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마지막 반란
전반적으로 캐나다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오고 날씨도 무척 춥다.
한번 오기 시작하면 그 끝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멈추고 싶지 않은 건지 계속 내려 가끔은 산처럼 쌓여있는 눈과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영하 10도만 돼도 추워서 덜덜 떨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선 온도계의 숫자가 점프를 하듯 영하 40도를 가리키는 날이 몇 번씩은 왔다 가곤 해 그 온도에 또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대중교통이 한국보다는 덜 발달되어 있어 주로 차가 내 두 발이 되어 이동을 하다 보니 온전히 나를 밖에 노출시킬 일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러니 춥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눈 내리는 날엔 바라만 봐도 낭만이 가득해져 멋진 시(詩) 한편 막힘없이 쭈욱 써내려 갈 것 같던 사춘기 소녀시절의 감성은 이제 나이와 함께 점차 무뎌지고 하얀 얼굴 뒤에 가려진 심술 따윈 생각도 못 한 채 무작정 좋아하기만 했던 그때의 기억은 조금은 철없었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마다 겨울이면 몹시 추운 게 당연했는데 올해는 눈도 많이 안 오고 날씨도 예년(例年)에 비해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나 보다 했다.
하지만 그냥 가기 섭섭했나 보다.
꽃단장하고 짠!~ 하면서 나타날 이른 봄에 대한 시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미약해져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한 번 더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을까?
지나고 보니 폭풍전야였던 연말과 새해가 막 지나자마자 겨울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 성깔 부리듯 대 반란을 일으킨다.
평소보다 훨씬 더 끔찍한 혹한(酷寒)으로 동부 서부 할 것 없이 캐나다 전역을 향해 휘몰아치듯 몰려온다.
이례적으로 연일 따뜻한 날 덕분에 아로마향처럼 은은한 향기가 단단하게 뭉쳐있던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 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진 채 잠시 졸고 있던 우리는 머리 위에 갑작스럽게 쏟아붓는 찬얼음물세례 한 바가지에 지금 막 깊은 잠에 빠지려다 정신이 번뜩 나 얼른 잠에서 깬다.
Polar Votex라고 불뤼는 그 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추위 탓에 체감온도 영하 50도까지 내려갔다고 호들갑스럽게 방송마다 아나운서들이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들어 댄다.
핸드폰에서는 삐오~삐오~ 긴급 재난 상황인 듯 시끄럽게 경고 문자가 울린다.
전기사용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전기는 모두 끄라는 내용이다.
마치 여름에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라는 것처럼...
모든 걸 전기로 해결해야 하는 이곳에서 전기가 끊기면 밥은 물론이고 보일러마저 켤 수 없어 이 추위에 얼어 죽을 수도 있는데 그걸 하란다.
영하 40도는 자주는 아니라도 늘 있는 일이고 어느 정도 선이 넘으면 40도나 50도나 뭐 특별히 차이가 있다고 저 난리 들인가 싶기는 하지만 잘은 모르겠다.
방송에서 괜히 시끄럽게 떠들고 정부에서는 경고문자까지 날리면서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 같은 느낌이 왠지 더 불편할 따름이다.
하필이면 가장 춥고 눈까지 와 차를 몰고 나가기는 최악의 조건의 날에 이런 이변이 찾아올 줄도 모르고 6개월 전에 예약해 둔 안과 정기검진 날이 다가온다.
다른 날로 잡아야 하나 고민이 되긴 하지만 이곳에서 겨울에 눈 오고 추운 날은 특별한 일도 아니니 그냥 천천히 가면 되지 하면서 별로 크게 생각지는 않는다.
약 올리듯 언제나 예상은 빗나간다.
당일날 일기예보대로 실제로 밖에 눈이 온다.
기온은 여전히 영하 50도... 좀처럼 온도가 오르질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이 스케줄 다시 잡으라고 했을 때 그 말 들을걸 그랬나?
그렇게 잘 틀리던 예보는 이런 때는 어쩜 그리도 척척 잘도 맞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쉬지 않고 내리는 눈 때문에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보이고 얼마나 추운 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집집마다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넘실 넘실 하늘로 춤추듯 날아오른다.
길 상태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잡고 얼어 죽지 않을 만큼 단단히 껴입고 출발을 해본다.
집 앞은 제설작업이 안되어 있어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게다가 밤새 얼어붙었는지 바퀴가 살짝 밀리는 게 느껴진다.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큰 도로도 제설차가 한 번 지나간 것 같긴 한데 워낙 눈이 많이 오고 추워서 인지 소용이 없다.
바퀴에 스케이트나 스키를 신겨 놓은 듯 빙판이 된 도로에서 쭉쭉 미끄러지면서 나아간다.
80Km로 달리는 길에 40-50km로 설설 기어가도 뒤에서 아무도 빵빵거리지 않는다.
저들도 별수 없을 테지...
다만 달리다가 신호가 바뀌면서 차를 세워야 할 때가 제일 문제다.
가끔씩 브레이크가 제 역할을 못하기도 한다.
남편이 그런 경우엔 엔진 브레이크를 사용하라고 했는데...
처음 운전면허 딸 때는 수동기어로 했지만 오토로 하다 보니 어느새 다 잊어 수동으로 기어 넣는 것이 익숙지 않다.
정지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결국 내차는 멈추지 않고 저 혼자 직진 중이다.
안되는데... 멈춰! 멈추란 말이야!~~~
오래전에 눈길에서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어 차가 멈추지 않던 기억이 떠올라 더 무서웠다.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밟았다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신호를 넘어 중간쯤에서 차가 선다.
다행히 내 앞에는 차가 없었고 뒤를 보니 뒤따르는 차도 없어 후진 기어 넣고 살살 뒤로... 신호대기줄에 겨우 맞춰 선다. "휴!~"
자만은 금물... 다음부터 이런 날은 예약을 다시 잡는 걸로!...
이번 추위는 아마도 얼음 공주 엘사를 불러 새로운 버전의 겨울 왕국을 만들어 다시 한번 흥행에 성공하고 싶었나 보다.
그녀의 마법 능력이라도 쓰게 했는지 밖에 있는 모든 걸 한순간에 다 얼려 버렸다.
주차장에 놓았던 생수가 냉동실에 넣었던 것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그것도 부족했나 보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을 하려고 시동을 켜니 계기판에 "malfunction"이 떴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물건만이 아니라 차에 부착된 무형(無形)의 프로그램까지도 얼린 건가?
아무런 문제도 없던 차가 갑자기 오작동이라니... 대단하다.
그래도 추운 날 엔진 보호차원으로 블록히터(Block Heater)에 전기코드를 꽂아 놓은 탓에 시동은 걸렸고 어찌어찌 집까지 오는 동안 준비운동(warming-up)이 된 탓인지 얼었던 부속들이 서서히 녹으면서 그제야 그 글씨가 계기판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은 더 과간이다.
어젯밤의 일은 맛보기로 보여준 것이고 더 막강한 힘으로 위엄을 더한다.
이번엔 브레이크마저 얼려 버렸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왔다 갔다 안절부절못한다.
영하 50도는 밖에 단 몇 초만 서있어도 얼굴이 급 따가워지고 사진에서나 보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산 사나이들의 얼굴모습처럼 눈썹에도 수염에도 얼음이 붙을 정도다.
멀쩡하던 차의 프로그램을 얼리고 돌아이로 변신시킨 후 모든 기능에 오류를 범하게 하고 제기능을 못하게 만들 만큼 그 파워 또한 엄청나다.
북쪽에서 살다 왔다는 캐나다 지인은 영하 50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곳엔 영하 8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길래 "어떻게 그런 데서 사나요?" 하니까 "Just being careful..."
그렇긴 하지... 조심하면서 사는 방법 말고는 무슨 대안이 있을까?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어진 환경에 끼워 맞춰가면서 나름의 터득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순응(順應, acclimatization)뿐일 것이다.
거역할 수 없다면 순응하는 수밖에...
싫어도 겨울은 추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병충해를 막고 먹이사슬의 순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겨울도 따뜻하기만 한 세상이 자신의 세계를 파괴할 것 같은 두려움과 그 끝은 없을 것 같지만 욕심 가득 차지하고 있던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고 떠나야 하는 숙명을 의식한 듯하다.
그냥 스쳐 지나가긴 억울한 듯 우리에게 자신의 특기를 살려 대단한 위엄과 위력을 더한 극한 추위를 선사하면서 까지 대 반란을 일으킨걸 보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에 대한 순응의 힘으로 부려본 몸부림이었거니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 매서운 추위가 명(命)이 다해 지나고 나면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던 따뜻한 봄날이 친구처럼 다가와 차갑게 얼었던 우리를 스르륵 녹여줄 거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