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하고 밋밋한 삶에 가끔은 가슴이 턱 하고 막혀오는 순간이 있다.
물론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경험이 실력이 되는 날도 오겠지만 그 순간은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곳의 겨울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한파(寒波)를 몰고 와 몹시 추운 날씨를 선보이고 잦은 폭설로 인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어 버리기도 한다.
덤으로 녹지 않고 쌓여버린 눈은 치워도 치워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게으름 피우다 집 앞에 눈을 치우지 않아 지나가던 사람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분쟁(紛爭)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 눈이 올 때면 집 앞뿐 아니라 인도(人道)까지도 즉각 즉각 쌓여있는 눈을 치우는 것은 하나의 일상이 된다.
겨울엔 유난히 해가 짧아 초저녁 4-5시만 되어도 밖이 캄캄하다.
군데군데 서있는 가로등이 빛으로 밝혀주고는 있지만 깊은 어둠을 뚫지는 못하는 듯하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의 퇴근시간에 맞춰 그를 픽업(Pick up) 해야 하는데 조금 늦은 듯 해 서둘러 주차장에서 차를 빼려다 문제가 터져버렸다.
후진을 하는데 쿵 하면서 뭔가에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아무리 액셀(accelerator)을 밟아도 굉음만 들리고 땅이 미끄러우니 바퀴만 헛돌 뿐 좀처럼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뭐지?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남편이 눈을 치우면서 주차장 양 옆으로 쌓아 두었었는데 혹시 거기에 걸렸나?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봐야 하니 일단 시동을 끈다.
기계치에 "언니! 달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가 본다고 알겠냐만은 그래도 뭔가는 해봐야 하니 그냥 내려본다.
헉!~ 이런 예감은 빗나가지도 않는다.
산처럼 쌓인 눈더미가 이미 차갑게 식어 떠나려는 사랑을 놓지 않으려는 듯 오른쪽 뒷바퀴를 꼬옥~끌어안고 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일은 늘 하던 일이라 전혀 문제 될 일이 없는데 서두르지 말았어야 했다.
멀쩡한 길 나 두고 하필 눈더미를 향해 후진을 하다니... 왜 그랬니?
캐나다에 와서 버스에 갇히는 그 기막힌 일을 겪은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나?
이번에는 차바퀴가 눈더미 속에 빠져 나는 또 갇혀 버렸다.
얼른 가야 하는데 차는 꼼짝도 안 하고 방법은 모르겠고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이거 만져라 저거 만져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영 소용이 없다.
차는 "날 잡아 잡숴" 하면서 퍼져버린 채 말도 안 듣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은데 어두 컴컴한 저녁 시간에 낯선 이가 벨을 누르면 과연 문을 열어 줄까?
온갖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시간은 자꾸 가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용기 내 뚜벅뚜벅 걸어서 먼저 옆집 벨을 눌렀다.
몇 번을 눌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럴 줄 알았어...
밤은 점점 더 깊어지고 깜깜해져서 이젠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은 생각만 하면서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민폐인건 알지만 한 번도 말을 섞어 본 적도 없는 앞집으로 무작정 달려간다.
집 앞까지는 용감하게 갔지만 문 앞에서 잠시 쭈뼛거리다 마음을 가다듬고 벨을 누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제발 제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철컥!~... 문이 열린다.
할렐루야!~감사합니다!~
아줌마가 얼굴을 내민다.
너무 반가워서 다급하게 "저는 앞집에 사는데요... 차가 눈더미 속에 갇혔어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 보는 이의 방문이 놀라웠을 텐데도 아줌마는 어리둥절해하거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문을 닫고 나온다.
도와주겠다는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천군만마(千軍萬馬) 라도 얻은 느낌이다.
그녀는 우리 차 앞으로 오더니 자신이 운전해 볼 테니 뒤에서 밀라고 말한다.
시키는 대로 얼른 뒤로 가서 자리 잡고 그녀가 액셀을 밟을 때마다 있는 힘껏 밀었지만 나 하나만으로는 당연히 역부족이다.
젖 먹던 힘마저 다 쏟아부었지만 차는 헛바퀴질만 계속할 뿐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자신의 방법이 안 먹히자 차 문을 열고 나와 그녀는 남자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필 오늘 남편이 집에 없다면서 난감해하더니 집 쪽을 향해 걸어간다.
잡지는 못하고... 그냥 가는 건가요? 안 되는데... 그래도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혼자 머릿속으로 생쑈를 하고 있는데 잠시 후 감사하게도 그녀가 다시 나온다.
그것도 장성한 두 딸까지 대동해서...
그리고는 딸들에게 같이 차를 밀어 보라고 한다.
이제 힘이 더해진 우리는 함께 여러 차례 같은 시도를 했지만 그런 우리를 조롱하듯 차는 여전히 요지 부동이다.
네 명서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차를 두고 씨름하고 있는 동안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을 지나간다.
워낙 급해서인지 겁도 없이 앞뒤 재지도, 가리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가 팔을 휘저으며 차를 세운다.
큰 차니까 당연히 남자가 운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운전자는 여자다.
"차가 눈더미 속에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황당했을 그녀는 나와 아줌마와 두 딸을 번갈아 보더니 차를 집에다 세워놓고 다시 오겠다고 한다.
그냥 여기 세워놓고 지금 해주시면 안 되나요~~? 소심하게 외쳐보지만 내 마음속 소리가 들릴 리 없는 트럭은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대놓고 거절하기 민망하니 에둘러 말하는 거려니 했다.
내가 도움을 청하느라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의리 있는 세 모녀(母女)는 열심히 엄마는 운전하고, 딸들은 밀고, 온 힘을 다해 차를 움직여 보려 애를 쓰고 있었고 차로 돌아가던 나는 그 사람들 마저 가버릴까 봐 무서워졌다.
사방팔방 아무도 없는 내겐 지금 그들이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이나 큰 위안(慰安)이 되었으니까...
작은 요동도 하지 않는 차 앞에서 바퀴를 빼 보려고 삽질까지 하면서 감싸고 있는 눈을 퍼 나르기도 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 액셀도 밟아보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차는 아예 움직일 의사가 없는듯하다.
까칠하기는...
그때 마침 산책하듯 지나가던 한 가족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아저씨가 이 상황을 보고 웃더니 자신이 운전을 해 볼 테니 뒤에서 밀어보라고 한다.
그가 운전을 하고 더 많은 사람이 힘을 합치게 된 우리는 뒤에서 옆에서 난리 법석을 치면서 영차 영차 밀어댄다.
우리끼리 할 때는 그렇게 꿈쩍도 안 하던 차가... 드디어... 신호가 온다.
역시 남자의 힘이 있어야 했나 보다.
운전하고, 밀고, 똑같이 했는데도 안 움직였는데...
이 놈의 차가 사람도 가리나? 떼끼!~ 네 어찌 그럴 수가!
눈더미 속에 파묻혀 드러누운 채 버티던 차가 별 저항도 없이 스르륵 빠져나온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저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를 연발할 뿐이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이방인에게 이 추운 겨울밤 저렇게나 큰 도움을 베풀어 줄 수 있다니 백번 천 번을 해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
기나긴 겨울밤 아무도 내게 벌어진 일을 알 리도 없고 고요와 적막만 흐르는 이 동네에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에 온 마음을 다해 도와준 너무 고마운 나의 이웃들... 그들은 분명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분명하다.
특히 두 딸까지 동원해 끝까지 내 곁을 지키면서 도와준 앞집 아줌마는 어떤 말로도 부족할 만큼 고마운 사람임은 물론이고 하늘에서 날개를 숨기고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산책을 하느라 그곳을 지나가다 우연히 우릴 보고 도와주러 온 가족인 줄만 알았던 이들은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도와 달라고 했을 때 트럭을 집에 주차해 놓고 오겠다고 했던 바로 그 여자의 가족이었다.
거절하기 뭐해서 그냥 둘러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심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러 와 준 것이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비록 무섭고 막막하긴 했지만 남의 일이라 모른 척해도 그만일 텐데 마다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나를 마치자신들의 일처럼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고 이런 감동을 주는 이들이 내 이웃으로 살고 있는 이곳에서의 삶은 더없이 따듯하기만 하다.
거사를 함께 치러낸 동지끼리 승리의 기쁨을 나누면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생각해서 염치를 무릅쓰고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더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 밖에는 못하고 크나큰 도움에 비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간단한 손인사로만 인사를 대신하고는, 잠시 전에 있었던 사건의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듯 서로 여운이 남은 채로 머물러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을 백미러로 바라보면서 그 자리를 떠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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