운다.


하와이는 덥다니까 반팔을 챙겨야 하나? 아님 그래도 긴팔을?

여긴 추운 겨울인데 그곳은 정말 여름?


그래도 혹시 몰라 반팔과 긴팔을 섞어 옷가지를 챙기고 여러 날 있을 만발의 준비를 하나씩 해나가면서 떠날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공항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기만 하다.

모두가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고 있느라 명절처럼 조용하기만 한 거리는 어딘가로 떠나려는 우리를 배웅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한국에선 낭만에 굶주린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선물을 잔뜩 주겠다 아무리 꼬셔도 좀처럼 볼 수 없던 그 눈이 아무도 원한 적도 없는 지금은 펄펄 날리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벅차 눈이 오는 날에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나무들에 피어있는 눈꽃들이 그저 이쁘다는 생각만 하면서 어떤 기막힌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도 못 한 우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여행 가는 기쁨만 만끽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들만 있듯이 공항에 도착하니 모두 어디 로들 가는 걸까?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길게 늘어진 줄이 혹시라도 탑승시간에 늦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든다.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들의 지루한 삶에서 잠깐이라도 비껴 나는 것에 신이 난 여행객들로 공항 전체가 온통 시끌벅적 번잡스럽다.

그 틈에 끼여있다 보니 사람 많은 공기로 인해 정신이 멍해지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늦지 않게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찾아가 보니 그곳 또한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석이다.

여유 있게 서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 캐리어를 세우고는 사람구경도 여행의 한 재미다 여기며 여행에 들떠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가며 바라보고 있으려니 탑승 준비를 하라고 한다.


오! 이젠 하와이로 떠나는 건가요?  알로하!~

아이가 창가 제일 키가 작은 나는 가운데 남편이 복도 쪽으로 앉는다.

승무원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뒤늦게 온 사람들이 가방을 올린다.


기내가 점차 조용해지고 어느 정도 준비가 다 되어가는 듯하다.

간간이 승무원만 한 번씩 지나간다.

출발 시간도 지났고 이제는 떠나도 될 것 같은데 왠지 비행기는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승무원들이 춤을 추듯 몸으로 그려대는 안전수칙의 동작도 안 하고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만 크지 않게 들릴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냥 조금 딜레이 되는 모양이다 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사람들도 궁금해졌는지 기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눈치챘는지 드디어 스피커에서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기장이 마이크를 시험한다.


비행기 기장들의 목소리 톤은 언어가 다 다른 데도 왜 세계 어딜 가나 비슷할까?

혹시 그런 톤으로 말하라고 단단히 교육이라도 받는 걸까?

비스듬하게 앉아서 거만하게 뱉어내는 것 같은 그 특유의 기장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에~~ 오늘 떠나는 비행기가 너무 많아 활주로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관계로 우리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위험하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앉아있으라는 당부까지...


"그럼 언제 떠난다는 건데?" 

막연한 그의 말이 길게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불안함으로 아직 시작도 안 한 여행이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지 않은 우린 속이 타 죽을 지경이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불편한 사태에 대해 누군가는 환불까지도 요구하면서 불평불만을 토로하고도 남을 일일 텐데...

어쩌면 저녁 뉴스에 비행기에 갇혀있는 우리의 초췌한 사진까지 올리면서 메인 토픽으로 나올 수도 있는 일이고.


한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이상하리만치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은근히 나 대신 누군가 나서서 말해주길 바래보지만 말인지 뭔지도 모를 기약 없이 야릇한 기장의 설명을 그대로 믿고 다 이해한 듯 모두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마냥 얌전하다.

나 홀로 속 태우고 있을 뿐 그들은 전혀 짜증 나거나 화나지도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느라 밥때를 놓쳐 배가 고픈지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차갑게 식어 맛없어 보이는 샌드위치를 사 먹느라 카드 긁는 이 아니면 간단하게 스낵을 시켜 먹는 이... 

그러면서도 승무원과 깔깔거리며 농담까지 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평안해 보인다.

이 와중에 항공사는 배고픈 사람들을 이용해 영업을 하다니... 돈 안 받고 그냥 줘도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을 가지고... 기막혀!

"이 상황이 나만 이상한 거야? 어쩜 다들 저리도 편안해 보일 수가 있지?"

다들 괜찮은 데 나만 딴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이없는 일상의 시간은 지나가고 찌지 지직....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

오! 이제는 떠나나? 그 말하려는 거겠지?

완전 기대를 저버린다.  


이번엔 "밖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 외부에 붙어 있는 눈을 제거해야 한다.

그 순서를 또 기다려야 한다"라고 한다.


"뭐? 이제 와서? 이제껏 뭐 하고?"

진짜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오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거에 대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나 말고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사람도 없다.

"상관없어" 하는 표정으로 평화롭기만 한 그들의 얼굴이 신기할 정도이다.


아무도 나서주는 이가 없고 모두 참고 있는데 홀로 정의의 사도인 양 나설 수도 없고 답답해 죄 없는 가슴만 칠뿐이다.

나만 참을성이 없네...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다 도를 닦고 있는 수도승들인가?


그러고도 한참이 흐른 후에 창밖을 바라보니 스프레이에서 물이 뿜어 나오듯이 커다란 호스에서 분홍색 물감이 비행기를 향해 쏘아대는 게 보인다.

거대한 비행기 크기에 비해 호스가 너무 작아 보인다.


염화칼슘인가? 저렇게 해서 저 큰 비행기를 다 하려면 시간이 또 얼마나 걸릴까?

나는 끝없이 툴툴거리는데 남편과 아이마저 저들과 한통속인 듯 말없이 앉아만 있다.


얼음 제거도 했고 벌써 4시간은 족히 지난 듯한데 뭐가 문제인데 아직도 그대로다.

슬슬 무릎이 저려오고 허리가 아파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서본다.

다들 옆사람과 이야기 나누느라 지금의 이 사태를 잊고 있는 듯하다.

나이가 좀 지긋한 할머니 한분만 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제시간에 출발했으면 하와이에 거의 다 갔을 텐데 이게 무슨 고생이야?


이때 기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나 보다.

이번에는 진짜 떠나는 거겠지? 그래야 하는데... 제발 제발... 떠난다고 말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아니 뭐 둘 중에 어느 것 먼저 들을래? 그거 물어보는 거세요?"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우리의 활주로 대기 순서가 13번째이고 나쁜 소식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눈이 계속 쌓여 비행기 얼음제거 작업을 다시 한번 해야 합니다."는 말이다.


"기장님~지금 장난하십니까?"

아직 출발도 못해보고 게이트에서 몇 시간째 꼬박 앉아 납치되어 포박당한 듯 움직이지도 못하고 감금된 채로 벌서고 있는데 13번째이면 언제 떠나냐고요?


총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위협하는 범인들만 없을 뿐 영화에 나오는 하이재킹(hijacking) 당한 거랑 사실 다를 게 뭐일까?

정말 울고 싶다.

따뜻한 하와이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하와이공항에서 호텔까지 우릴 픽업하러 오기로 한 사람들에게 늦어진다고 연락할 방법도 없고 속이 속이 아닌 채로 애만 태우다 시간은 계속 흘러 6시간을 훨씬 넘기고서야 또 한 번 기장의 말이 들려온다.


"드디어 다음차례에 우리가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안전벨트 매십시오..."

기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환호를 지르면서 박수를 치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한다.

마치 대환장 파티라도 열린 듯 난리도 아니다.

아니 이 상황은 또 뭐지?


우릴 여섯 시간 이상 비행기 안에 가둬놓고 감금한 이 비행기 회사를 고소해도 시원찮을 판에 박수를 쳐준다고? 뭘 잘했다고?


크리스마스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사람의 얼굴로 가면을 쓰고 앉아 있던 거지?

마음들도 넓다~ 다들 복 받으시겠어요~!!!


이런 내 마음속 이야기가 들릴 리 없는 비행기는 이륙 사인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하와이를 향해 날아오른다.





하와이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했다.


갇혀있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안달복달하면서 조급하게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던 나와는 달리 그들은 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짜증 한번 부리지도 않았을까?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했을 행복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안온한 표정으로 참아내며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보다는 몸에 베인 삶의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눈이 나리는 천재지변이라는 상황과 크리스마스 연휴라 너도 나도 따뜻한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특별한 이유가 겹쳤음을 넓은 가슴으로 헤아리면서 이해해 주고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그 일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 하는 긍정의 마음이 그런 느긋함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그 마음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멀고 힘들었던 하와이 여행을 통해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넉넉한 그들의 여유로움이 조금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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