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한적한 주말 오후 남편과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주문한다.
넓지 않은 카페 안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노인만 창가 쪽에 앉아 때늦은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 뿐 꽤 조용하다.
멋들어진 백발의 머리와 이마엔 주름 그리고 듬직하고 넉넉해 보이는 풍채로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두 노인은
마치 유명 치킨집 앞에 가면 하얀 양복을 입고 온화한 미소와 함께 지팡이 들고 서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다.
풍겨오는 외모와는 달리 그들은 소박한 아침으로 달걀과 베이컨 그리고 토스트를 마치 스테이크라도 썰듯이 한 손에는 나이프 다른 손에는 포크를 번갈아 사용하며 입속에 넣고는 연신 허허 웃는 소리를 내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때 마침 나온 커피를 받아 들고 우리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쪽으로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커피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이 몸의 긴장을 풀어준다.
부부가 오래 함께 살다 보면 딱히 할 말도 없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커피내음이 나고 음악이 있는 분위기에 취해 밖을 내다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이유로 그곳을 지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알리 없는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연출해 보여주는 장면마다 하나의 무대 배경이 되어 우리에게 작은 볼거리를 선사해 준다.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듯 넋 놓고 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노인중 한 분이 우리 쪽을 보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들은 6.25 전쟁 때 캐나다 군인으로서 파견되었던 참전 용사라고 한다.
외국에 나와 살다 보니 혹시라도 한국을 알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든다.
우리도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잘 모르는 한국 전쟁에 대해 자신은 직접 참여했다고 자랑하듯 말하고 있는 캐나다 노인의 말이 조금은 생소하지만 그 시대를 겪어낸 우리의 할아버지들 같아 맞장구 쳐주듯 목소리 톤을 약간 높여 말을 해 본다.
"어머!~ 그러셨어요?"
이때만 해도 그들이 여행이 아닌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살짝 관심을 보여주니 군대 다녀온 남자들이 군대이야기만 하듯 그들도 묻지도 않은 자신들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한참을 신나서 얘기하던 그는 어쩌면 정말 궁금했을 수도 있는 질문을 한다.
"너희는 캐나다에 어떻게 온 거야?"
"영주권 받아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No Way!~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예상외의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황당하기도 하고 의아해져서 묻는다.
"왜요?"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 서울에는 빌딩이 하나밖에 없었어"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무슨 소리지? 내가 본 그림으로는 그 당시가 물론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보다는 많던데...
"너무 가난해서 우리들이 집차를 타고 지나다닐 때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을 내밀며 초콜릿이며 껌이며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 투성이었는데 너희가 어떻게 영주권을 받아서 와? 말도 안 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려니 기가 막혀온다... 아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그의 눈에 우리는 자신들이 과자를 던져 주면서 보았던 가난한 나라에서 온 피난민 정도로만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니 난민(refugees)으로 왔으면 모를까 합법적인 영주권을 받았을 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민? 우리가? 이거 좀 많이 억울해지는데...
"아니요. 절차대로 영주권 신청하고 캐나다 정부가 요구하는 모든 자격요건에 맞아 승인받고 합법적으로 영주권 받아서 왔어요"
당당하게 말했지만 우리가 하는 말을 못 믿겠다는 듯 두 영감님들은 서양인들 특유의 어깨 들썩임 함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살 흔든다.
그런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를 아니 한국이라는 나라를 완전히 무시하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언짢아진다.
지금의 세상에서도 우크라이나나 하마스처럼 전쟁의 폐허 속에서의 삶은 참혹하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그 시절 한국은 그저 국력도, 힘도 없어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TV도 안 보시나?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자신들이 참전했던 불쌍한(?) 나라, 한국이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그 어려운 하계, 동계 올림픽을 치러냈고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들을 통해 오스카, 에미상을 받으면서 엄청난 인기와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는 사실, 게다가 한류나 BTS , K-Pop, K- Drama 같은 엔터테인먼트 관련들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젊은이들이 무척 열광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노인분들이라 설명을 해줘도 믿기가 쉽지는 않은 듯하다.
더구나 전쟁 이후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으니 빌딩이 하나(?)밖에 없던 서울에 이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건물들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변해버렸다는 사실도 알리가 없고 지금의 변화된 모습은 아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은 이제 당신들이 있었던 그때의 모습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달라졌다고 입이 닳도록 말을 한다 한들 쇠귀의 경 읽기...
뇌리에 아직까지도 6.25 전쟁이 벌어지던 때의 참담했던 장면에만 머물러 기억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말이 와닿을 리가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캐나다에 와 있는 한국인들을 모두 난민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몇 년 만에 한국에 가보면 어마어마한 빌딩들과 미래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건물들 때문에 우리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예요.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시면 좋겠어요"
기분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노인들이니 적당한 선에서 예의를 차려준다.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되는 건 동이나 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고집 센 노인들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해하려 들지는 않는 듯하다.
저들끼리 알 수 없는 제스처로 사인을 주고받고는 대화를 나누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마저 마친 후 우리에게 가벼운 손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난다.
한국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는 불과 오래지 않은 시간에서 조차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크게 높아져 있다.
그토록 많이 달라진 지금의 시점에도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 몇몇 캐나다 노인들 눈에는 여전히 우리를 먹을 것을 구걸하던 그 시절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난민으로만 본다는 그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타국에 살다 보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런 편협한 시선이 불편할 정도로 야속하고 서운하다.
처음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삼성이나 엘지가 한국 상표인 줄 몰랐다는 사람도 많았고 김치나 김은 냄새난다고 해서 아이 도시락에도 넣어줄 수가 없었는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먼저 한국을 좋아해 가보고 싶어 하고 김치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할 정도로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게다가 한국 슈퍼만이 아닌 이곳의 대형슈퍼마켓에서도 김치며 김, 만두, 불고기까지 파는 걸 보면 일본음식 하면 떠오르는 스시 못지않게 K-Food의 인지도도 상당히 높아졌음을 몸소 느끼게 되어 뿌듯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거리를 나가면 현대나 기아와 같은 한국상표가 붙은 자동차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고장 잦은 미국차보다 오히려 더 좋은 평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이제는 어딜 가나 Made In Korea라는 마크가 붙어있는 상품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K- 열풍이 다양한 분야에서 여기저기 뿌리내려 좋은 뜻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진다.
이 기세를 몰아 앞으로 더 많은 영향력 있는 한국인이 그리고 한국브랜드가 세계 어느 곳에나 스며들어 코리아의 위상이 지금보다도 훨씬 높아져 난민은커녕 그 어떠한 편견도 없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2002년 월드컵 때 빨간 티를 입고 너도 나도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하나로 뭉쳤던 그 에너지와 힘으로 지구 어딘가에서 우리는 또 다른 K- 열풍을 만들어 낼 거라 의심치 않으면서... 대한~민국! 짝짝~짝~짝~짝!