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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Feb 15. 2024

무례하려는 자에 대한 소심한 반항

반항인가? 진상인가?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은 친절하다.

건물에 들어가려 하면 먼저 들어가라고 아니면 자기가 나가면서 열었던 문을 잡고 다른 이가 들고 나는 것을 돕듯 기다려주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순간에라도 깜빡이만 켜면 빵빵거림 없이 그 자리에 서주기도 한다.


신호가 없는 교차로에서는 "당신 먼저!"가 당연한 룰인 듯 일단 서주고 다친 사람이 있거나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듯 "Are you OK?"부터 물어봐준다. 


점점 비대해져 가는 도시에 비례해 그 대가로 치르게 되는 팍팍한 삶 때문에 점점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내가 우선으로 변해가는 요즘 세상에도 감출 수 없는 넉넉함이 툭툭 튀어나와 어딜 가나 모른 척하는 일 없이 친절하고 여러 면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양보를 많이 해 준다.


그렇다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가 없듯이 가끔은 인종차별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무례(無禮)한 자들이 있다.





하루는 슈퍼에 갔더니 2L짜리 음료수를 세일을 하고 있었다.

콜라와 사이다 상관없이 브랜드 별로 4병씩까지는 한 병에 99센트로 그 큰 사이즈가 천원도 안 한다는 말이다.


알뜰 주부(?)의 나름의 쇼핑 철학(?)인가?

"변하기 쉽지 않은 물건들은 꼭 세일할 때 미리 사 둔다"를 철칙처럼 지키며 사는 편이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마셔도 되고 며칠후면 파트락 파티도 가야 하니 적은 돈으로 큰 인심 한 번 써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욕심을 부려 C 사와 P사걸로 나눠서 4병씩 무려 8병을 구입하기로 했다.


진열대가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 꺼내기가 쉽지 않다.

가격은 싸게 해 놓고 가져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세일은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갈까 봐 꺼내기 힘들게 하려고?

그럴 리가~~


디스크 때문에 허리 상태가 안 좋아 고생을 하던 터라 무리를 안 하는 것이 좋지만 몇 푼 아껴 보겠다고 통증을 참느라 퉁퉁거리면서 까치발까지 떼고 팔을 쭈~욱 뻗어본다.

나라는 사람은 참 ~~~


이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짱가가 나타나듯이 짱가처럼 키가 큰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낑낑거리고 있는 그 모습이 안 돼 보인 건지? 특유의 친절함인지? "도와줄까요?" 하고 물어준다.


한 두병이면 그냥 "내가 할게요" 하겠지만 8병이나 되니 민폐라는 걸 알지만 그가 가버리기 전에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Yes, please~~ thank you" 한다.


고마운 청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음료수로 카트를 가득 채우고는 필요한 몇 가지 다른 물품들을 더해 계산대로 향한다.

물건을 하나씩 카운터에 올려놓으니 캐셔가 바코드를 기계에 대고 찍는 소리가 계산이 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음료수를 찍을 차례이다.

허리만 괜찮다면 사실 별 문제없는 일이지만 2 리터 되는 병에 음료수가 가득 차 있으니 무게가 꽤 나가듯 무겁게 느껴진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으니 무거운 것을 안 드는 것이 나을 것도 같고 똑같은 거니까 곱하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는 브랜드별로 하나씩만 계산대에 올려놓고 "4개씩"이라고 말해준다.

보통은 더 올리려고 해도 "괜찮다"라고들 말해준다.


그녀는 달랐다.

카트 안에 늘어져 누워있는 음료수병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8병을 다 올리라고 한다.

"모두 다? 왜?" 하니까 "하나씩 찍게"하고 말한다.

"똑같은 거니까 하나씩만 있으면 되잖아" 하니까 약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스캔을 다 따로따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를 들고 4번씩 반복해서 스캔하면 되잖아... 뭐가 다른데?" 하니까 이번에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거슬리게 "그래야만 하니까..."라고 말한다.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음료수를 좀 많이 사는 경우이긴 하지만 처음도 아니고 왜 안된다는 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래야만 한다는 말 한마디 던져놓고는 막무가내로 다 올리란 말만 되풀이한다.

이해도 안 되고 어의도 없다.


나를 골탕 먹이고 싶은 건가?

도대체 다른 이들은 다 되는 걸 왜 안된다고 하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황당하고 기가 차 그녀를 쳐다보면서 눈만 껌뻑껌뻑... 아무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대로 있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니 그녀의 요구에 응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지 딴에도 말 안 듣고 가만히 서있는 날 쓰윽 쳐다보고는 성이 나는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빨리 하나씩 올리라고 재촉한다.

더 이상 가만히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신 말대로 꼭 하나씩 다 스캔해야 한다면 손스캐너를 이용할 수도 있잖아" 하고 쏘아붙인다.

"손스캐너는 사용 불가니까 무조건 직접 올려놓고 해야 한다"고 한다.

손스캐너가 없거나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사용하면 안 된단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손스캐너를 왜 사용하면 안 되는데?"물으니 "스토아 룰"이란다.

"스토아 룰? 이제까지 여기 올 때마다 그런 룰은 없었어" 하니까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룰"이란다.

헉!~~ 어이상실... 할 말 없으니 새로운 룰? 그걸 믿으라고? 도대체 날 뭘로 본거야?

 

내가 이곳엘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은 카트에 그대로 놓으라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나서는 수고스럽지만 직접 손스캐너를 들고 밖으로 나와 찍어주기도 하는데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거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동양 아줌마가 싼 거에 환장해서 저리도 많이 사가나 싶어 무시하고 싶은 건가? 

많이 사든 적게 사든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일까? 

여간 심정이 상하는 게 아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불씨가 보일리 없는 그녀는 내 용광로에 기름을 확 끼얹어 활활 타오르도록 다시 한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카운터에 음료수를 올려놓으라고 불을 지핀다.


더 이상의 한계치를 넘어선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목청을 최대한 높여 No, I can't,  you do it! 하고 당차게 말해버렸다.


싸늘한 나의 반응에 그녀의 표정도 만만치 않다.

그녀와 내가 신경전을 벌이면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잠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했다.


한가한 평일 오후라 그런지 다행히 내 뒤에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네가 하려면 하고 안 하려면 말아란 뜻으로 오기 부리듯 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있었다.


눈싸움에서 눈을 피하거나 움직이면 지는 거다.

감기려는 눈을 필사적으로 뜨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를 노려 본다.


단호한 나의 태도에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당황한 건지 아니면 놀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조금 더 버티더니 결국 테이블 위에 있는 손 스캐너를 들고 나온다.

헐~~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그녀가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 판명된 셈이다. 


삑삑 소리를 내며 코드를 찍는다.

진작에 그랬어야지...

기가 막힌다.


"왜 되면서 안된다고 했냐?"는 둥 더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사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손님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고 어차피 계산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아니다 싶어 영수증을 받아 챙기고 계산대를 나왔다.


슈퍼에서 물건을 사면 가끔 가격이 잘못 찍힐 수가 있다.

개수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바뀐 가격을 매장에는 붙여놓고 컴퓨터로는 고쳐놓지 않아 내가 본 가격과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이유로 습관처럼 그 안에서 영수증을 확인하고 나온다.

일단 가게 밖으로 나오면 잘못되었다고 해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


숫자가 자잘하게 적혀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종이를 대충 훑어보다가 다시 한번 헉!~~~ 밉상인 그녀가 찍어 놓은 개수는 총 10개였다.

내가 산 건 8개인데 1개도 아니고 2개나 더 계산한 것이다.

아마도 4개까지의 수량을 초과하면 할인된 가격이 아니라 원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한 모양이다.

대단하다~~~~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계산이 잘못되면 캐셔가 아닌 Customer Service 코너에서 해결해 준다.

일단 그곳으로 간다.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화가 가라앉질 않아 씩씩 거리면서 그쪽을 쳐다보니 그녀도 의식이 되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분명 알고 있는 게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니 죄를 알렸다!


"당해봐라 "하고 두 개나 더 찍었는데 아무리 멘털갑이라고 해도 신경은 쓰이겠지.

내가 영수증을 꼼꼼히 확인할 거란 생각까지는 못했나? 

하긴 보통의 경우 영수증 확인도 안 하고 땅에 버리거나 휴지통에 버려달라면서 그냥 가는 사람도 많긴 하니까...

확실히 나를 물로 본 게지.


내 차례가 되어 영수증을 보여주고 개수가 잘못되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연륜이 있어 보이는 직원이 나와 카트에 있는 음료수 개수를 센다.


평소에는 이유도 안 묻고 바로 환불해 주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리턴 처리를 하는 동안에 눈은 컴퓨터를 바라보고 손가락은 자판을 두드리느라 열일을 하면서 입으로는 누가 계산했냐고 묻는다.


"쟤가 그랬대요~..."라고 말하듯 그녀를 가리킨다.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매니저가 아니었나 싶다.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궁금했는지 그녀도 계속 이쪽을 본다.

지은 죄가 있으니 궁금하겠지...


사실 부랴 부랴 Customer Service에 간 이유가 환불도 환불이지만 매니저에게 조금 전 겪었던 일을 다 말하면서 그녀의 만행을 알려주고 그것에 대해 컴플레인을 하려고 지만 아무 말 없이 환불만 받고 그냥 조용히 나온다.


영수증에 그녀 이름이 있으니 야단이든 훈계든 어떤 식으로든 소리는 듣겠지 싶어 굳이 내가 고자질하듯이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환불 영수증을 들고 가 그녀에게 내밀면서 "네가 이렇게 했다. 왜 그랬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참는다.

어차피 그녀 뜻대로는 안되었으니까.





캐나다는 이민자의 나라라고 한다.

많은 유색인종들이 섞여 살고 있으니 그녀가 캐나다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왜 내게 그런 얼토당토 하게 말도 안 되는 말까지 하면서 쓸데없는 기싸움을 벌이려 한 건지도 알 수는 없다.

남친이랑 다퉈 기분이 별로였는지 아님 단순한 인종차별이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초짜라면 뭣도 모르니까 부당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미안한 듯 멋쩍어하면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 줬을 수도 있다.

대신에 집에 가면 분해서 잠을 못 이루겠지... 


아마 그녀도 내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했는 지도 모른다.

잘못된 신념이라도 자신의 행동이나 요구가 정당하다고만 믿고 있었을 수도 있는 그녀에게 말도 안 듣고 게다가 조목조목 따지듯 말대답까지 하면서 끝까지 버티고 있던 모습이 얄미워서인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계산까지도...


고의로 그렇게 한 것 같아 괘씸하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지레짐작하면서 예민한 걸 수도 있고 그녀 입장에서 보면 진상 부린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분명 무례했고 그런 태도에 주눅 들 필요도 이유도 없다. 


물론 큰 소리로 언성 높이면서 매니저 부르고 대단한 뭔가를 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웃으면서 대할 만큼 여유 부리면서 쿨하게 넘긴 것도 아니다.


정작 그녀는 눈도 끔쩍 안 할 수도 있을 만큼 하찮은 일일 수도 있지만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집에 와서 속상해하지 않을 만큼 이유 있는 반항아가 되어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대적(對敵)까지 했으니 작은 응징은 했다고 마음속에서 내게 말을 건네주며 쓰담쓰담해 준다.


대담하게 무례를 범하려는 자에 대해 내가 한 행동은 지극히 소심한 반항일 뿐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굽히지 않고 맞서 봤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인종차별이든 아니든 어떤 의도로든 심하게 나를 모욕하려 했다 하더라도 결코 당하지 않았으니 그녀의 헛된 시도 물거품이 되었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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