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무슨 일이?
폭포보다 더 센 녀석을 만나다
캐네디언 중에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살다 간 우리도 그 꼴 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 산다고 해서 서울에만 있지 말고 부산도 가고 대전도 가고 제주도도 가봐야 하는 것처럼 캐나다에 살면서 적어도 캐나다에 있는 10개의 주(Province)와 3개의 준주들은 다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식을 위해 캐나다에 왔는데 먹고 사느라 바빠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얼마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가?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여기까지 왔으면서 정작 아이들과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니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출근길에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퇴근하면서는 픽업하고 주말이나 연휴도 같이 쉬니까 늘 아이를 케어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이런 반복적인 루틴 말고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주말에 근교로 나가는 것 말고 제대로 된 여행한 번 가본 적은 없는듯하다.
맘만 먹으면 며칠 휴가 내고 어디든 가 볼 수도 있는데 이런저런 핑계들로 이유를 만들어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에서의 삶에 조금은 익숙해져 가던 어느 해 여름
어차피 아이가 대학을 가면 우리 곁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될 테고 그때는 기회를 갖고 싶어도 쉽지 않으니 더 이상은 후회할 일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가족끼리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구경도 하면서 살기로 다짐한다.
쇠뿔도 단김에...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본다.
아들의 방학이 시작되면서 우리도 거기에 맞춰 휴가계획을 짜보기로 한다.
큰 맘은 먹었어도 현실과 타협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결국 소심하게 주말연휴 끼고 3박 4일... 그러면 결국 금요일 하루 휴가?
휴가도 아닌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한다.
시내에서 두 시간 정도 쌩쌩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역시 유명 관광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람이 많다.
도착하자마자 세차게 내리는 물살 때문인지 폭포에서 울리는 묘한 진동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라고만 믿고 있던 내게 브라질 이과수 폭포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남편이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난 척하듯 말한다.
스포 당한 드라마는 더 이상의 재미가 없어지듯이 그 말을 듣고 봐서 그런지 아니면 세상에 놀랄 일이 하도 많아서인지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색다르거나 경이롭지는 않았다.
많이 보던 그림이라 별 감흥도 없다.
물론 커다란 하나의 물줄기가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폭포와는 다르게 여러 개의 실타래를 한꺼번에 풀어헤쳐 늘어뜨려 놓은 것처럼 일열로 줄 마쳐 펼쳐져 있어 넓이가 꽤나 웅장하게 보이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서 볼까? 다가가니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물살의 무리의 힘에서 못 버티고 튕겨져 나오는 물방울들이 머리를, 옷을 적시고 물보라가 피어오르며 만들어내는 수증기 덕분에 살갗이 끈적끈적해진다.
폭포에 와서 폭포를 보고 나니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보트 타고 폭포 근처까지 갔다 돌아오는 투어를 해볼까 하다가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찔한 경험은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우비를 입고도 흠뻑 젖어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하고 싶은 마음이 쏴악 사라진다.
그렇다고 여행이라고 왔는데 폭포만 보고 돌아가기에는 뭔가 많이 아쉽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로 밤에만 펼쳐진다는 불꽃놀이 쇼를 안 보고 갈 수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아직 남았다.
뭘 하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하니 차를 타고 오느라 지나친 것들을 다시 주워 담으려 입구까지 걸어가 보기로 한다.
가는 길목마다 음식을 팔고 있는 부스에선 코끝에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들로 행인들의 식욕을 자극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화려한 음식들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입구 밖으로 살짝 빠져나가 보니 진짜 관광지는 폭포가 아니라 폭포를 끼고 있는 주변 마을 바로 이곳인 듯했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고 공룡모형들도 눈에 띈다.
설악산 입구에 가면 산채비빔밥을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듯이 근처에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가장 만만하고 익숙한 피자집으로 들어가 피자랑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허기를 채운다.
배도 차고 소화도 시킬 겸 오락실에 들르니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신나 즐기는 듯하다.
아들과 남편이 농구와 몇 가지 게임을 하고 나니 시간이 제법 지나 이제 폭죽놀이를 보러 가야 한다.
우리처럼 불꽃놀이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새 와 자리를 메우고 꽤 많은 인파로 인해 여기저기 사람에 치이면서 폭포 쪽으로 조금 걷고 있으려니 차가운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을 스친다.
기껏 알려준 싸인이었는데 그땐 알아차리지 못한다.
새가 오줌을 싸고 지나갔나?
폭포물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일단 신호는 주었으니 나는 죄 없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봐라 요놈들... 하듯이 갑자기 소낙비가 거침없이 퍼붓는다.
비 온다는 소리는커녕 해가 쨍쨍 났었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무슨 날벼락인가?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얹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 지붕(canopy) 아래로 피신을 하긴 했는데 벽이 없어서 인지 비가 그대로 들이친다.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비는 똑바로 내리지도 못하고 굵은 사선을 긋는다.
가끔 어르신들이 어깨 통증 때문에 안마를 위해 폭포를 맞으러 간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는데 마사지를 요구한 적도 없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를 온 등으로 맞은 것처럼 따갑고 아프다.
살면서 이리 대책 없는 비는 처음이다.
나도 나지만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듯 귀로 얼굴로 거칠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머리는 이미 감았고 계속 몰아치는 물세례를 어떤 저항도 없이 등으로 다 받아내고 있는 아들을 보자니 안쓰러워 비가 좀 덜 들이치는 곳으로 살짝만 옮겨 보라고 신호를 보내도 사춘기 소년의 똥고집인지 무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서 그걸 다 맞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몹쓸 비가 가엾은 아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대는 것 같아 속상하고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가만히 있을까? 걱정이 되어 그쪽으로 자꾸 눈이 간다.
이 순간에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그 이름값의 위세를 펼치며 거침없는 물살을 세차게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보다 훨씬 힘과 기세가 강열한 소낙비와 정면으로 맞닥뜨림으로써 흠뻑 젖어 버렸다.
신나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듯 쏟아붓더니 잠시 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간의 퍼포먼스를 마친 소낙비가 금세 존재감을 감추고 사라져 가는 사이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기고 있던 햇빛이 다시 고개 내민다.
무방비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우리는 영화 속 애로 배우가 야한 옷 입은 채 샤워 마치고 나온 것처럼 시스루(see through)... 속이 보일 정도로 옷은 다 젖고 풀어헤친 듯한 머리는 얼굴에 쫙쫙 달라붙는다.
물폭탄을 제대로 맞은 듯했다.
물에 빠진 생쥐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19금 영화 한 편을 찍었지만 야하기는커녕 꼬락서니가 처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짧은 시간 안에 훑고 지나간 흔적치고 몹시 참혹한 모습이었다.
우스워진 몰골은 둘째치고 다 젖어 축축해진 옷을 그대로 입고 신발안으로 들이친 물 덕분에 아기들 신발처럼 걸을 때마다 뾱뾱 소리를 내며 퉁퉁 부었을 발을 질질 끌면서도 불꽃놀이는 포기할 수 없었는지 잘 보이는 자리를 찾겠다고 처량하게 걷고 또 걷는다.
어둑어둑 해지자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아름다운 빛들이 하늘에 수놓아지면서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눈부신 빛을 발하며 한꺼번에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멋진 광경을 보니까 조금 전 일은 벌써 다 잊었나? 대학 축제 마지막날 터지던 폭죽이 생각난다.
단순하기는...
잠시 옛 생각에 잠기는 듯했으나 분위기에 취하기도 전에 쇼는 끝나버린다.
억센 비를 온몸으로 맞아 눅눅하고 질척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렸는데 모든 일정이 끝나니 허무할 정도로 보람이 없다.
여행의 끝엔 어쩔 수 없이 피곤이 썰물처럼 밀려온다.
예상 못한 소낙비에 무력하게 녹다운당한 채, 빗물을 머금어 축 늘어진 옷 무게만큼이나 무거워진 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길은 멀게만 느껴지고, 고생하고 떠나는 우리를 친절하게 배웅이라도 해 주듯 창밖으로 하늘의 별빛들만 소리 없이 우리를 따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