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인가? 진상인가?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은 친절하다.
건물에 들어가려면 먼저 들어가라고 아니면 다른 이가 들고 나는 것을 돕듯 문을 잡아 주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순간에라도 깜빡이만 켜면 빵빵거림 없이 그 자리에 서주기도 한다.
신호가 없는 교차로에서는 당신 먼저! 가 룰인 것처럼 당연히 기다려 주고 다치거나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Are you OK?부터 물어봐준다.
점점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팍팍한 삶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점점 없어지고 내가 우선으로 변해가는 요즘 세상에도 감출 수 없는 넉넉함이 툭툭 튀어나와 어딜 가나 친절하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양보를 많이 해 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도 각기 다르듯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 가끔은 인종차별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무례(無禮)한 자들도 있다.
대형슈퍼에서는 종종 2L짜리 음료수를 세일해 준다.
종류에 상관없이 브랜드 별로 4병까지는 한 병에 99센트로 천원도 안 한다는 말이니 꽤 괜찮은 딜이다.
변하기 쉽지 않은 물건들은 세일할 때 미리 사 둔다는 나름의 알뜰 주부 쇼핑 철학(?)으로 이럴 때 주로 구입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목마를 때마다 꺼내 마셔도 되고 마침 며칠 후엔 파트락 파티도 가야 하니 적은 돈으로 큰 인심 한 번 써봐야겠다 싶어 약간의 욕심을 부려 C 사와 P사걸로 4병씩 무려 8병이나 구입하기로 한다.
양이 많으니 카트를 챙겨서 진열대 쪽으로 가본다.
이런 이런!~ 너~무 높다~ 맨 위칸 꼭대기에 있어 꺼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가격으로 생색은 내놓고 많이들 사갈까 봐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고 왜 저렇게 높은 곳에 진열해 놓았을까?
요즘 허리 디스크 때문에 고생을 하던 터라 무리를 하면 안 되는데 그놈의 돈이 뭔지...
몇 푼 아껴 보겠다고 통증을 참아가며 까치발까지 떼고 팔을 위로 쭈~욱 뻗어본다.
~~ 닿을 듯~ 말듯~~ 약을 올린다.
평소처럼 아래칸에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그곳에 발을 놓고 도움닫기 해서 꺼내면 되는데 오늘따라 재고 관리 직원들이 부지런을 떨었나 보다.
그곳마저도 캔음료 박스들로 꽉꽉 채워져 있어 발을 디딜 만한 미세한 공간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미니 사다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숨 쉬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답 없는 키높이 진열대 위만 바라본다.
이때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짱가가 등장하듯이 지금 막 만화영화를 찢고 나와 짠~하고 그 모습을 드러낸 짱가처럼 유난히 키가 큰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그런 내 모습이 안 돼 보인 건지?
친절함인지? "도와줄까요?" 하고 물어준다.
한 두병이면 괜찮다고 할 텐데 8병이나 되니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는 "Yes, please~~ thank you" 덥석 받는다.
짱가의 대타로 출연한 고마운 청년의 도움으로 음료수를 카트에 가득 채우고는 필요한 몇 가지 물품들을 더해 계산대로 향한다.
하나씩 카운터에 올려놓으니 캐셔가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삑삑~ 계산이 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음료수만 남았다.
허리만 괜찮다면야 문제 될 건 없지만 2 리터 병에 음료수가 가득 차 있으니 무게가 제법 느껴진다.
조심하는 차원으로 무거운 것은 안 드는 것이 나을 것도 같고 어차피 같은 회사제품은 다른 종류라 해도 가격이 동일하니까 번거롭게 모두 올릴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브랜드별로 하나씩만 계산대에 놓고는 이해를 돕기 위해 "4개씩"이라고도 말해준다.
캐셔가 카트 안에 널브러져 누워있는 음료수병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8병을 다 올리라고 한다.
"이걸 다? 왜?"
"하나씩 찍어야 하니까"
"그럼 하나를 들고 반복해서 스캔해... 그러면 되잖아..."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말대답하듯 말하고 있는 나를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번 힐긋 쳐다 보고는
"따로따로 해야 해"
"뭐가 다른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다.
이번에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래야 하니까..."라고 말한다.
음료수를 많이 사는 것이 불법도 아니고 이따금씩 세일을 하니 처음도 아닌데 왜 안된다는 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래야만 한다는 말 한마디 툭 던져놓고는 막무가내로 다 올리란 말만 되풀이한다.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화가 난다.
괜히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 같고, 부당하다는 생각도 드니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요구에 응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똑바로 보면서 눈만 껌뻑 껌뻑할 뿐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지 딴에도 말 안 듣고 서있는 나 때문에 성이 나는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빨리 하라고 재촉한다.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니? 싫어... 절대 안 한다고...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가만히 있기 뭐 한 지 그녀가 눈을 흘기면서 나를 쳐다보길래 말한다.
"꼭 하나씩 해야 한다면 손스캐너로 하면 되겠네... "
"손스캐너는 사용 못해"
"왜 안 되는데?"
"스토아 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제껏 그런 룰은 없었어"
"......"
손스캐너가 없거나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는 룰 때문에 사용하면 안 된단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다.
할 말 없으니 아무 말 잔치를 벌이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날 뭘로 본 걸까?
싼 거에 환장해 사재기나 하고 있는 동양 아줌마로 보고 무시하는 건가? 여간 심정이 상하는 게 아니다.
다른 이들은 오히려 무거운 것은 카트에 그대로 두라면서 손수 손스캐너를 들고 나와 계산해 주기도 하는데 왜 이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다 된다고 말하는 걸 혼자만 안된다고 하는 건지...
쓸데없이 엉뚱한 부분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은 건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 용광로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불씨가 보일리 없는 그녀는 활활 타오르도록 기름을 확 끼얹고는 카운터에 음료수를 올리라고 다시 한번 불을 지핀다.
한계치를 넘어선 나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눈에는 찌릿찌릿 레이저를 쏘고 목청은 최대한 높여 영화 "친구"의 명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를 외치듯 "No, I can't, you do it!" 당차게 쏘아붙인다.
싸늘한 나의 반응에 그녀의 표정도 만만치 않다.
그녀와 내가 신경전을 벌이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잠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하다.
한가한 평일 오후라 그런지 다행히 내 뒤에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네가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 오기 부리듯 꼼짝도 안 한다.
눈치 없이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눈싸움하듯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를 노려 본다.
단호한 나의 태도에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당황한 건지 아니면 놀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조금 더 버티던 그녀는 결국 테이블 위에 있는 손 스캐너를 잡더니 들고 나온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바코드가 읽히면서 계산이 마무리된다.
"왜 되면서 안된다고 했냐?"는 둥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사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 뒷 손님한테도 피해를 주면 안 되고 어차피 계산을 마쳤으니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아니다 싶어 영수증을 받아 챙기고 계산대를 나온다.
이젠 영수증을 확인해 봐야 한다.
슈퍼에서 물건을 사면 가끔 가격이 잘못 찍힐 수가 있다.
개수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바뀐 가격을 매장에는 붙여놓고 컴퓨터로는 고쳐놓지 않아 내가 본 가격과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이유로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다.
일단 가게 밖으로 나오면 잘못되었다고 우긴 들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
글씨가 자잘해 돋보기 없이 잘 보이지도 않는 종이쪼가리를 대충 훑어보다가 혹시 싶어 음료수를 확인해 보니역시나!~~ 밉상인 그녀가 손스캐너로 찍어 놓은 개수는 총 10개였다.
내가 산 건 분명 8개인데 1개도 아니고 2개나 더...
아마도 4개까지의 수량을 초과하면 할인된 가격이 아니라 원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한 모양이다.
대단하다~~~~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계산이 끝나고 나면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캐셔가 아닌 Customer Service 코너에서 모든 걸 해결해 준다.
분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일단 그곳으로 간다.
줄 서 있는 동안에도 화가 가라앉질 않아 씩씩 거리며 째려보듯 그쪽을 보니 그녀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분명 알고 있는 게야! 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니 죄를 알렸다!
당해봐라 하고는 두 개나 더 찍었는데 아무리 멘털갑이라고 해도 신경은 쓰이겠지.
내가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할 거란 생각을 못하진 않았을 텐데...
하긴 보통의 경우 영수증 확인도 안 하고 땅에 버리거나 휴지통에 버려달라면서 그냥 가는 사람도 많긴 하니까...
내 차례가 되어 영수증을 내밀며 개수가 잘못되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연륜이 있어 보이는 직원이 카트에 있는 음료수 개수를 센다.
원래는 이유도 안 묻고 바로 환불해 주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리턴 처리를 하는 동안에 눈은 컴퓨터를 바라보고 손가락은 자판을 두드리느라 열일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누가 계산했냐고 묻는다.
"쟤가 그랬대요~..."라고 말하듯 그녀를 가리킨다.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매니저가 아니었나 싶다.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궁금했는지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지은 죄가 있으니 궁금도 하시겠지...
사실 부랴 부랴 Customer Service에 간 이유가 환불도 환불이지만 매니저를 불러 조금 전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그녀의 만행을 알려주고 그것에 대해 컴플레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영수증에 그녀 이름이 있으니 내가 고자질하듯이 일일이 다 말하지 않아도 야단이든 훈계든 어떤 식으로든 소리는 듣겠지 싶어 아무 말 없이 환불만 받고 나온다.
환불 영수증을 들고 가 그녀에게 "너 왜 그랬니?" 따져 물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참는다.
어차피 그녀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캐나다는 유색과 백색인종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 우리가 완전한 캐네디언이 아니듯 그녀도 오리지널 캐나다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왜 내게 그런 얼토당토 하게 말도 안 되는 말까지 하면서 쓸데없는 기싸움을 벌이려 한 건지도 알 수는 없다.
남자 친구랑 다퉈 기분이 별로였는지 아님 단순한 인종차별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그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지레짐작하고 예민하게 군 것일 수도 있고 그녀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내가 진상손님이다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분명 무례했고 그런 태도에 주눅 들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큰 소리로 언성 높이면서 매니저 부르고 대단한 뭔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억울해서 속상해하지 않을 만큼은 이유 있는 반항아로,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대적(對敵)까지 했으니 작은 응징은 했다고 생각한다.
무례를 범하려는 자에게 내가 한 행동은 지극히 소심한 반항일 뿐이다.
정작 그녀는 눈도 끔쩍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굽히지는 않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인종차별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의도로든 나를 모욕하려 했다 해도 말 한마디 못해보고 당하지는 않았으니 못된 그녀의 헛된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그날 난 반항이었을까? 아니면 진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